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시절 덕림 선사 주축해 중건

17세기 대표하는 거대 불상들 봉안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꺼운 옷

당당한 불상 양식 걸맞는 표현 기법  

완주 송광사 대웅전의 석가여래삼불상, 1641년에 조성됐다.

대학원 때 지도 교수 심부름으로 송광사에 가야할 일이 생겼다. ‘전주 송광사’에 다녀오라는 말씀에 송광사는 ‘순천’에 있는데 왜 전주 송광사라고 할까 잠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송광사’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대학원 시절 필자처럼 승보 사찰로 유명한 ‘순천 송광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조선시대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불상이 있는 곳은 ‘완주 송광사’ 다. 전라북도 완주 지역은 전주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완주 송광사’를 ‘전주 송광사’라고도 부른다.

완주 송광사는 다른 어떤 절에서도 볼 수 없는 십자형 누각으로 된 범종루(梵鐘樓)를 가진 유일한 사찰이며,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 등의 왜란(倭亂)과,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 등의 호란(胡亂)을 거친 후 재건되었다는 시대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이같은 배경 속에서 현재의 완주 송광사는 새로운 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비슷한 가람 배치를 갖고 있는 곳으로는 보은 법주사,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하동 쌍계사 등이 있다. 이 사찰들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대대적인 불사를 시작했는데 새롭게 불전을 신축하거나 불상을 조성하는데 벽암각성(1575~1660) 스님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일주문을 지나 도착한 천왕문에는 거대하고 험상궂은 모습을 한 사천왕이, 만약 사찰을 훼손하려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우뚝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암각성 스님과 관련된 사찰의 새롭게 건립된 불전 안에는 17세기를 대표하는 거대한 불상들이 봉안되었다는 또 다른 공통점도 갖고 있다. 완주 송광사의 천왕문에는 진흙으로 조성한 거대한 사천왕상이 사찰을 수호하고 있으며,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조선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565cm의 석가여래상이 중앙이 있고, 그 좌우로 약 530cm의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17세기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 신음하던 당시 조선인들은 무엇으로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을까. 완주 송광사는 전쟁이라는 가장 처참한 상황을 겪고 난 후 새로운 희망으로 새시대를 열고자 했던 17세기 조선인들의 염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천왕문에는 다시는 어떤 세력도 조선을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으며 사찰을 훼손하려는 자가 있다면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염원을 한 사천왕이 있다. 명부전에는 전쟁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十王)들이 있다. 대웅전에는 어찌되었든 지금 살고 있는 현재가 바로 정토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중생들의 병고를 치유해 주는 약사여래와 사후 극락으로 인도해주며 그곳에서 설법하는 아미타여래가 좌우 보처로 모셔져 있다. 이 세 분의 부처님을 삼세불 또는 석가여래삼불상이라고 부른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송광사는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말사로, 종남산 동남록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송광사는 일찍이 백제불교의 시작과 더불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말에는 보조체징(804~880) 스님이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선법(禪法)의 요체를 구하러 중국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송광사는 사세를 면면히 이어오다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중국 송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자, 절 이름을 백련사로 다시 고치고 천태종에 귀속시켰다고 전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송광사는 완전히 불타 버렸는데, 광해군 때인 1622년에 덕림 선사가 주축이 되어 여러 스님의 참여로 중건했다. 이 때 송광사의 모습은 1636년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에 잘 표현되어 있다. “백리 밖 기름진 들판을 빙 두른 전각은 크고 높고 곁채는 길게 뻗었다. 문과 전각은 크고도 깊다. 층층이 높은 건물을 드러내고 담을 둘러 싸니 높은 것은 하늘과 만나고, 내려 보면 냇물에 담긴다. 우뚝 솟아 흐르는 산줄기는 웅장하고 심원하다. 건물은 넓고 아름다워 한 나라의 으뜸이었다.”  

벽암각성 진영, 해인사 국일암 소장.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송광사의 사세가 기울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857년에 이르러서는 17세기에 완성한 화려하고 웅장했던 2층의 대웅전은 현재처럼 단층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창건 당시의 2층으로 된 불전의 모습은 부여 무량사의 극락보전이나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송광사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면 대부분의 참배객들은 여러 번에 걸쳐 놀라게 된다. 첫째는 세 분의 부처님 크기에 놀라고, 둘째는 불상 크기에 비해 법당 안이 너무 비좁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세 번째는 고색 찬란한 불단 위에 놓인 나무로 만든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2미터가 넘는 삼전패(三殿牌)의 크기에 놀란다.

1993년 대웅전의 불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후령통을 비롯한 복장 유물과 불상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 삼불좌상은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삼존불상(540cm)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65c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 양식에 걸맞는 표현 기법을 보여준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에서는 세 불상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석가여래삼불상은 불상 조성 발원문에서 알 수 있듯이 1638년에 시작해 1641년에 완성되었다. 발원한 지 4년만에 완성된 셈이어서 불사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조 5년인 1641년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 극복 의지와 역사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송광사 석가여래삼불상을 조성한 수조각승은 청헌(1626~1643)스님이다. 그는 1626년 법주사 비로자나삼불상 조성에 조각승 현진과 함께 2위로 참여한 이후, 1636년 구례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상을 비롯해 1639년 하동 쌍계사 불상, 1639년 고흥 능가사 석가여래삼불상, 1641년 완주 송광사 석가여래삼불상, 1643년 진주 응석사 석가여래삼불상 조성에 수조각승으로 참여했다. 그는 승일 및 법령과 함께 일군의 조각승을 이끌고 있었는데, 17세기 대형의 소조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으로 주목된다.

송광사 석가여래삼불과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은 벽암각성 스님이다. 그는 광해군 때 선교도총섭을 역임했는데 호서와 호남의 주요 사찰, 즉 완주 송광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보은 법주사 등 대규모 불전을 중건하거나 불상을 조성했다. 이를 통해 교단 내의 그의 위상과 정치적 영향력 및 왕실이나 국가의 후원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화엄사에서 승군 3천명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하는 등 승군의 군사적 전통을 이어갔다. 

그는 광해군 때 부휴선수와 함께 무고로 투옥되었지만 인품을 인정받아 사제가 각각 ‘대불(大佛)’과 ‘소불(小佛)’로 칭해졌고, 광해군으로부터 가사를 하사받았다. 이후 광해군의 요청으로 경기도 광주 청계사 법회에서 설법했고, 훗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과 화엄의 종요(宗要)를 문답한 뒤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소조 석가여래삼불상 조성기에 세자와 봉림대군이 속히 청나라에서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은 용주 조경(1586~1669)의 <용주일기>를 통해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일기 가운데 ‘정묘일기(1627년 1월 16일~3월 17일)’에 의하면 정묘호란 때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와 분조를 설치했기 때문에 이때 완주 송광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조선시대 불상은 당시 시대 상황이 잘 담겨있기 때문에 신앙대상이면서도 귀중한 역사자료라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불교신문3297호/2017년5월17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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