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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1 (2017).9.2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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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줏돈 무게가 얼만지 알아요?"[우리스님] 부산 도원사 주지 만오스님
상좌 도원스님 말대로 “시줏돈 돈 쓰기 무서워 두부 한 모 사먹지 못하는” 만오스님은 팔순 나이에도 텃밭을 직접 가꾼다. 아래 작은 사진은 스님의 낡은 방 안에 걸려있는 액자. 스님은 이 발원문에 쓰여 있는 “초심으로 평생을 살겠습니다”를 매일 외운단다.

신장이 나빠 혈액 투석을 해야 하는 만오스님을 만난 곳은 병상이 아니었다. 부산 사상구 남서쪽 끝자락 엄궁동 아파트 단지 사이, 가파른 오르막길 중턱에 아슬아슬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사찰 도원사였다. 그 흔한 휴대폰 하나 없이 생활하는 스님의 거처답게 하나뿐인 낡은 요사채는 단출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를 만큼 오래된 책상, 제대로 갖춰진 다기 세트 대신 칠이 벗겨진 머그잔 하나가 세수 80세 노스님의 세간살이 전부였다. 

몸이 성치 않아 기도 드리는 일밖에 못한다는 만오스님은 3년 전 만성신부전 진단을 받았다. 장시간 동안 콩팥기능이 떨어져 악화되면 투석이나 신장이식까지도 받아야 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병이다. 여든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건장한 청년도 버티기 힘든 만성 질환들, 걱정이 돼 몸 상태를 묻자 스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농담부터 꺼냈다.

“어릴 때부터 심장병이 있어 몸이 좋지 않았어요. 병원에 가니 지난주에는 심장이 안 좋다고 하더니 이번주에는 신장이 나쁘대. 재미있지 않아요? 심장이랑 신장이란 발음 잘 해야 해요. 하하하.” 병이 하나 더해진 셈이지만 스님은 사춘기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말하기 부끄러워 사람들 안 만나려고 하는데 이래 자꾸 멀리서 찾아오니 남사스럽죠. 더 이상 말 안 할거에요.” 손사래를 치며 이야기를 마다하던 만오스님은 요즘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을 고사하느라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고 싶어 오래 전부터 장학재단 설립을 알아보다 여의치 않아 3년 전 불교 종립학교에 후원금을 전했고, 몰래 하려던 일이 학교 측 요청으로 매스컴을 타면서 그간의 보시행이 알려지게 됐다. 

사세가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사찰, 공양주도 없이 상좌 도원스님과 단 둘이 도원사에 기거하고 있는 만오스님이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지난 3년 동안 기부한 금액은 총 11억. 스님은 언제부터였는지 시작도 잊어버릴 만큼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외 빈곤 아동에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그간 지구촌공생회 등 NGO단체를 통해 아프리카 케냐 등에 학교 설립 비용으로 지원한 금액만도 수억원에 이른다. 

“사람들이 가난한 사찰에서 보시 많이 했다고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성철스님 살아계실 때 스님 법문을 내가 많이 들었거든요. 스님이 그랬잖아요. 시주돈 받기를 독화살 피하듯 하라고, 그래서 시주금이 무섭고 시주물 쓰는 게 어려워요. 무섭고 어려우니 안쓰고 모았다가 필요한 데 찾아주는 게 제 일이에요. 게다가 나는 몸도 아파서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그 시주돈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끔 해뒀다가 우리 절에 오는 신도들 복 많이 받게 해주십사, 행자 때와 같은 초심의 마음으로 살게 해주십사 기도만 드릴 뿐이에요.”

지금이야 가진 것이라곤 바랑 하나뿐인 출가 수행자이지만, 스님은 ‘부잣집 딸’로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하며 10대 사춘기 시절을 보냈을 만큼 불가와는 인연도 없었다. 이제 막 청춘을 꽃피우던 스무살 무렵, 쉽게 지치고 자주 피곤해하던 스님은 속가 어머니 손에 끌려 병원에 갔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심장에 이상이 있다고 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1950년대, 약도 병원도 어느 것 하나 충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날로 절에 들어가 7년을 살았다.

“사찰도 마을만큼 가난했던 때였어요. 돈보다 먹을 것이 중요했던 시절이라 쌀 가마니를 주고 절에 들어가 살았죠. 절에 가면 몸이 좀 괜찮아질까 싶어 들여 보냈던 건데, 스님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책도 읽다보니 몸이 좀 낫더라구요. 7년을 살고 밖에 나갔다가 ‘아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절에 들어갔지요.”

부처님 인연은 그때 맺었다. 울산 석남사로 가 당시 ‘비구니계 성철’로 불리던 인홍스님을 은사처럼 모셨다. 몸이 좋지 않아 행자생활은 많이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선방에 들어가 할 수 있는 공부는 죄다 했다. 건강이 나빠 포교, 복지에 대한 큰 꿈은 접었지만 작은 사찰이라도 하나 꾸려 기도라도 열심히 해보자 생각했단다. 이 지역 저 지역을 다니며 정착한 곳이 1981년 창건한 지금의 도원사다.

“엄궁동이 원래 참 가난했어요. 지금이야 고층 아파트 단지가 마구 들어서있지만 그때만 해도 사하촌에 800세대도 안 살았어요. 처참했죠. 그때부터 였던 것 같아요. 가진 게 많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배고파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뭐라도 생기면 저 사람들 먼저 도와주자 생각한거에요.”

그렇게 시작한 보시행은 종교, 국가, 인종에 분별이 없이 뻗어갔다. 개신교계 국제구호단체는 물론 아시아 대륙을 넘어 아프리카까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때마다 돈을 보냈다. 스님을 모시는 하나뿐인 상좌 도원스님이 “좋아하시는 두부 한 모 절 돈으로 사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런 스님을 보며 신도들은 닳은 문지방, 낡은 단청을 볼 때마다 “돈 좀 쓰시라” 잔소리를 늘어놨다.

“시주돈 무게가 얼만지 알아요?” “시주돈으로 받은 1000원 짜리 지폐 한장을 저울에 달면 그 무게가 얼마입니까?” 연이어 질문하는 스님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 무게가 어찌 달아 집니까. 보살님들이 1000원, 1만원을 보시하면서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아들딸들 시험에 붙게 해주세요’ 하지요? 그 기도 값을 어찌 계산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 값을 갚아낼 재간이 없어요. 그러니 시주금이 무섭지 않을 리 없지요.” 남에게 한없이 사무량심을 아낌없이 베푸는 만오스님이 자신에게만 유독 인색한 까닭이다. 

“단 한번도 내 삶을 후회해 본 적 없습니다. 이번 생에 아픈 몸 받았으니 다음 생에 조금 더 건강한 몸 받아 열심히 복 지을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것도 욕심이지요.”

낡고 오래돼 곰팡이가 핀 스님의 방에는 액자 하나가 걸려있다. “부지런히 기도 정진하겠습니다. 초심(행자)으로 평생을 살겠습니다. 시주돈을 어렵게 여기면서 적절하고 필요한 곳에 보살행을 하겠습니다.” 스님이 매일 외며 기도하는 발원문이란다.

“좋은 게 있으면 남 먼저 주고 낡은 게 있으면 내가 쓰면 됩니다. 세상에 어느 것 하나 부처님 것 아닌 게 없어요. 내 것이 아니니 꼭 필요한 곳, 인연되는 곳에 찾아줄 뿐입니다. 이번 생에 좋은 몸을 받지 못해 부처님 법 공부 많이 못했으니 다음 생에는 좋은 몸 받아서 많이 해야지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가 스님이라 생각 안합니다. 80세가 넘어도 여전히 행자이지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말처럼 모든 것을 잃은 후에 찾아온 인연 덕분일까. 노스님의 절개는 서릿발처럼 아직도 꿋꿋했다.

만오스님은...

만오스님은 명훈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6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1982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부산 용수사 주지를 역임했다.

2015년 동국대 관음장학회를 설립해 장학금 2억원을 기탁한 것을 시작으로 선센터 건립 기금, 장학금 등 동국대에만 총 11억원의 기금을 전달했다. “생색내는 것 같아” 싫다며 수차례 인터뷰를 거절한 끝에 지난 10일 부산 도원사에서 만난 만오스님은 이날도 “말을 많이 못해줘 미안하다”며 수줍게 웃었다. 

부산=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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