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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사자후] <23> 청우스님(1967년 11월12일자 ‘금주의 설법’)

 

‘육화’의 의무 실천해야 

승려권리 말할 수 있고

‘자비와 평등과 자유’는 

현재 ‘인간의 행복’이며 

미래 영혼 구제하는 길 

불교의 신앙대상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 있다. 인간 자신이 자기를 신앙할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만 불교는 그와는 반대다. 불교는 각자 자기 행위를 믿고 행위의 주인공인 자기 마음을 믿는 종교다. 불교의 교리는 ‘심즉불(心卽佛) 불즉심(佛卽心)’이다. 마음이 곧 현실과 미래의 진리를 내포한 신앙의 가치성을 가지고 있는 진리다. 

진리는 둘이 아니고 대자연 그대로 하나의 진리 자체가 스스로 자기인연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하나의 진리인 각자 자기마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 마음의 진리를 알기 위하여 선각자인 불보살을 신앙하는 여러 가지 불교의 신앙제도가 있는 것이다. 신앙은 대개 자기 자신을 어떤 대상에 의지함을 말한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나 공포에 부딪쳤을 때 무엇에 의지하고 호소하고 싶어 하는 것이 원시사회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신(神)에 의지하여 자기를 구제하고 미래의 자기 영혼을 구제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의 개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기를 구제하는 길이 오직 자기 행위로 얽혀진 업보(業報)를 자기 스스로 해탈하는데 있는 것이고 미래(내생)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도 현실(금생)의 자기 행위로부터 구제하는 것이다. 영혼을 구제한다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 영원한 마음의 본성이 인과에 얽혀 미래로 윤회하는 업(業)의 생명을 구제하는 뜻이다. 

이 업을 벗어나 마음의 본래자리 즉 불성(佛性)자리를 깨달아 각행(覺行)을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불교가 종교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 바로 영원한 미래관(내생의 윤회관)과 미래의 자기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현실의 행위를 바로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현실의 행을 중요시하여 육화행(六和行) ①신화동주(身和同住) ②구화무쟁(口和無諍) ③의화무위(意和無違) ④계화동준(戒和同遵) ⑤견화동해(見和同解) ⑥이화동균(利和同均)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승려는 곧 이 육화정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육화의 의무를 실천하여야 승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 육화행을 바로 실천하는 데에 자비와 평등과 자유가 있는 것이다. 자비와 평등과 자유는 현실적인 인간의 행복이 될 뿐 아니라 미래의 자기영혼을 구제하는 길이다. 이 육화를 실천하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의 뜻이고 곧 각행인 것이다. 

첫째 신화동주는 몸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대중이나 사회생활을 같이하며 같이 머무는 대중생활에서 특별나게 괴각을 부리지 말고 남과 같이 평등한 생활을 하여 서로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구화무쟁은 입으로 평화롭게 하는 것이다. 망어기어 양설 악구 등으로 남과 다투지 않고 서로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 의화무위는 뜻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탐·진·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뜻을 수순하여 평화롭게 하는 것이다. <화엄경> 보현보살 행원품에 “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有想無想非有想非無想) 유족(有足) 무족태(無足胎), 생(生), 화생(火生), 습생(濕生) 등 십육류생(十六類生) 원(願)에 수순(隨順)하되 여경부모(如敬父母) 여봉사장(如奉師長)하며 내지 아라한과 여래(如來)와 무등유위(無等有爲)”라 하여 차별함이 없이 일체 중생의 원에 수순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수순하면 아상(我相), 중생상(衆生相)이 다 끊어져 일체 업상(業相)을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계화동춘은 서로 범해서는 안된다는 모든 계율이나 사회의 법률을 같이 지킴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섯째 견화동해는 모든 사물의 견해를 같이하여 대중이나 사회의 화목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시비는 서로 견해 차이로 일어나는 것이다. 

여섯째 이화동균는 대중생활에 있어 이익을 고루 나누어 서로 도와주는 이로서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육화행이 불교의 현실적인 가치성이며 이 육화행을 실천하여야 성불할 수 있는 것이고 성불하면 곧 이 육화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육화행 그대로가 곧 불법이다. 

불교는 현실 이외에 즉 미래의 목적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연속되는 그 시점의 현실을 바로 살아가는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래의 현실을 위해 오늘의 현실을 바로 살아가는 것이다. 

청우스님은 일제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함을 절감했다. 평남 평성 안국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에는 농민과 빈민의 자녀들을 위해 야학(夜學)을 개설했다. 또한 매주 두 차례 설교회(說敎會)를 열어 주민들에게 불교 가르침을 전하고 민족 현실 등에 눈을 뜨도록 계몽(啓蒙) 활동을 폈다. 이와함께 가난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부업과 저축을 장려하고 농촌소비조합을 결성하는 등 시대를 앞선 선구자의 역할을 다했다. 사진은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 1967년 11월12일자(222호) 2면에 실린 청우스님의 ‘금주의 설법’.

■ 청우(聽雨)스님은… 

1912년 8월25일 평남 성천군에서 태어나 1923년 순창 구암사에서 박한영이란 속명으로 더 유명한 석전 정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28년 평남 성천 동명학교를 거쳐 1931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을 수료하고 1932년 안변 석왕사 불교전수강원, 1934년 개운사 대원불교전문강원을 졸업했다. 1934년 봉은사에서 보련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35년 평남 평성 안국사 주지로 있으면서 야학(夜學)을 개설했다. 1936년 1월16일자 <조선일보>에는 ‘사원(寺院)을 교실 삼아 무산아(無産兒) 교육 진력, 안국사 주지 양경수 씨 열정’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양경수(楊景洙)는 스님의 속명으로, 당시 법명과 함께 사용했다. 기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배움에 굶주린 어린이들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사재를 희생하여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르치는 스님이 있다. 그는 현재 평남 순천군 사인면에 있는 안국사의 주지 양경수(楊景洙)씨로 … 무산아동의 문맹을 불쌍히 여겨 우선 야학을 개최하고 수십 명의 청소년에게 한글 산술 등 필요한 몇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 그는 넉넉지 못한 불전을 털어 학용품의 일체와 기타 비품대 등을 독담(獨擔, 홀로 부담)하여 가면서 ‘배워야 산다’란 슬로건 밑에서 열심 지도하고 있음으로 … 그의 장거와 투지에는 누구나 감사히 생각한다고 한다.”

평양 영명사,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 유점사, 안변 석왕사, 장성 백양사에서 참선 수행했고 1944년 석전스님에게 전법게를 받고 법맥을 계승했다. 석전스님이 전한 전법게의 한글 번역은 이렇다. “푸르른 버들가지 늘어진 제방도, 봄비 소리는 막지 못하네, 선심(禪心)은 별달리 말이 필요 없거니 앉아서 참 나를 만나면 될 뿐.” ‘빗소리를 듣다’는 뜻의 청우(聽雨)라는 법명을 지은 스님도 당시 석학이었던 석전 정호스님이다. 

1945년에는 한암스님에게 보광(寶光)이라는 호를 받았다. 해방 후에는 동산, 청담, 금오, 지월스님과 정화불사에 참여했다. 당시 제3교구본사 건봉사 주지를 맡아 탄허스님과 오대산 수도원과 상원사 봉찬회를 결성했으며 총무원 총무부장, 대한불교신문사(현 불교신문) 편집위원장, 중앙종회의원, 제22교구본사 대흥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1971년 10월3일(음력 8월15일) 해남 대흥사 동국선원에서 법랍 49세, 세수 60세로 원적에 들었다.

[불교신문3312호/2017년7월8일자]

 

정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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