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 기념관 건립 추진하는 선혜스님 인터뷰

선혜스님이 이명우 작가의 초상을 바라보고 있다.

파란 지붕이 인상적인 집 안으로 들어가니 너른 정원이 눈에 든다. 초입에 위치한 석불 너머 달마대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시선이 모두 한 곳을 향하고 있어 그 모습이 퍽 인상깊다. 잘 가꿔진 분재와 정갈한 모습의 돌탑이 즐비한 정원을 지나 나무 표지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향원(篆香園)’. 한때 낙신스님이라 불렸던 소공 이명우(1923~2005)의 집이다.

“(한국화 거장)의제 허백련 선생님이 직접 써 준 편액이에요.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거든요.” 지난 16일 달마도 대가 이명우 생가인 전북 부안 전향원에서 만난 선혜스님은 '소공 이명우 선화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혜스님은 이명우 작가의 큰 아들. 한국전쟁을 거치며 출가수행자로서의 삶을 내려놓은 이명우 작가를 스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 수행자 같은 삶을 사셨던 분”이라고 기억해냈다.

생가 초입에 있는 석불 너머 달마대사가 자리하고 있다.
남종화의 대가인 의제 허백련(1891~1977)이 직접 쓴 '전향원' 편백.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금강경>을 외는 소리에 자다가 깨곤 했어요. 새벽2시에 일어나 하루도 빠짐없이 독송을 하셨죠. 저녁에는 참선도 빼놓지 않으셨어요. 승복만 벗었지 꼭 수도승의 모습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에요.”

달마도 대가, 소공 이명우에겐 불교와 그림이 인생 전부였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한학자였던 아버지 아래서 자라며 한학과 불교에 자연스레 인연이 닿았던 그는 그 인연으로 17살 때 김제 금산사로 가 출가했다. 출가 이전부터 지녔던 ‘선’에 대한 끝없는 참구는 그를 보리달마에 빠르게 빠져들게 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일섭스님(1900~1975,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을 수시로 찾아가 달마도를 직접 사사할 수 있었던 것도 달마에 대한 그의 집념 때문이었다.

전국 제방선원에서 한암, 동산, 혜안, 일타스님 아래 12안거를 지냈을 정도로 정진에도 열심이었다. 해제 후에는 대부분이 떠난 절에 홀로 남아 그림을 그리곤 했다. 쓸 만한 물감이 없어 공양간 부뚜막에 가 남은 점정을 솜뭉치에 묻혀 쓰기도 했다. 수행정진, 그리고 달마도만이 그가 사는 이유였다. 그런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전란이었다.

선혜스님은 “한국전쟁으로 이 사찰 저 사찰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승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러나 불교에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던 분”이라고 했다.

구도에 대한 집념은 그림으로 이어졌다 새벽 예불을 올리고 나면 화선지에 달마를 그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그림으로는 안됐다. 정신을 담아야 했다. 때문에 면벽수행도 여러 번 했다. 선이 담긴 한 장을 위해 수십번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림의 가치를 안 사람들이 출재가를 막론하고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이명우는 선뜻 그림을 내줬다. 돈 한 푼 받지 않은 일이 허다했다. 그렇게 전국에 흩어진 선화만 수천 점. 선혜스님은 “대중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많다”며 “선의 정신이 살아있는 이명우 작가의 삶과 작품을 한 데 모아 그 가치를 알리는 일이 그래서 필요하다”고 했다.

선혜스님은 조만간 부안군에 ‘소공 이명우 선화 기념관’ 건립을 위한 조성 계획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계획서에 따르면 기념관은 부안 옥여동 2000평 부지에 세워지며, 달마도 등 선서화 700여 점이 들어설 계획이다. 기념관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에는 현재 30여 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다. 

선혜스님은 이와 함께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와 이명우 작가의 생가. '전향원'의 근대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할 예정이다. 선혜스님은 “아직까지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달마처럼 호방하게 사셨던 분, 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작품과도 같았던 분”이라며 “소공의 삶이 단지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 정신이 현재에 이어질 수 있도록 기념관 건립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이명우 작가는...

일본 오사카에서 ‘달마화 208태(態)전’을 필두로 대만 역사박물관에 초대 출품하는 등 국제 무대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1999년에는 재일한국문화원 개원 20주년 기념 초대전에 참석해 한국 선불교와 달마도를 선보였다. 1988년 전북불교회를 탄생시키는데도 일조했다. 전북불교회장을 맡아 전북불교회관 건립과 불교대학 운영에 힘을 보탰으며, 특히 전북불교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20여점 이상의 작품을 보시하기도 했다. 

소공 이명우 작가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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