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을 광명으로 이끌 자는 사부대중”

 

곡우절 못자리 안 챙기면 

그 해 농사 실패로 돌아가 

가족 모두 굶주리게 되듯 

모름지기 수도인 인생에 

경유하지 않고는 아니 될 

강령은 ‘계정혜’ 삼학이니 

늘 생각을 한 곳에 모아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순일하게 습성화 된다면 

무심코 옮겨놓은 발길조차

털끝만치도 탈선하는 않는

‘안심입명처’에 이르리…  

향봉스님은 후학들에게 “대중이 스승이니, ‘독(獨)살이’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서울 법련사에서 선 향봉스님. 출처=‘운수산고’

역대고금을 통하여 모두가 일생을 두고 성(誠)과 열(熱)을 다해가면서 기르는 원각산중(圓覺山中)에는 한 그루의 보리수가 있다. 그 꽃을 보고 열매를 거두려는데 자라나는 가지와 돋아 오르는 싹이 있다. 그것은 그대로 두고 우선 살펴야 할 근본, 그 선후본말 쯤은 그 누군들 잊었을까마는 이왕 이 자리를 같이 한 산승이 다시금 달리는 말에 채찍을 드는 격으로 일단 경책을 가하는 바이다. 

인생의 한 시절에 각기 지니고 있는 좋은 밭을 무시로 돌보아 매 가꾸는 농사와 무량 아승지겁(阿僧祗劫)을 두고 수용할 자료, 그리고 저 미진수세계(微塵數世界) 육도중생을 모두 다 구제하려는 양식, 그것을 준비하는 농사, 이는 폐할 수 없는 중생의 본업이다. 

그런데 첫째로 잊어서는 안 되는 조건은 인생의 일생을 초중말(初中末) 3기(期)로 나눈다면 초중년기에 힘차게 정진할 그 시기를 놓쳐서는 아니 되겠다. 그럼에도 현하(現下)의 손쉬운 예를 들면 어떤 농부가 많은 평수의 영농가로서 가장 긴요한 못자리를 삼월 곡우절에 완전히 준비해 놓아야 할 것인데 그 시기를 허송하고 보면 그 해 농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가족은 굶주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因)을 지어 과(果)를 받는 것이 만고불변의 원리인데도 그를 의심한다면 마치 추수를 바라는 농부가 봄철에 반드시 뿌려야할 종자를 흙에다 묻으면 썩어 없어 공연한 손해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둘째로는 수도인의 일과조건인 이른 새벽 기침시간으로부터 밤 깊은 취침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 장년기의 미정된 산란에서 오는 일체동념을 능히 제어하는 세 갈래 길 ‘참선(參禪), 염불(念佛), 간경(看經)’의 철옹성이 어느 한 구석 소홀한 틈이 생기게 되면 마권속들의 벌떼 같은 빈번한 출입으로 결국은 주객이 전도되리라. 그리하여 주인공은 힘을 잃게 되고 적반하장 격으로 객진(客塵)번뇌의 힘을 얻은 마군중의 수효는 실로 팔만사천에 달한다고 하시는 세존의 말씀, 간에라도 새겨야 할 일이다. 

지향하고 가는 여래지(如來地)의 경내에 아직 들어서지도 못한 범부로서 어찌하여 금구성언(金口聖言)을 심상히 들어 치워버릴 것인가. 한 말로 해서 인생 백년이 잠깐이거늘 그 순간에 반드시 경유하지 않고는 아니 될 최대강령인 계(戒)·정(定)·혜(慧) 삼학 그것이 위에 말한 정진도중의 철칙격인 순서다. 여기에서 한 토막의 짜임새가 흩어지게 되면 발길은 허튼 길로 방황하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수도인은 생각을 한 곳에 모아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 순일한 정도로 습성화 하게 되면 그 때에는 무심코 옮겨놓은 발길이지만 털끝만치라도 궤도에서 탈선되는 위험성이 없는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이리라. 

이 경지에 이른 발길이야 말로 걸음걸음이 삼계화택을 초월(步步超三界)한 대장부의 활달한 걸음인 것이다. 그 앞에 무슨 공포가 있으며 어떠한 전도몽상이 있으랴. 

오늘 이 자리를 같이 한 사부대중은 동시대의 불자며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함께 맛보고 살아가는 형제자매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일깨워주고 서로 돌보아 주면서 저 열반피안에 이르기까지는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그 길거리에서 만일 이탈하는 정신이상 환자가 생긴다고 하면 그는 곧 운무(雲霧) 중의 암흑세계에서 미혹 방황하여 생부지래처(生不知來處)며 사부지거처(死不知去處)며 그대로 삼악도의 테두리를 못 벗어나리라. 

이 문 밖의 길거리를 나서 보라. 다름 아닌 위에 말한 인생의 진경과는 달리 오가는 여러 외치는 소리뿐이리라. 물질이면 그만이라고 세간무명학의 가두에서 판정하는 뭇소리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들어서 사람의 귀중한 진리의 세계로 지향하는 길을 막는 것이다. 

이 세계의 무명을 벗겨 중생을 광명의 길로 이끌자 그 누구인가. 또한 확철대오의 진리의 길을 터줄자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이 어려운 사명을 지난 자가 바로 사부대중 여러분이다. 여러분이야말로 중생제행의 제일선에 선 교역자다. 스스로의 수도에 전념하면서 제행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물질이 곧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려는 이 위험한 순간을 극복하는 데 우리는 과감해야 할 것이다.  

■ 향봉스님은…

1901년 5월16일 전남 보성군 축내리에서 부친 임준구(任準球)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임보극(任普極). 일찍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했고,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지만, 세속의 명예와 이익이 무상함을 체득하고 출가했다. 출가 전에 이미 ‘송운(松韻) 거사’로 불리며 독실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향봉스님은 1940년 4월15일 조계산 송광사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향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42년 3월15일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東山)스님에게 보살계와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참선에 몰두했다.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3하안거를 성만했으며, 덕숭산 수덕사 만공(滿空)스님 문하에서 2하안거를 마쳤다. 이어 오대산 상원사 선원 한암(漢岩)스님 회상에서 3년간 정진하는 등 수행자 본연의 자리를 지켰다. 이후 스님은 금정산 동래 금정선원을 비롯해 도봉산 망월사와 충무 용화사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의 공부를 이끌었다.

1954년 정화불사가 시작되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스님은 상주 남장사 주지를 15일간 한차례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소임을 사양했다. 정화불사 직후 지리산 화엄사 주지로 임명됐지만 끝내 맡지 않았다. 1954년 강원도 명주군(지금은 강릉시) 연곡면 만월산 백운동 옛 절터에 세운 백운사(白雲寺)에서 20여 년간 주석했다. 1977년 가벼운 질환을 보이자, 구산스님의 청으로 30여 년 만에 송광사로 돌아와 임경당(臨鏡堂)에 머물렀다. 스님은 1983년 4월19일(음력) 서울 법련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랍 44세, 세수 83세. 4월23일 송광사에서 조계총림장으로 영결식을 봉행하고, 부도는 조계산과 만월산에, 비는 송광사에 모셨다.

[불교신문3292호/2017년4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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