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부처님의 눈은 왜 퉁퉁 부어있을까?

논산 쌍계사 대웅전 삼세불상. 왼쪽부터 아미타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

2013년 3월 말 간다라 미술 특강으로 만난 불광사 보살 몇 명과 논산에 있는 세 절을 찾아 ‘삼사(三寺) 순례’를 떠났다. 은진 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 왕건이 창건한 석불로 이름난 개태사 그리고 대웅전의 꽃살문이 아름다운 쌍계사로의 여행이었다. 벚꽃으로 유명한 하동 쌍계사는 자주 갔었지만, 2013년 이전의 논산 쌍계사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마음이 가면 모든 것이 새롭다. 논산 쌍계사도 그랬다. 조선시대 이전의 불교미술에 머물러 있던 관심이 2011년부터 시작된 한국연구재단의 조선시대 불상 연구 프로젝트로 조선시대로 옮겨갔다. 마침 연구가 시작된 2011년에 논산 쌍계사 대웅전의 석가여래를 비롯한 세 불상의 복장 조사가 이뤄졌다.

논산 쌍계사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번지 작봉산에 있다. 쌍계사 주변에는 백제의 충신 계백 장군의 묘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묘가 있다. 이곳에서 견훤과 왕건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고 견훤은 왕건에게 패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상을 다시 연다는 의미로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했다. 논산은 너른 곡창지대인 논산 평야가 있고 금강을 이용한 뱃길이 있으며 서울과 호남을 잇는 육로가 발달한 곳이었으니, 이곳을 차지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봄의 기운이 왕성한 4월 중순 남편과 함께 쌍계사를 다시 찾았다. 쌍계사 가는 길에 조선 초 사육신 중 한명인 성삼문(1418~1456) 묘에 들렀다.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잡자 성삼문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됐다. 그의 시신은 여러 곳에 매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리가 이곳에 묻히게 됐다고 한다. 

성삼문의 사당과 묘가 있는 곳에서 쌍계사까지는 약 4km 떨어져 있으니 그다지 멀지 않다. 쌍계사 가는 도중에 성삼문 묘를 찾은 이유는 신숙주(1417~1475)의 동생 때문이었다. 생육신으로 살아남아 세조에게 협조했던 형 신숙주와 다른 삶을 살았던 동생 신말주(1429~1503)는 아내의 고향인 전북 순창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신말주의 아내 설씨 부인은 강천사를 복원하기 위해 1482년에 시주를 권하는 글을 지었다. 설씨 부인 권선문은 조선 초 사대부 집안과 불교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논산 쌍계사는 봉황루 아래를 지나야 비로소 경내로 진입할 수 있다. 봉황루에는 휑하니 법고(法鼓) 만이 놓여있고, 벽에는 노스님이 1779년에 지은 시가 걸려 있을 뿐이다. 

“고루(鼓樓)에 나 홀로 누워/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저녁 불빛은 불전을 밝게 비추고/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아마도 노스님이 머물던 때에도 쌍계사 봉황루에는 법고만이 놓여 있었나 보다. 봉황루를 지나니 대웅전 앞 너른 마당에는 노란 민들레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고 개나리며 벚꽃이 대웅전 주변을 화사하게 빛내고 있었다. 대웅전 꽃살문 역시 봄꽃과 어우러져 방문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꽃살문에 닿은 빛은 법당 안을 수행의 장으로 만들었고, 법당을 벗어난 방문객에게는 꽃으로 장엄된 극락으로 가는 문이었다. 

논산 쌍계사 아미타불상 발원문. 1605년(선조 38년) 불상 조성 목적과 불상 조성에 참여한 시주자 명단.

꽃살문이 아름다운 대웅전 안은 웅장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석가여래께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아래 풀방석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보살상을 봉안한 불단(佛壇)으로 확대되었다. 법당의 중앙에는 사바세계의 교주인 석가여래가, 본존불의 왼쪽(향우측)에는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로 병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약사여래가, 본존불의 오른쪽(향좌측)에는 서방 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중앙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봉안된 경우를 삼세불상이라고 하는데,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도 삼세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는 대웅전에, 약사여래는 약사전에, 아미타여래는 극락전에 따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세 분의 부처님을 대웅전 한 곳에 모시는 경우가 많아졌다. 큰 영웅인 석가여래가 본존불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웅전(大雄殿)에 봉안되었으며, 17세기 초에 나타난 대표적인 경우가 1605년 선조 38년에 조성된 논산 쌍계사 대웅전의 삼세불상이다. 

논산 쌍계사 삼세불상은 임진왜란(1592~ 1598) 7년 후인 1605년에 조성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이전 조선 사회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북쪽의 중국은 명나라와 청나라 전신인 후금이 다투는 상황이었고, 바다 건너 일본 역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분열되어 있었다. 건국 후 200년 동안 조선은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후 조선 사회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백성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였고 전국의 사찰은 대부분 불 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논산 쌍계사에서 수행 중이었던 자비심 많은 영관스님은 삼세불상을 조성해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을 것이다. 

논산 쌍계사 삼세불상이 봉안된 현재의 대웅전은 영조 14년인 1738년에 재건되었으니, 불상이 조성된 후 133년 뒤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1605년 불상 봉안 당시에는 2층 불전이었는데 1738년에 재건되면서 현재처럼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논산 쌍계사처럼 17세기에 2층으로 건립된 불전이 18세기에 재건되면서 단층으로 축소된 경우는 완주 송광사 대웅전과 고창 선운사 대웅전에서도 발견된다. 

논산 쌍계사 석가불상을 비롯한 세 불상의 제작 기법은 나무로 전체적인 형태를 잡은 뒤 흙을 발라 완성한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1612년에 조성된 해남 대흥사 삼세불상에서도 나타나며, 석가불상과 약사불상의 등 부분은 후대에 석고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쌍계사 대웅전 세 불상 가운데 아미타불상에서 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1605년인 선조 38년 3월에 자비로운 영관스님이 불상을 조성하려고 뛰어난 장인을 초청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여름을 지나 초가을 7월에 불상을 완성했고 7월 말일에 쌍계사 2층 전각에 봉안하고 예경했다. 조성 발원문을 갖춘 후 임금님의 목숨이 무궁하기를 바라며, 또한 각각 소원을 세워서 기쁘게 시주한 모든 시주자들이 바로 복과 수명을 더하고 깨닫기를 원한다. 이 공덕이 모두에게 파급되어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바란다.”

아미타불상에서 발견된 불상 조성 발원문의 크기는 높이가 39.7cm이고 길이가 268.9cm이다. 3m에 가까운 발원문에는 불상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담겨져 있다. 쌍계사 불상 발원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주 물품 목록 가운데 황금을 시주한 30명을 ‘황금 조연자 명단’이라고 해서 따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다른 불상 발원문에서 볼 수 없는 ‘불상 의복 시주자’로 한복련 부부가 등장한 점도 특이하다. 불복장으로 불상 안에서 저고리나 치마가 발견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복장으로 옷을 시주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 꽃살문의 밖과 안.

불상 조성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증명을 맡은 분은 인호(印湖)스님이고, 대표 조각승은 원오(元悟)스님이다. ‘대선사(大禪師) 원오’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각승의 위치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현, 청허, 신금 등 세 명의 스님과 희춘스님 등 5명이 동참하고 있는데, 3월부터 7월까지 짧은 시간에 세 구의 불상을 조성했다. 쌍계사 불상 조성에는 총 163명이 동참했는데 시주자 가운데 스님이 47명, 일반 신도가 100명이다. 이 외에 조각승 5명과 불상 조성을 이끈 스님들이 11명이다. 시주자 가운데 반 정도가 출가한 스님들인 점은 주목되며, 불상 조성을 주도한 영관스님은 아마도 당시 쌍계사를 이끌었던 스님으로 판단된다. 

조각승 원오스님의 현재까지 알려진 활동 시기는 1599년부터 1610년까지이다. 1599년에 석준 스님과 함께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을 개금했고, 1605년에 논산 쌍계사 삼세불상, 1605년에 완주 위봉사 북암 목조보살입상 4위, 1605년에 김해 선지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610년에 남원 선원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명부전 권속 등을 조성했다. 

논산 쌍계사 삼세불상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퉁퉁 부은 듯한 부처님의 눈이다. 전쟁과 가난으로 하루 종일 굶은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린 어머니 눈처럼 세 부처님의 눈은 부어 있다. 또한 얼굴에 비해 작게 표현된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말려 있는 것을 상징한 백호(白毫)와 돌출된 큼직한 코 등은 17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특징이다. 

오른쪽 어깨 위에 살짝 걸쳐진 가사로 가려진 석가불상의 상체는 직사각형에 가깝다. 세 불상은 모두 당당한 어깨에 비해 두 손은 섬세하면서도 작은 편이어서 대조적이다. 중앙 석가불상의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가사 자락, 왼팔꿈치의 비스듬한 Ω형 주름과 무릎 앞면의 3줄 평행 옷주름선, 장대한 체구에 비해 작은 두 손 등은 조각승 원오스님 유파의 특징이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의 삼세불상은 1605년에 제작된 대형 불상이며 17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조각승 원오스님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불교신문3268호/2017년1월25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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