산사에 오르는 기분은 언제나 특별하다. 아마 특유의 고요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간 세상살이에 지쳐 오염된 감각들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도 좋아하는 장소는 경주 토함산이다. 험준한 바위라고는 없는, 말 그대로 토산(土山)인 이곳은 산 전체가 고요한 절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가파른 길이 거의 없기에 산책하기도 편하지만 이는 그저 매력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산의 특별함은 그곳을 가득 채운 자비로운 기운에 있다. 마치 고요한 우주 한가운데 속으로 들어온 듯한 그 느낌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을 받기에 고향이 아님에도 고향처럼 늘 그리운 곳이다. 특히 가을날의 산사는 단풍과 바람이 물과 어우러져, 그 어느 곳을 가도 절경이다. 가을의 토함산 역시 그 특별함이 배가되는 듯하다.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엽락(葉落)’의 계절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삶의 끝과 죽음의 시작이 맞닿아 있는 때이다. 시작이 곧 끝이요, 끝이 곧 시작인 이 부처의 진리를 가을날 토함산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고교 시절, 어렵게 느껴졌던 한용운의 시 구절,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의 뜻을 깨달은 것도 수학여행 코스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였다. ‘푸른 산빛(희망)’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엽락, 이별)을 향해 가는 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별의 슬픔을 ‘새 희망의 정수박이’로 옮겨 붓는 화자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도 토함산을 둘러싼 그 자비의 기운이 어린 내게 작은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의 경험인지 지금도 가을의 초입에는 늘 토함산이 떠오른다. 그때는 이른 아침이었기에 산에 안개가 자욱했는데 석굴암에 이르러 본 부처의 자비로운 미소가 안개 속에서 공명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 듣는다는 관세음(觀世音)도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고서 미소 지은 것일까. 그 자비로움이 주던 느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내 잊지 못할 듯하다.

[불교신문3335호/2017년10월4일자] 

김기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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