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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두의 고승전] <20> 도림당 법전대종사수행 정진 말고는 모두 부질없다

 

종정, 총무원장, 총림방장 등
주요소임 두루 역임하면서도 
치열한 정진으로 일관 ‘수좌’
“돌아보니 수행을 더 철저히 
하지 못한 것 아쉽다” 회고  

도림당(道林堂) 법전(法傳, 1925~2014) 대종사는 출가수행인으로서 일생을 부처님 법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데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일관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 살아있는 동안 참으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사람 몸을 받았고 이왕 살아야 하는 일이라면 제대로 잘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도를 닦는 것이 가장 제대로 사는 길이라고 믿고 한 평생을 살아 왔다. 수행을 제대로 하는 것 말고는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확신하며 이 길을 걸어왔다. 한 주먹으로 황학루(黃鶴樓)를 거꾸러뜨리고 한 번의 발길질로 앵무주(鸚鵡洲)를 뒤집었다는 임제 선사의 기개와 찬 서리 속에도 빛나고 빛나던 칼날이라는 법연(法演) 선사의 반야검(般若劒)앞에서 젊은 시절 나 역시 정진의 힘으로 그 선사들만큼 당당했노라고 자부했다. 성철(性徹) 노사를 비롯하여 늘 훌륭한 선지식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청복(淸福)을 누린 것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당신 생전에 쓴 자서전 서문이다. 법전스님은 간화선 수행이 성불의 지름길임을 굳게 믿고 법을 위해 몸뚱이를 바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투철한 수행정신을 곧추세우고 용맹정진으로 큰 성취를 드러냈다. 

1948년 봉암사 결사에서 성철스님을 만나 이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따랐다. 자신의 공부를 성취한 후 후학을 이끄는 한편 대작불사도 이루었다. 해인사 주지 시절 궁현당과 관음전을 중수 확장하고 김천 수도암을 중창했으며 대구 도림사를 창건했다. 당신 평생의 3대불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스님은 또한 종단의 큰 소임도 두루 역임했다. 중앙종회의장, 총무원장, 호계위원장을 거쳐 해인총림 방장, 원로회의 의장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종정 등 중책을 맡아 종단의 위상을 드높이고 후학들의 청정 수행가풍 진작에 온 힘을 다했다. 

“육신의 몸을 벗으면 몇 겁을 살더라도 다시 수행자가 되어 마음 밝히는 일에 생을 걸리라. 다음 생에도 바른 스승을 만나 바르게 불법(佛法)을 닦는 수행자로 살면서 일체 중생과 한 식구처럼 살고 싶다. 돌아보니 새삼 수행을 더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당신 자서전 <누구 없는가>(2009년, 김영사) 말미에 쓴 글이다. 스님은 책에 쓴 대로 살다갔고 후학들은 스님의 자취를 경책삼고 있다. 

법전스님은 1925년 음력 12월8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연암리에서 아버지 김원중, 어머니 최호정의 3남1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향봉(香奉)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스님은 14세 되던 해인 1938년 장성 고불총림 백양사 청류암으로 출가했다. 1941년(17세) 영광 불갑사에서 설호(雪浩)스님을 계사로 설제(雪醍)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 했다. 법명은 법전. 1947년(23세) 백양사 강원(승가대학) 대교과정을 마치고 백양사의 만암(曼庵)스님 회상에서 참선수행에 정진했다. 

1948~1950년(24~26세) 문경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다. 이때 성철스님을 만났다. 봉암사 결사 해체 후 결사참여 대중들은 흩어졌다. 스님은 경남 고성 문수암에서 하안거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1951~1954년(27~30세)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을 시봉하면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는 이 무렵 성철스님으로부터 받았다. 

1955년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스님을 모셨으며 문경 원적사와 상주 갑장사에서 안거했다. 1956년(32세)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동안거에 들어 홀로 정진했다. 1957년 파계사 금당선원에서 정진하면서 성전암 성철스님에게 법을 묻고 정진력을 깊이 하게 됐다. 

1958년 태백산 홍제사에서 하안거, 동안거, 1959~1966년 문경 갈평 토굴 및 태백산 도솔암, 사자암 백련암, 대승사, 김용사 금선대, 지리산 상무주암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1967~1969년 해인총림에서 안거하면서 총림 유나를 역임했다. 1969~1984년(45~60세) 김천 수도암에 주석하면서 가람 중수와 선원을 복원하여 제방의 납자를 제접했다. 

1981년 중앙종회의장, 1982년 총무원장을 역임한 후 1983년 수도암에서 6년 결사 시작했다. 1984~1993년(60~69세) 해인총림 선원 수좌. 1986~1993년 해인사 주지. 1993~1996년(69~72세) 해인총림 부방장, 1996년 해인총림 제7대 방장, 2000년(76세) 원로회의 의장을 거쳐 2002년 조계종 제11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2003년 법문집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를 펴내고 2006년(82세) 해인사 제8대 방장으로 재추대되었으며 같은 해 대구 동구 진안동에 도림사를 창건했다. 2007년(83세) 조계종 제12대 종정으로 재추대됐다. 

2009년 자서전 <누구 없는가> 출간했으며 2014년 12월23일(음력 11월2일) 도림사 무심당(無心堂)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랍 73년, 세수 90세. 원적 후 스님이 머물던 해인사 퇴설당에서 스님이 쓰던 경상(經床) 서랍에 임종게가 남겨져 있었다. 

山色水聲演實相 

曼求東西西來意 

若人問我西來意 

巖前石女抱兒眠

“산빛과 물소리가 그대로 실상을 펼친 것인데/ 부질없이 사방으로 서래의를 구하려 하는 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서래의를 묻는 다면/ 바위 앞에 석녀가 이이를 안고 재운다 하리라.”  

  ▩ 수행일화       예불 안하면 “도둑놈”…팔순 넘어서도 108배 

“천제굴 주변에는 밭이 꽤 많았다. 그 밭을 다 갈고 세끼 밥을 짓고 청소와 빨래하며 노장님이 주무시는 방에 장작불을 땠다. 약을 달여 드리고 과일즙을 내드렸으며 노장님을 뵈러 사람이 오면 선별해서 만나도록 해드리고 고성 읍내까지 가서 장을 봐 오는 등 날마다 바빴다. 그렇게 약 3년 동안 노장님을 시봉하면서 살았는데 노장님은 하나같이 혼을 낼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둔하다, 네가 잘못했다’라는 꾸중을 들어보지 못 했으니 시봉을 제법 잘했던 모양이다.” 

“그때 노장님이 내게 하신 말씀은 화두를 제대로 들라는 것이었다. ‘공부를 제대로 이루기 전에는 공부라는 이름도 붙이지 못한데이. 적어도 하루 20시간 이상 화두가 한결같이 들려야 비로소 화두공부를 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하지 못했던 나는 오랜만에 안정을 되찾고 공부할 수 있었다. 나무하고 밭을 매고 장을 봐 나르면서 혼자서 살림을 맡아 하면서도 화두는 놓지 않았다.” 

법전스님이 회고하는 안정사 천제굴 시절이다. 

“부엌바닥에 깔개를 깔아놓고 스승과 단 둘이 공양을 했던 그 시절은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함께한 세월이었다. 나는 평생 스승을 부처님처럼 모시려고 노력했다. 곁에서 그림자처럼 시봉하면서 한 번도 다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노장님은 늘 ‘영원한 지리를 취해 일체를 희생하라’고 가르쳤다.” 

법전스님 제자들이 말하는 스승에 대한 추억이다. 

“맑고 검소하게, 청빈하게 살아라, 물질이나 욕망에 빠지지 말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오로지 수행을 통해 성불하려고 노력하는 삶이 수행자의 삶이다.” 법전스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제자들은 어떤 때는 객스님에게 글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제자의 글 읽는 소리를 주의깊이 챙겼다. 당신 방과 제자 방은 벽 하나 사이였다. 제자의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면 스님은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쳐서 제자를 일깨웠다. 

어느 때였다. 제자가 아침 도량석에 늦었다. 전날 온 제자와 얘기를 나누느라 늦잠을 잔 것이다.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예불도 안 하는 놈들, 이 도둑놈들!” 고함을 치는 것도 모자라 제자들의 등을 후려치고 발로 차고 했다. 당신은 성철스님의 말씀을 따라 팔순이 넘을 때도 아침예불 저녁예불 후에 꼭 108배를 했다. 제자를 훈계할 땐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장작을 쪼개어 재어놓을 때도 쌓인 모양이 사방이 반듯반듯 해야 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을 완벽주의자, 원칙주의자라고 한다. 

“안으로는 망념을 이겨내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밖으로는 남과 다투지 않는 덕을 펼쳐라(內勤剋念之功 外弘不諍之德).” 제자들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는데 사람이 걷지 않을 뿐이다. 행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 있으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행이라는 길을 꾸준히 걸어보라. 오래하다 보면 틀림없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 반드시 깨칠 수 있으며 깨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불교신문3329호/2017년9월13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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