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꽉 찬 둥근달이 제 방 창문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달빛이 그대로 창문을 통해 들어와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오늘 밤도 쉬이 잠 못 이룰 것 같습니다. 저 달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난 후부터 낮이고 밤이고 눈 떠 있을 땐 오직 당신 생각뿐입니다. 눈 감고 있을 땐 꿈속에서 당신을 만나지요. 방금도 방안에 누워 줄곧 당신 생각하다 누군가 그런 나를 은밀히 엿보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창 쪽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글쎄 저 달이 창문으로 저를 엿보고 있었지 뭡니까. 순간, 쑥스러움으로 무안을 타고 말았습니다. 그리 된 건 무람하게도 당신을 두고 불경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각의 대부분은 과거시제형 것들이지요. 그 과거시제형 것들에 온종일 몰두해지다 보니 그것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당신과 함께했던 제 이십 대 중후반을 살고 있는 거지요. 오십삼 해를 살아온 동안 당신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가장 즐거웠기에, 요 근자에 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저는 행복합니다. 문제는 밤입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마성처럼 뻗쳐 나오는 밤에는 우리의 과거시제에서만 지내는 게 아니라 현재시제에서의 당신의 옷소매를 잡아당겨 그걸 현재진행형이나 미래시제로 이끌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제풀에 놀라 자신을 사정없이 책망하며 그걸 밀쳐냅니다. 모두 제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현상이지요. 제 의지에 반하는 행위이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도시에 살 때 저는 칠흑 같은 밤을 좋아했습니다. 밤이어도 대낮 같은 밝기의 도시의 휘황한 인공달빛에 질려서인가 봅니다. 밤이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의 상태일 때 진짜 밤다운 밤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빛이 완전히 소멸된 적막한 공간에서 저는 태내 같은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도시 주택가나 도로마다 몇 미터 간격을 두고 공중에 인공 달들이 무수히 떠 있어 창문 커튼을 이중으로 둘러쳐도 완벽한 어둠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리카락 가늘기의 틈새로도 기어이 인공달빛이 새어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달이 뜨지 않는 때는 태곳적 원형질의 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장막이 사방에 드리워지지요. 당신 사는 곳도 여기보다 깊은 산중이어서 제가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 자랑 하는 것 같아 면구스럽기도 합니다. 

방안에 누워 있으면 깨벌레마냥 이리 되작 저리 되작 몸만 뒤채임질하고 있을 것 같아 밖으로 나왔습니다. 조요하게 내리비추는 달빛에 집 주변의 풍경이 어디에 눈길을 주어도 한 폭의 수묵화입니다. 회청색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달과 회청색과 위아래로 구분 지어져 머루색 긴 덩이로 사방을 둘러싼 산들과 그 아래 고랑 진 빈 밭들과 그 밭 가운데 오두막집 한 채, 거기에 저도 끼어 넣는다면 집 마당에서 달을 올려다보는 저의 모습까지의 어우러짐이 수묵으로 그린 도교풍의 산수화에 제격이지 않겠습니까. 그러자면 오두막과 제 모습은 자연의 일부처럼 작게 그려 넣어야겠지요.

제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혹 잠들어 있는 주변의 생명체들을 깨울까봐 제 발소리를 최대한 줄여 자박자박 걷습니다. 

이곳은 밤에 멧돼지, 고라니. 토끼, 오소리 등이 산에서 먹이 찾아 내려오기도 합니다. 지난겨울에 며칠간 줄창 눈이 내려 산에 무릎 높이로 쌓이자 고라니 한 마리가 집 근처에서 비실거리고 있어 마른 고구마 줄기를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쯤이었던가요. 아침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산책 삼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산 밑 귀퉁이 한 평 크기의 바위에 송아지만한 멧돼지가 앞다리 세우고 고개 쳐들고 척하니 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어둠 기가 남아 있던 터라 처음에는 눈길이 바위 쪽으로 갔어도 멧돼지임을 분간 못했습니다. 숨은그림찾기에서 쉽게 형상을 찾지 못하도록 교묘히 트릭이 쓰이듯 멧돼지 털과 같은 색의 바위에 한몸처럼 붙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멧돼지임을 알았을 때는 거리상 이십 보도 안 됐기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제 등 뒤 집과의 거리는 오륙 십보도 될 텐데 말입니다. 대개 멧돼지들은 사람을 보면 그쪽에서 놀라 먼저 도망을 친다는데 이 멧돼지는 저를 보고서도 움찔도 않고 제 하는 양을 지켜보는 것 같았습니다. 녀석이 도망가지 않으니 제가 도망가야겠지요. 멧돼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서서히 열 걸음 정도 뒷걸음치다 그대로 집을 향해 단거리 선수마냥 죽을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그 다음부터 늦은 밤이나 아주 이른 아침은 집밖에서 멀리 나다니지 않습니다. 어둠이 있는 동안은 저들의 활동시간으로 여기고 방해하지 않겠다는 배려 차원에서입니다. 서로 공생하자는 게지요. 불교사상 중에 생명존중은 인간공동체가 본받을만하다고 봅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그게 도미노 식으로 파급효과를 낳아 결국은 생태계의 조폭이라 할 수 있는 인간에게까지 재앙이 닥치게 되겠지요. 

걷는 동안 저보다 더 큰 제 그림자가 동행이 돼주고 있습니다. 밤늦게 나다니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예외라는 것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집에서 삼십 보쯤 걸어서 산벚꽃나무에 닿았습니다. 

조만간 한약초들 씨를 뿌리기 위해 일구어놓은 빈 밭 주변을 여백삼아 

제 허벅지 굵기의 산벚꽃나무가 저 홀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서 있습니다.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송이들이 풍성한 꽃돔 모양을 이루어 

달밤에 더 환상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칠흑 같은 밤이 좋다고 했지만 그건 도시에 살 때의 말입니다. 이곳에 온 후로 달의 존재감을 중히 여기고 다정한 벗인 양 친근히 대합니다. 더욱이 이곳의 달은 저 홀로 당당하니 주변의 풍경을 근사하게 연출해주니 또한 저 홀로 그걸 관조하다보면 제가 예술인이 된 기분이 들고 신선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고래로부터 얼마나 많은 문사와 예술가들이 시와 그림, 음악으로 달을 찬미하고 달밤에 낭만과 풍류를 구가했습니까. 달밤에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달에게 사랑의 언약을 맹세했겠습니까.

달에 우리 인간이 발을 내딛으면서 그에 대한 꿈과 낭만은 깨졌다지만 그래도 달에는 방아 찧는 옥토끼가 살고 있다는 동화 같은 얘기를 여전히 믿고 싶습니다.

집에서 삼십 보쯤 걸어서 산벚꽃나무에 닿았습니다. 조만간 한약초들 씨를 뿌리기 위해 일구어놓은 빈 밭 주변을 여백삼아 제 허벅지 굵기의 산벚꽃나무가 저 홀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서 있습니다.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송이들이 풍성한 꽃돔 모양을 이루어 달밤에 더 환상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왜 드넓은 구릉지 초원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풍경사진들 있잖습니까. 밋밋한 초원에 나무 한 그루 포인트로 서 있음으로써 초원의 풍경을 멋지게 살려내지요. 이 산벚꽃나무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방 창문에서 이 산벚꽃나무가 정면으로 바라보이게 집터를 잡았으니 제가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아시겠지요. 어쩌다 주변 산들에 쿠키에 초코칩 박히듯 자리하고 있는 산벚나무 동료들과 떨어져 이곳에 홀로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산벚나무는 버찌를 먹은 까치가 똥을 떨어뜨린 자리라던데 어떤 까치 한 마리리가 이 자리에 버찌똥을 흘린 걸까요. 수령이 최소한 수십 년은 된 것 같습니다. 산벚꽃이 피고부터는 이 산벚꽃나무 아래 자주 머뭅니다. 부처는 보리수 아래서 인류의 정신적인 혁명을 가져올 큰깨달음을 얻었지만, 저는 산벚꽃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을 합니다.

봄밤이고 달밤입니다. 유희와 쾌락, 욕망을 품은 감성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달밤에 산벚꽃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얼굴에 날아온 꽃잎하나가 프루스트가 따뜻한 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을 때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맘 때였지요. 오전에 있는 20세기 영미문학 수업이 휴강인데다 다른 전공과목은 오후 늦게 있어서 화창한 봄날을 캠퍼스에서 죽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캠퍼스 연못 주변에 만개한 벚꽃을 보고 섬진강변 벚꽃길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섬진강변 벚꽃 보러 갈까? 제 우발적인 제안에 응, 좋아, 당신이 바로 응했죠. 우린 택시 잡아타고 광주시외버스터미널로 달려서 그곳에서 구례행 버스를 타고 구례터미널에서 다시 화개 가는 버스를 탔지요. 화개. 꽃이 활짝 피어 있다는 뜻의 이름이 화사한 봄날에 잘 어울렸습니다. 화개장터로도 잘 알려졌고, 김동리 소설 ‘역마’의 주요 인물들의 활동무대여서인지 그들이 실존했던 것처럼 여겨진다고 당신이 그랬지요. 우린 점심시간도 됐고 해서 화개장터의, 역마의 여주인공 이름을 딴 음식점에서 재첩국으로 점심을 먹고 달큼한 탁배기와 도토리묵도 곁들었지요, 그때 제 입에서 육자배기 한 자락도 흘러나왔던 것 같습니다.

화개장터에서 나와서 쌍계사로 향한 길로 들어선 순간 와!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지르고 말았지요. 섬진강 물길 따라 이차선 길 양쪽으로 쭉 잇대어 있는, 제 허리통보다 굵은 고목둥치들의 위로 뻗치고 아래로 휘늘어지는 가지들마다에는 연분홍 벚꽃이 만발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섬진강변 벚꽃 십리 길의 화양연화였지요. 우리는 벅찬 감동으로 벚꽃 십리 길의 화양연화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빨려 들어갔지요. 깃털 같은 바람이 입김 한번 후- 불면 여리고 고운 꽃잎이 펄펄 져 내렸습니다. 꽃잎이 분분이 허공을 날 때는 나비 떼 같았습니다. 떨어진 꽃잎으로 길바닥에는 화문이 끝없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꽃잎을 하나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아직 심장이 팔딱이고 있는 것 같다고 했지요. 우리는 손을 잡고 쌍계사까지 십리 벚꽃길을 꿈을 꾸듯 걸었습니다. 저는 그때 해마다 봄이 오고 벚꽃이 만개할 때면 당신 손을 잡고 그렇게 꽃길을 걸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우리 검은머리가 명주 실타래처럼 허옇게 셀 때까지 말입니다.

이 달밤에도 깃털 같은 바람이 산벚꽃을 건들고 지나가면 꽃잎이 흩날립니다. 오늘 같은 밤, 이 산벚꽃나무 아래 당신 무릎을 베고 누워 당신이 읊어준 백석의 시들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의 민속적이고 향토성 짙은 시어들을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표현해낸 백석을 당신은 많이 좋아했지요. 당대의 모던보이였던 백석의 잘 생긴 외모 때문인지, 백석의 시어들 때문인지 항상 백석의 시집을 끼고 살면서 백석의 시들을 암송하다시피 했습니다. 제가 질투가 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당신이 백석의 시들을 백 번을 읊어준들 질투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황홀하겠지요. 당신에게는 이런 나의 욕망이 불경한 것이겠지요. 마음에서나마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꿈꾸며 이 산벚꽃나무 아래서 잠들고 싶습니다.

달밤에 수묵의 풍경화가 해낮에서는 총천연색의 풍경화로 탈바꿈했습니다, 초가지붕 같은 부드러운 산세들에는 농담을 달리한 고운 연두 빛 물결에 창호지 색의 산ㅤㅂㅓㅊ꽃나무가 촘촘히 들어차 있어 그 파스텔 톤 색들의 어우러짐이 봄날의 밝고 화사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 오두막이 천 냥이라면 주변의 풍경은 구천 냥 된다고 해야 될까요. 이런 그림 같은 풍경을 제 집안 바로 가까이에 들이고 사는 건 시쳇말로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덕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뒷말은 웃자고 한 말인지 아시지요.

이 오두막을 제가 혼자서 지었다면 당신은 놀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문가적인 솜씨를 발휘한 근사하고 멋진 집이 아닙니다. 집짓기 교육과정을 6주간 실습 받고 제가 6개월에 걸쳐서 지었는데 초보답게 서툰 솜씨가 여기저기 드러나 한눈에 봐도 매끄럽지 못하고 투박스럽습니다. 월든 호숫가에 있는 소로우의 오두막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물론 소로우의 세 평짜리 오두막보다는 규모가 크고 전기시설도 되어 있고 온수 나오는 욕실이랑 수세식화장실도 갖춰져 있어서 그것과 비교하는 자체가 소로우를 모독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명 같지만 소로우가 살았던 시대보다 한 세기 반이나 지났고, 평생 독신이었던 소로우와는 달리 제겐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가족이 있고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맺은 모든 인적, 사회적 관계를 위해서 최소한의 문명의 혜택은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가족이 와서 머물기도 하고, 지인들도 찾아올 텐데 호롱불에 재래식화장실을 이용하게 할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집 자재만큼은 흙과 나무로만 지었습니다. 잦은 실수와 실패를 해가며 고생고생해서 집을 완성했을 때 그 뿌듯하고 벅차오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부터 직장 은퇴하면 산수 좋은 한적한 곳에 살고 싶었습니다. 19세기 초중반인 이십 대에 온전히 자신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문명을 등지고 숲으로 들어간 월든의 소로우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산행을 할 때나 산간지역을 찾을 때면 산수 좋은 곳을 눈여겨보곤 했습니다. 그러다 칠 년 전쯤 이런 봄날에 산악동우회 일행과 이 근처에 산행 왔다가 이곳을 지나치면서 한순간에 이끌리고 말았습니다. 근방 마을에서 임도를 타고 일 킬로미터 쯤 들어온 곳에 사방으로 둘러선 부드러운 능선의 산들과 그 산들의 골물을 받아준 저수지. 이쯤에서 제 사는 곳의 보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저수지를 소개해야겠습니다. 오두막에서 사십 보, 산벚꽃나무에서는 열 보쯤 떨어진 곳에 축구장보다 조금 큰 아담하고 옹찬 저수지가 있습니다. 저는 저수지를 본 순간 소로우의 월든 호수와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때 저수지 위쪽 망초와 잡초로 우거져 있는 묵정밭을 주목했습니다. 저곳에 오두막 한 채 있다면, 그렇지요, 소로우처럼 살아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제가 이곳에 오십 초반에 거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한 십여 년 먼저 직장 은퇴를 하는 바람에 계획이 앞당겨진 것입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우리가 대학 나온 시에서 가까운 군 단위 사립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젊음과 패기로 의욕이 넘쳤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우리 도의 큰 시 단위 고등학교로 빠져나가고 일찌감치 영어를 포기해버린 학생들과 수업을 하려니 저 혼자만 떠들고 있고 학생들은 엎드려 자거나 지루한 표정들로 마지못해 시간 때우기를 하고 있는데 가르치는 저도 맥 빠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때부터 차라리 마음이 편했습니다. 대학입시에 대한 중압감도 떨쳐 버리고 학생들이 영어를 못해도 삶을 알차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인드를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영어 선생보다는 철학 선생에 가까웠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학교 순위가 평가되는 전국학력고사가 시행되고 그와 때를 같이해 새로 부임한 교장이 우리 고등학교를 우리 도의 두 명문 자사고처럼 만들겠다는 과욕으로 교사들을 닦달하고 다그치는 겁니다. 전국학력평가에서 어느 정도 순위 안에 들어야 되고 명문대도 몇 명 이상 합격시켜야 된다면서요. 속된 말로 2군 선수들을 데리고 코리안 시리즈 우승하겠다는 것이지요. 교사들과 학생들을 쥐어짜면 암기과목은 성과가 어느 정도 나올 수 있겠지만 영수 과목은 어디 그렇습니까. 교직을 내려놔야겠다고 몇 년간을 고심했지만 주변에서 다들 말리는 바람에 실행을 못하고 있던 차에 남의 일로만 여겼던 우울증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심해지니까 제가 누운 자리에 그대로 뗏장만 얹으면 되겠다 싶어질 정도로 삶의 의욕이 없어지더군요. 그때도 주변에서는 우리 나이에 명퇴는 삶의 나락이라는 엄포로 휴직을 권하며 나중을 기약하라고 했지만 저는 한 학기 마치자 미련 없이 사직서를 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이라고 봅니다. 당신 말마따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이루어지는 거겠지요.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이루어지는 거겠지요. 

당신이 일주일 전쯤 제게 해준 말입니다. 

당신을 그곳에서 만나다니요.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말이 제게도 기적처럼 찾아왔습니다.

겨우내 검버섯마냥 거무튀튀하던 산야가 고운 연두 빛으로 물들 때면 산행하는 산이 있습니다. 그곳은 남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 유명사찰을 품고 있는데 봄산행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저도 재작년까지만 해도 주말을 이용해 산악동우회 일행들과 또는 혼자서 그곳을 산행하곤 했지요. 그곳 정상 못 미처 팔부 지점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의 넓게 펼쳐진 시야로 농담을 이룬 연둣빛 파노라마가 장관을 이룹니다. 그 소나무자리의 유명세 때문에 주말에는 송사리떼 모이듯 산행인들이 바글바글해서 자리 천신을 못합니다. 이번에는 주중에 혼자 산행을 했습니다. 그 크고 넓은 산에 사람이 없더군요. 정상을 거쳐 일주하는 동안 산행인과 딱 한 번 마주쳤으니 말입니다. 공간학적인 경우만 보자면 태산 명동에 서일필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명당자리에서 스텐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차분하게 연둣빛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 정상까지 일주한 후 항상 들르던 본 사찰을 지나쳐 그곳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산내 암자로 발걸음을 했지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인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납작납작한 막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돌계단을 걸어올라 절 마당에 들어서면 한눈에 조망되는 몇 채의 전각과 요사채가 다감하게 자리하고 있는 경내는, 나중에 알게 됐지만 비구니 도량답게 고즈넉하고 정갈했습니다. 돌들을 얹고 그 사이사이 강회 칠을 한 담장과 기와편과 흙을 이용해 문양을 낸 두 종류의 담장이 나지막하게 둘러쳐진 모습이 그렇고, 법당 앞뜨락 화단에 아기자기하게 가꾼 정원수와 화초들이 그랬지요. 창건은 고려 때이지만 전각 건물들은 근자에 복원된 듯 골기와지붕이랑 기둥 나뭇결이 매끈하고 산뜻했습니다. 저는 사찰에 들어서면 먼저 마당에 자리한 석조물들을 눈여겨봅니다. 목조건물은 풍우에 약하고 화마에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건축물은 남아난 게 거의 없습니다. 그에 반해 돌로 만들어진 석탑이나 당간지주, 석등 등은 인위적인 훼손만 않는다면 천년도 훨씬 넘는 시간을 견뎌내니 시간에 마모되었어도 그 사찰의 가장 오랜 역사이기 때문이지요. 이곳의 석탑은 마당 양켠에 쌍으로 있는데 아쉽게도 기단부만 본래의 것이고 몸체는 그라인더로 제작된 최근의 것이었습니다. 석탑과 일별하고 마당 위쪽, 두 석탑 사이 대웅전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디디려는 참인데 요사채 쪽에서 한 비구니 스님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냥 모른 체하고 올라서기는 거리 상 예의가 아닐 것 같아 합장인사하고 바라다보는데 동시에 합장인사를 해주던 스님의 분위기가 기억에 익었습니다. 그건 절집에 들를 때면, 특히 비구니 스님을 접할 때면 제 시신경의 촉수가 예리해지기 때문에 바로 그걸 감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몇 걸음 더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제 가슴은 사정없이 방망이질했습니다. 마침내 제 입에서는 아~, 비명 같은 낮은 탄성이 흘러나오고 말았습니다. 미선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배코친머리에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곧 알아볼 수 있었지요. 반면 저는 학생 때 안 끼던 안경을 끼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 당신은 절 산행 차 들른 방문객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곧 당신도 저의 태도나 분위기에서 뭔가를 감지했는지 제게 집중된 눈길이 순간 놀람과 당혹감으로 번지는 걸 보았습니다. 당신도 그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잃은 거였지요.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제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예. 당신이 목소리만큼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찰에 들어서면 먼저 마당에 자리한 석조물들을 눈여겨봅니다. 

목조건물은 풍우에 약하고 화마에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건축물은 남아난 게 거의 없습니다.

그에 반해 돌로 만들어진 석탑이나 당간지주, 석등 등은 

인위적인 훼손만 않는다면 천년도 훨씬 넘는 시간을 견뎌내니 

시간에 마모되었어도 그 사찰의 가장 오랜 역사이기 때문이지요. 

우린 외부인 접객실로 이용되는 방에 차탁을 앞에 두고 정물구도로 마주 앉았습니다. 띠살문 창호지로 오후의 봄볕이 부드럽게 스며들었습니다. 당신이 따뜻한 물을 채운 투명한 유리찻주전자에 마른 국화꽃을 넣으니 꽃잎이 찬찬히 되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추억을 한닢 한닢 되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국화차는 이곳 사찰에서 직접 재배해 말린 것이라 했습니다. 국화향이 방안에 그윽하게 퍼졌습니다. 산행을 오래 하셨으니 근육피로에는 국화차가 좋습니다, 라며 찻잔에 국화꽃을 띄운 국화차를 건네는데 그윽하고 향긋한 향기와 함께 긴 산행한 저의 근육피로를 위해 국화차를 내놓은 당신의 마음씀에 그만 울컥했습니다. 당신은 학생 때도 배려심이 남달랐습니다. 당신 몫의 장학금을 5·18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운동권 과 동기생에게 양보했지요. 80년대 5·18민주화투쟁의 시발지이기도 한 우리 대학이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데모를 했잖습니까. 대학 다니는 내내 공중에 누렇게 떠다니는 최루탄가스 때문에 재채기와 눈물콧물 범벅을 하며 다녔지요. 무차별적인 최루탄 발포 현장에서 자신의 미래의 영달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던 학생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당신은 장학금이 그들의 투쟁과 희생 속에 취득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양보하는 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국화차를 두어 모금째 마시고 난 후 26년 동안 옹이처럼 박혀 있는 제 가슴 속 응어리를 꺼냈습니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제게 일언반구도 없이 그렇게 산으로 떠나버린 거에 대해 그 응어리에 야속함도 얹었습니다. 제게도 그 정도의 권리는 있으니까요. 당신은 절절한 인연들을 등지기 위해선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했지요. 그 말에 저는 더 이상 당신이 홀로 떠나갔던 그 길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궁금함은 당신의 삶의 비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4학년 마지막 학기 수강등록을 하지 않고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자 저는 당신이 함께 기거했던 오빠네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밤 데이트 때면 당신을 집 앞까지 바래다 준 적들이 있었지요. 아파트 현관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퇴근하는 당신 오빠에게 당신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처음엔 외국으로 유학 갔다고 하더군요. 오빠는 제 표정에서 제가 곧이듣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서 미선이가 굴비 갖다 준 학생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하기 전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오빠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저를 집 근처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두 사람은 불고기백반 시켜서 그때부터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미선이 산으로 갔네. 뭐, 삶의 백척간두에 서보고 싶다나. 지가 삶을 얼마나 살아봤다고······. 소주잔을 단숨에 비운 당신 오빠가 넋두리하듯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머리 빡빡 깎고 중이 되겠다고 산으로 들어갔단 말일세. 그 순간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네는 그런 낌새를 채지 못했나? 미선이가 불교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섬진강 십리 벚꽃길 종착지인 쌍계사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대웅전 법당 부처를 향해 오랫동안 마룻바닥에 표면장력처럼 응축돼 엎드려 있던 당신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당신이 연화대에서 당신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저 황금빛 남자를 따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말 그대로 막연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막연함이란 게 때로 어떤 구체적인 확실함보다 더 현실을 전복시키는 힘이 숨어 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래, 미선이 마음 하나 못 잡았나. 빈 술병이 쌓여가며 두 사람 다 거나해졌을 때 오빠가 제게 힐난하듯 던진 말이었습니다. 실은 본인에게 가하는 자책감이었지요. 우리 대학 법학과를 나와 광주시청 중진급 공무원이던 당신 오빠는 동생을 잘 건사하지 못한 탓에 부모님께 크나큰 불효를 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형님이 미선이 귀가시간을 열 시로 정해놓으셨잖아요. 저 역시 저에게 가하는 자괴감으로 오빠에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미선이 새언니가 미선이에게 같은과에 남자친구가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 시골에서 유학 온 자취생인지 간혹 굴비 한 마리나 전복 한두 개씩 없어지기도 하고 반찬도 표시 안 나게 덜어 내진다고 하면서. 우리는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네. 이제 와서 말인데 미선이가 열 시 귀가시간을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걸 보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람 됨됨이를 괜찮게 여기고 있었네. 그날 여동생을 잃은 오빠와 연인을 잃은 저는 대취했습니다. 

당신 오빠와 헤어지고 돌아오는데 제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고 비참했습니다. 제가 오죽 못 났으면 2천5백 년 전 삶의 해답을 찾겠다며 처자식 버리고 집을 나간 고타마라는 남자에게 당신을 빼앗겼겠습니까. 당신과 함께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꽃길을 거닐고, 밥을 먹고, 미래를 꿈꾸던,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가진 제가 아닌 쇳덩이, 돌덩이, 나무덩이로 만들어져 신비주의 전략인지 반개의 눈을 하고 알듯 모를 듯한 미소로 절간에 들어앉아 있는 형상한테 당신을 잃었으니 제 상실감,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전국의 절집들 부처란 부처는 모두 때려 부수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은 이곳 사찰에 부임한 지 5년째이고 주지를 맡고 있다고 했습니다. 배코친 머리에 먹물 옷을 입고 얼굴에 조금의 꾸밈이 없었지만 얼굴표정이 해맑고 단아했습니다. 당신 법명이 맑을 정 펴안한 안, 정안이라고 했지요. 정안스님. 저는 속으로 당신의 법명을 되뇌어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잘 어울렸습니다. 

당신은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사찰음식 체험을 통한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직접 주관하는데 자연주의 먹거리에 대한 웰빙 열풍이 불면서 주부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했지요. 당신이 제게 크라운판 요리책을 한 권 선물했습니다. ‘정안스님의 웰빙 절집 밥상’ 이라는 표제와 함께 앞표지에 큰 접시에 여러 산채나물이 맛깔스럽게 놓여 있는 사진이 실려 있지요. 이 책에 나오는 요리들 레시피 대로만 따라 해도 반찬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게 요긴하게 쓰이겠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신은 늘 제게 도움을 주는군요. 사찰요리 전문가가 되셨네요. 요리 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당신 요리 솜씨는 제가 잘 알지요.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계란말이, 계란찜, 소고기장조림, 멸치볶음 제육볶음 등 당신이 직접 담갔거나 요리해준 음식들은 다 맛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새언니보다 당신 음식솜씨가 더 좋아서 당신이 시장 봐서 김치들도 담그고 반찬들도 만든다고 했지요. 그럴 때 제 몫을 따로 챙겨 자취방 미니냉장고에 반찬들이 떨어지지 않게 채워놓았지요. 간혹 새언니에게 초등학교 학부형들로부터 굴비나 전복이 선물로 들어온 걸 한 마리 슬쩍해서 제 밥상에 구이로 올라 입의 호사를 누렸고, 복날엔 닭 뱃속에 찹쌀이랑 인삼, 대추 넣고 실로 꿰매어 삼계탕을 끓일 때 그 곁에 전복도 한두 개씩 곁들어 제 몸보신을 해주었지요. 당신의 손맛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을 때마다 저는 미리서 맛있는 밥상에 대한 행복한 꿈을 맛보았습니다.

당신이 제게 조심스레 인적사항에 대해 물었습니다. 처음이나 오랜만의 만남에서는 그게 대화에 빠질 수 없는 감초 같은 매뉴얼인 셈이죠. 교편 잡고 4년 만에 통신회사에 다닌 아내를 지인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들 하나 두었지요. 아내와 저는 서로에게 특별히 좋을 것 없이 특별히 불만거리 없이 담담하고 무난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저의 명퇴를 두고 아내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아내도 그 무렵에 직장 명퇴를 해야 할 시점이어서 기침에 재채기까지 겹치면 어떡하냐는 거였죠. 아내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가 의지처가 못된다고 여겨서인지 캐나다로의 이민을 계획했습니다. 캐나다에서 미용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촌언니가 그곳의 교육환경과 생활환경의 좋은 점을 부각시켜 아내를 끌어당긴 것입니다. 아내는 캐나다에서 네일아트 숍을 운영할 야심찬 희망을 품고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며 아들과 함께 캐나다를 고집하는데 그걸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캐나다에 따라가는 건 죽어도 싫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소로우적인 삶을 원했으니까요. 반여 년 간의 공방 끝에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삶을 살자고 합의점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캐나다 생활이 만족스러운가 봅니다. 나이가라 폭포에서 아들과 찍은 사진이나 캐나다 국립공원의 순록과 찍은 사진들을 통해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주니 말입니다. 어느 날 저한테 밥이나 제임스 이름을 가진 남자와 재혼할 테니 이혼도장 찍어달라고 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삼십여 분쯤 자리하고 있었던가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26년 만의 만남은, 거기다 속세인과는 다른 삶을 걸어온 당신이기에 놀라움과 반가움의 한켠에는 어딘가 어색하고 긴장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음에 만난다면 좀 더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얘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떠나올 때 당신은 육년 묵은 된장과 김부각, 연근장조림을 싸주셨지요. 그걸 받아들고 뒤돌아 걸어 나오는데 가슴이 더워지고 눈시울이 그만 촉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제 곁에서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당신 자리에 있을 때 빛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수지에 와 있습니다. 소로우의 월든 같은 존재라고 했지요. 규모면에서는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제게는 아담해서 더 정감이 갑니다. 이 저수지의 물은 오두막 오른편 뒤쪽, 산 이골 저골 들의 물이 한 데 모아지는 큰 계곡이 있는데 제 집터와 임도를 사이에 두고 폭 5미터 길이 50여 미터 되는 냇가를 통해 저수지로 흘러들어옵니다. 집터 쪽 냇가 둑에는 산벚나무들을 쭉 심어서 아직 몸체가 제 엄지 굵기만 한 묘목들이지만 그래도 지금 나무마다 산벚꽃이 활짝들 피어 있습니다. 몸체가 굵어질수록 이곳의 또 하나의 멋진 풍경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문행기가 있는 저수지 안쪽인데 저수지물이 근처 산의 풍경을 거울처럼 받아 내주고 있습니다. 산 밑자락 몸체가 굵은 산벚꽃나무가 물 쪽으로 70도 기울기로 서 있습니다. 수면에 산벚꽃잎이 수북이 떠 있어 수생화가 피어 있는 듯 화사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그 수생화 위로 제 팔뚝만한 잉어들이 빼꼼히 머리를 내미는데 산벚꽃향을 제 몸에 배이게 하기 위해 그런 것 같습니다. 이곳은 제 팔뚝보다 더 큰 잉어가 많이 삽니다. 지금이 잉어 산란기철이어서 저수지와 계곡을 잇는 냇가 상류 쪽으로 잉어 떼들이 득실득실 모여들어 돌 틈 사이에 산란을 합니다. 바짓가랑이 걷어붙이고 물에 들어가 맨손으로 잡아도 금세 한 양동이는 잡을 것 같습니다. 

다시 산벚꽃나무 아래 앉아 있습니다. 산벚꽃잎이 흰 나비 떼 날듯 분분이 날리고 있습니다. 방금 그 생각을 했습니다. 오두막 뒤안에 내걸린 가마솥에 팔뚝만한 잉어와 들깨가루, 마늘을 넣고 장작불로 푹 고아서 뽀얗게 우러나온 잉어곰 한 그릇 당신께 먹이고 싶다고 말입니다. 정안스님이 아닌, 제 첫사랑 미선이에게 말입니다. 봄날, 이 산벚꽃나무 아래서 말입니다. 

이 선 재

 

한 승 원 / 소설가

[불교신문3262호/2017년1월1일자] 
 

이 선 재 삽화=용정운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