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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용성진종조사] <14>마음의 그림자② 
  •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 승인 2017.04.1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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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구나…! 

저것이 환영이다. 

대상적 허망경계다. 

만일 저것을 

사실이라고 믿으면 

돈오(頓悟)의 문에 

들어설 수 없다. 

자연이 나타낸 그림자든 

마음이 나타낸 그림자든 

저런 그림자를 끊어 버렸을 때 

비로소 텅 빈 것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노스님, 

혹 무융대사님을 

아십니까?” 

장가 못가고 죽은 총각은 몽달귀신이 된다. 시집 못간 처녀가 죽으면 ‘손각시’가 된다지. 죽림촌 상규와 사주단자가 오고가 천생 연분 돌쩌귀상이라 하여 혼인 날짜까지 정해졌는데, 총각이 증발해버렸다. 조대감집에서는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일이 이리되니 소문이 앞장섰다. 방물을 팔러온 방물장수가 마루에 방물을 펼쳐놓고 사라진 사실이 소문 한 가운데에서 쑥덕쑥덕 온갖 험담이 만들어졌다. 한입 건너고 두입 건너더니 억측이 생겨났다. 방물장수를 본 사람이 있기나 한 듯 허우대가 허여멀쑥해 누가 보아도 방물장수 상판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겉보기와는 달리 멋들어진 한량이었다는 것, 그래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공중에서 춤을 춘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문이 얌전한 강아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조대감 딸이 그 한량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딴 사람과 혼인날짜가 정해지자 해코지하려고 방물장수로 변장해 찾아왔다는 것, 와서 보니 조대감집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 도망쳤다는 것이다. 딸의 부정한 행실을 까맣게 모른 조대감은 혼사가 깨지자, 풍양 조씨는 양반이니 다른 혼처에서 더 좋은 신랑을 구하려 한다는 소문이 담장을 넘고 울타리를 넘어 다녔다. 떡을 돌리라면 덜 돌리고 소문을 돌리라면 더 돌리듯 돈 들어가는 일이 아니니 너도나도 찧고 까불어댔다.

“자식은 겉 낳제 속은 못 낳는 당께.”

생긴 것은 약방 기생 볼 줴지르게 생겼는데, 경주 돌이면 다 옥석이냐?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일찌감치 훤칠한 한량과 정을 통해 이미 깨진 밥사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대감집 규수 은엽은 영문도 모르는 사이 혼사가 깨지자 천산갑이 지은 죄로 무덤 옆 나무가 벼락 맞는 꼴이었다.

“세 사람이 입을 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더니….”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뒤에야 대감마님이 낌새를 채고 역정을 냈다. 은엽이라고 그런 소문을 모를 리 없었다. 소문 퍼뜨린 사람을 당장 찾아내 망가진 혼사 물어내라고 송사라도 붙이고 싶었지만 소리 난 방귀는 냄새가 없다.

“엄마, 냅둬요, 입 아프면 자자들겠죠.”

“이것아, 그럼 맷돌짝 지고 산으로 갈래?”

시집을 못 가게 생긴 딸이 안타까워 한 말이었다.

“엄마, 팔자는 길들이는 대로 가.”

“장차 뭣이 되려고 오장육부가 다 빠져버렸냐?”

“밥은 치면 떡이 돼, 베개만 높이 벤다고 높아지겠어?”

“얘가 누굴 닮아 통아지가 이리 물황태술꼬?”

그런데 은엽의 입에서 독 안에 들어가도 도망 못 친다는 팔자도망을 치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 이참에 집을 떠나 있으려고 해.”

뜬소문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러겠냐싶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다냐?”

“경성 삼촌 집에 가있으려고….”

“장통방 동희삼촌 말이냐?”

동희는 조동희를 말했다. 이조판서를 지낸 조성하의 사촌으로 장통방에서 살았다. 벼슬은 안했지만 조대비의 연줄로 왕실에서도 얕잡아 본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 조대감과 아주 가까운 종친인데다 왕래가 잦았고, 일찍 개화사상에 눈뜬 올곧은 선비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시집도 안 간 규수가 삼촌댁에서 뭘 어쩌려고?”

“시집 안 갔으니 가려고 그래. 엄마는 헛소문이 그리도 좋아?”

귀속에 딱지가 앉을 만큼 소문에 시달려온 은엽의 뜻이 조대감에게 전해졌다.

“경성 삼촌집으로 간다 했느냐?”

“네, 공부 좀 하려고요.”

“기집애가 공부는 해서 뭘 어떻겠다는 게냐?”

“신학문을 배워보려고요.”

조대감도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어서 장통방 동희에게 연락해 은엽을 경성으로 보냈다.

은엽이 장통방으로 올라온 그 해 여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자주국방이 무엇인지도 모른 자들은 외국의 신식무기만 들여와 배치하면 국방이 절로 되는 줄 안다. 이런 빌어먹을…! 조일수호조약으로 개화, 수구 대립이 날카롭던 때, 부국강병책을 쓴다고 기존 5위령을 무위, 장어 2영으로 축소, 별기군을 창설했다. 별기군 교관은 일본군 소위인 호리모토 레이조, 통역은 쓰시마에서 건너온 부산 초량어학원생 다케다 진타로였다.

별기군은 급료와 피복 등 각종 군수물자가 풍성풍성한데, 구식군대 무위영과 장어영은 1년 동안 급료도 주지 않았다. 구식군대의 불만이 폭발하려던 찰나 쌀로 한 달 치 급료를 지급했다. 군수보급창(宣惠廳) 관료들이 가마니에 대롱을 박아 쌀을 다 빼가고 모자란 분량을 모래로 채워 넣어 그것도 형편없이 됫수가 모자란 양을 지급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나, 민씨 일파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되었다. 국가안보에 철학이 개똥만큼도 없는 자들은 외국무기는 무조건 좋다는 것, 외국군대는 무조건 강하다는 것, 그것이 백성들을 기름 짜듯 세금을 짜내 강대국에다 바친 사대에서 친일로 이어졌다. 

진종은 아침을 먹고 요사채 옆으로 올라갔다. 초막에서 대여섯 걸음 나아가면 대단히 큰 소나무가 있고, 소나무 아래에서 내려다보면 시야가 확 트여 펼쳐진다. 날씨 맑은 날은 강화도, 강화만, 인천, 해주, 연평도, 서해바다까지 선명히 내려다보인다. 

그날은 산자락 밑에 운해가 덮여 있었다. 바다에까지 안개가 하얗게 펼쳐져 도솔암이 하늘 위에 떠있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밝은 해가 떠올랐다. 햇살이 안개바다를 꿈속처럼 비추었다. 고령산도 이런 비경을 연출해 내는구나. 한데 안개의 장막 위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아닌 진종 자신의 그림자가 안개바다 끝까지 이르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림자 주변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안쪽은 푸른색, 바깥쪽은 붉은색 띠가 드리워져 아름답다기보다는 신기했다.

신비롭구나…! 저것이 환영이다. 대상적 허망경계다. 자연은 그런 원리(遠離)적 그림자까지 나타내는 아름다움을 펼쳐 보였다. 만일 저것을 사실이라고 믿으면 돈오(頓悟)의 문에 들어설 수 없다. 자연이 나타낸 그림자든, 마음이 나타낸 그림자든 저런 그림자를 끊어 버렸을 때 비로소 텅 빈 것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진종은 천천히 요사채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삼성각 옆에 놓인 작은 평상에 행화고령으로 이름 붙여놓은 노승이 하염없는 얼굴로 전나무 사이에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승을 보니 문득 무융대사 이름이 떠올랐다. 

“노스님, 혹 무융대사님을 아십니까?”

무융대사도 이와 같은 시차적 경계와 맞닥뜨리면 저 노스님처럼 하염없는 시선으로 시간을 바라보지 않을까.

“무융대사를 왜 묻나?”

“공공혜(空空慧)에 이르신 분이라고 들은 적이 있어서요.”

노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산 표훈사에 계시느니라.”

표훈사…, 한 번 찾아가 뵈라는 혜월화상 말씀이 생각났다. 표훈사는 금강산에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승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암! 아미타부처님과 그만큼 장난을 쳤으니….”

말끝을 흐렸다.

“장난을 치다니요?”

솔직히 까놓자면 도솔암에서는 수행이랄 것이 없었다. 아미타부처님만 보면 장나꾸러기 아이를 보는 것 같았고, 스스로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보니 친근한 아미타불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마음이 편했다.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자고, 아미타부처님 손을 쥐기도 하고 매만지기도 했다.

“경외만 하는 것이 부처가 아니니라.”

“억?!”

노승의 말에 진종은 갑자기 통 밑동이 퐁 빠져버린 것 같았다. 뭐랄까, 허망한 것도 같고, 몸뚱이가 없어져 버린 것도 같았다. 하나 마당 앞에 살구나무는 살구나무로 보이지 않았다.

“아미타부처님과 가깝게 지내더니 네 눈이 밝아져 거리낄 것이 없어 보이나, 이제야 무거운 저울추를 달고 한계점으로 다가갈 때가 이른 것 같구나. 그만하면 무융대사를 찾아뵈어도 되겠다.”

노승이 속을 훤히 들여다보듯 했다.

“감사합니다.”

진종은 그 자리에 엎드려 삼배를 올렸다. 

진종은 밑구멍이 퐁 빠진 통이 되어 도솔암을 나섰다. 더러 나무꾼을 따라 밤 호랑이를 피해 양주에서 금화를 거쳐 단발령에 이르렀다. 단발령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산, 이곳이 정녕 천상인가 지상인가. 단숨에 내리 뛰듯 단발령을 내려와 내금강 물을 건너고 산굽이를 도는데, 비로소 불국토에 이른 것 같았다.

표훈사에 이르니 만폭동에서 흘러온 거울 같은 물이 하얀 바윗돌을 어루만지며 소곤거리는 시내 위 나무다리를 건너니 능파루가 앞을 막았다. 진종은 능파루 누하통로 계단을 올라가 반야보전으로 들어갔다. 일단 가야산 진종이 금강산 범종을 울리러 왔노라고 표훈사 부처님께 삼배를 올려 신고를 했다.  

공동기획 : 용성진종장학재단(총재 도문)   

불교신문3292호/2017년4월22일자] 

글 신지견 그림 배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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