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주자 1258명 동참…당대 최고불사 상징

 

1650년 금산사 대장전 ‘불상’

응매스님이 남긴 유일한 작품

나무로 윤곽, 진흙을 발라 완성 

목불 소조불 결합 ‘목심소조불’ 

2011년 보물 제1718호 지정돼

‘해동 대한민국의 절’인 군산 동국사의 석가여래삼존불상.

전북 익산과 김제 그리고 금강을 경계로 충남 서천과 인접한 군산은 개항장으로 근대도시 흔적이 많은데,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들어와 있던 일본 조동종 사찰이었던 금강사(錦江寺)가 일본풍 그대로인 채 동국사(東國寺)가 되어 현존하고 있다. 

일본식 법당인 대웅전은 200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법당 안에는 1650년에 김제 금산사 대장전(大藏殿)에 봉안되었던 석가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전은 1913년에 지은 일본식 건물이고 부처님상은 1650년에 조성한 조선시대 부처님인 것이다. 

1899년에 군산이 개항장이 되자 개항과 동시에 일본 조동종은 군산에 들어왔고 1909년에 우치다 붓깐(內田佛觀)이 개인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한 이후, 1913년 7월에 현재 동국사 자리로 옮겨 본당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국사 대웅전이다. 

해방 이후 일본 불교가 남기고 간 사찰은 대부분 미군정 시기와 이승만 정권을 거치며 국가에 귀속되거나 기독교가 차지했다. 다행스럽게도 군산의 조동종 금강사는 1945년 해방 이후 국가에 이관되었다 1955년 전북불교종무원에서 매입했고, 1970년 남곡스님(1913~1983)이 ‘해동대한민국’의 준말로 ‘동국사’로 사찰명을 바꾸고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에 증여했다고 전한다. 

2012년 3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는 동국사 석가여래삼존상 불복장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었다. 필자도 그때 한국연구재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연구소 팀원들과 함께 조사차 방문했으며 동국사 주지 스님인 종걸스님으로부터 많은 자료를 제공받았다. 당시 전시를 주관했던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의 담당자 역시 조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두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동국사 석가여래삼존상의 좌우 협시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며 석가여래상의 크기는 147cm, 가섭존자상은 159.5cm, 아난존자상은 160cm이다. 발견된 많은 양의 복장물 가운데 주목할만한 것은 후령통과 경전으로 복장을 한 후 빈 공간이 없도록 틈새를 채웠던 한지가 다량으로 발견된 점이다.

특히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석가여래 복장에서 발견된 시주자 명단을 기록한 시주질(施主秩) 1점과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에서 발견된 불상조성기 2점이었다. 석가여래상 시주질의 크기는 높이가 32.8cm이며 길이가 무려 290cm이다. 출가수행자 382명과 재가신자 855명 등 총 1237명의 시주자 정보가 질서정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의 발원문에 기록된 소임자와 조각승까지 포함하면 최소 1258명이 동국사 석가여래삼존상 조성에 동참하고 있어, 조선시대 불상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국사 가섭존자상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

가섭존자상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원컨대 이 공덕이 모든 중생에게 퍼져 우리를 비롯한 중생이 모두 성불하기를 바랍니다. 순치 7년(1650년) 6월에 불상을 만들기 시작해 9월 2일에 완성해 금산사에 불상을 봉안합니다. 불사 증명으로 호연당 태호스님과 벽봉(벽암)당 각성스님을 모셨으며 불상을 조성한 분들은 응매·성률·노원·사준·뇌인 스님들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분들과 시주물들을 기록하려고 했을까. “일이 끝났으니 이를 기록해서 보는 자들로 하여금 누가 불사의 비용을 모집했고, 누가 보시를 했으며, 증명한 분은 누구이고, 화사(師)는 누구이며, 몇 년 몇 월에 시작을 하고 일을 마쳤으며, 베풀고 교화한 것과 찬탄하고 헐뜯는 인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믿는 자는 더욱 믿게 하고 믿지 않는 자는 믿음을 내게 한다면, 이것도 하나의 교화 사업이 될 것이다.” 미륵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불화로 그리고 나서 순천 용문사 스님이 무용 수연(1651~1719)한테 글을 부탁하자 써 준 글이다. 불상이나 불화 또는 불전을 건립이 끝나면 왜 기록을 남기는지 잘 담겨있다.

2011년 9월에 보물 제1718호로 지정된 동국사 석가여래삼존상은 좌우로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수행을 가장 잘한 두타(頭陀)제일의 가섭존자와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다문(多聞)제일 아난존자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여래는 큰 영웅이기 때문에 대웅전(大雄殿)에 모셔지거나 많은 제자인 나한들과 함께 나한전이나 영산전에 봉안된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 좌우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 또는 사후 극락으로 인도하는 아미타여래,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와 함께 봉안된다. 16나한·18나한·500나한 등 제자들과 봉안될 때는 과거불을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래불을 상징하는 미륵보살 또는 10대 제자 가운데 두 분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좌우로 거느린다. 

동국사 대웅전 석가여래삼존상은 가장 후자의 경우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거느리고 있다. 연화 위에 앉은 석가여래는 근엄한 모습으로 성도 순간을 상징하는 오른손을 뻗어 지신(地神)을 부르는 항마촉지인을 한 채 중생들을 지긋이 바로보고 있다. 나이 든 수행자 모습의 가섭존자는 인도식 복장을 하고 오른손을 왼쪽으로 들어 좌우 검지를 맞댄 채 이빨을 드러내고 환희 웃고 있다. 

가섭존자는 항상 웃음 가득 띤 나이든 수행자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 설법장에서 연꽃을 들어 여러 제자들에게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알아듣는 자가 없었는데 가섭존자만이 그뜻을 알고 미소를 지은 사건, 염화미소(拈花微笑)를 상징한 것이다. 두 손을 들어 손가락을 구부린 모습은 영축산에서 석가여래께서 연꽃을 든 이유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석가여래의 법이 가섭존자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둘 만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가섭존자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가섭사·가섭암·가섭원·가섭전·가섭산·가섭굴·가섭봉·가섭대 등 ‘가섭’과 관련된 명칭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지리산 영신사에는 돌로 만든 가섭존자상이 있는데 ‘세조가 내관을 보내어 매년 향화를 올렸다’거나 ‘왜적이 가섭존자상의 이마를 깎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지리산 성모상과 함께 가섭존자상은 유명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유생들의 지리산 유람기에는 이 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국가가 분향을 할 때는 산신령에게 하지 않고 지리산 성모상과 가섭존자상에게만 한다고 유생들이 비판하는 글을 남기고 있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가섭존자 맞은 편에는 젊은 수행자 모습의 아난존자가 합장한 채 서 있다. 석가여래처럼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난존자는 명부전 지장보살 협시인 도명존자와 비슷한 모습이며,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두 손을 치켜든 가섭존자와 대비를 이룬다. 석가여래께서 열반한 뒤에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으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오랫동안 모시면서 들은 많은 설법을 모두 암송함으로써 경전 결집에 큰 역할을 했다.  

군산 동국사 대웅전.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은 ‘‘아난존자의 입으로 세존의 심법을 토해 내, 혼미함을 비춰 깨뜨려 태양보다 빛났으니”라는 말로 아난존자가 석가여래의 말씀을 암송해 경전으로 결집한 것이 태양보다 빛났다고 찬탄하고 있다.

석가여래·가섭존자·아난존자로 구성된 동국사 석가여래삼존상은 석가여래 열반 이후 영축산이 바라보이는 칠엽굴에서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500명의 아라한들과 함께 아난존자의 입을 통해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하는 경전 결집 장면을 1650년에 김제 금산사 대장전에 표현한 것이다. 금산사 대장전을 떠나 군산 동국사 대웅전으로 옮겨지면서 칠엽굴에서의 경전 결집의 상징성은 옅어지고, 중생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석가여래와 나한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동국사 석가여래삼존상은 나무로 전체 윤곽을 만든 후 그 위에 진흙으로 발라 완성한 목불과 소조불이 결합된 목심소조불(木心塑造佛)이다. 동국사 석가여래삼존상은 현재까지 발견된 조선시대 불상 가운데 응매스님이 남긴 유일한 작품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17세기 중엽 경부터 많은 불상을 직접 제작한 조각승 도우스님과 희장스님이 시주자로서 참여하고 있고 1285명이 직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은, 당시 금산사 대장전 석가여래삼존상 조성이 당대 최고 불사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불교신문3287호/2017년4월5월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