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매가 부질없이 스스로 운다”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란 말이요

한다면,

“깨진 그릇으로 

다시 시루를 만드는 것과 같다” 

암두말후구(岩頭末後句)를 

묻는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

아는 자가 이 누구인가”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이며 중흥조인 경허·만공스님의 선풍(禪風)을 계승하고 덕숭총림 수덕사 초대 방장을 역임한 혜암현문(惠庵玄門, 1886∼1985)스님.

어느 날에 납자일인(納子一人)이 수덕사(修德寺) 조실(祖室)에 들어와서 혜암(惠庵)노스님에게 예배(禮排)하고 묻기를 “소승이 노스님께 법문을 듣고자 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는데 법문 말씀을 하여 주시겠습니까?” 하니 “늙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나마는 성의가 고마우니 생각나는 대로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스님 저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라는 것이 선문에 있지 않습니까?” 

“있지 있어 어디 말해 보게.” 

“무문관(無門關) 제13칙에 보면 덕산(德山)스님이 어느 날에 발우(食器)를 가지고 조실에서 나와서 승당으로 가시다가 설봉(雪峰)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설봉이 부르되 이 노장 스님이 종소리도 아니나고 북소리도 아니났는데 때도 모르고 어디로 가시는 것이요 하였더니 덕산(德山)스님이 무참하여 조실로 돌아갔습니다. 설봉이 이런 이야기를 암두(岩頭)스님께 권하였더니 암두가 말하되 점잖은 덕산이 아직도 말후구(末後句)를 몰랐구나 하였습니다. 덕산이 이 말을 듣고 시자를 불러서 암두를 오라고 하여 묻기를 자네는 이 노승을 인정하지 않는가? 하였더니 암두가 덕산에게 남이 듣지 못하도록 귓속말로 비밀하게 무슨 뜻을 말하였더니 덕산스님이 머리만 끄덕거리고 아무 말도 아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에 덕산이 법좌(法座)에 올라앉아서 설법을 하였는데 여느 때보다 달랐습니다. 암두(岩頭)가 승당 앞에 이르러서 손바닥을 치고 크게 웃어 말하되 덕산노장의 말후구(末後句) 얻은 것을 기뻐하노니 이 뒤에는 천하사람이 덕산 노장에게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암두(岩頭)가 덕산스님에게 무슨 말을 귓속말로 하였건대 덕산은 그 이튿날에 설법이 이상하였으며 또 암두(岩頭)가 긍정하고 손을 치고 웃으며 덕산이 말후구(末後句)를 얻었다고 긍정한 것이 무슨 뜻이냐는 이 공안에 대하여 고금에 여러 말이 많고 현재 우리 선학계에서도 이것을 한 연극으로 돌리는 종사까지 있으니 노스님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도 근래(近來)에 유행되는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왕래(往來)하는 납자(納子)에게도 듣고 불교신문에서도 보았지만 암두말후구(岩頭末後句)를 일렀다는 것이 석연(釋然)치 못하네.”

“그러시다면 노스님은 무엇이라고 이르시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이 혜암(惠庵)에게 암두말후구(岩頭末後句)를 묻는다면 나는 유안불견(有眼不見)이요, 유이불문(有耳不聞)이라, 지자(知者)가 시수(是誰)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 아는 자가 이 누구인가 하리라. 또 이르되 운변탈토(雲邊脫兎) 향하지(向何知)냐 낙일(落日) 기응공자명(飢鷹空自鳴)이라 하리라. 구름가에 날쌘 토끼가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이냐 서산낙일에 주린 매가 부질없이 스스로 운다 하겠네.”

“또 한가지 묻겠습니다. 서울 대각사에 계시는 용성(龍城)스님께서 만공(滿空)스님께 묻되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라” 하자 만공스님께서는 무언침묵(無言沈默:良久)을 하고 계셨습니다. 용성스님이 “그러면 양구(良久)란 말이요” 하니 만공스님은 “아니요”라고 하셨답니다. 그 뒤에 전강(田岡)스님이 만공스님께 사르기를 “큰스님들께서 하신 일이 서로 다 멱살을 잡고 진흙구덩이에 들어간 격(格)입니다”라고 하니 만공스님께서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전강스님이 대답하되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란 말이요” 하였다고 하니 노스님은 어떻게 답(答)을 하시겠습니까?”

“왜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는 이르는 법(法)이 없단 말인가? 누가 나에게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라고 한다면 나는 ‘파기상종(破器相從)이라고 하겠네. 파기(破器)로 다시 시루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말일세” 하였다. 

납자(納子)가 또 묻기를 용성(龍城)스님이 도봉산(道峰山) 망월사(望月寺)에 조실(祖室)로 계실 때에 용성스님이 제방(諸方) 선지식에게 묻기를 “비유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 코끼리에게 쫓겨서 달아나다가 피할 수가 없어 고정(古井)에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등칙나무가 나서 고정(古井) 밖에 있는 나무와 같이 커서 고목(古木)이 되었다. 쫓기던 사람은 등칙나무를 잡고 매달려 있자니까 동서사방(東西四方)으로 독사(毒蛇)가 있어서 고개를 들고 물려고 하고 정저(井底)에는 청룡(靑龍)이 있어서 잡아먹으려고 기어올라오고 등칙나무 위에는 백서(白鼠:흰쥐)와 흑서(黑鼠)가 번갈아가며 등나무를 쏠고 있는데 나무위에 꿀방울(密滴)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이 떨어져서 입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든 공포를 다 잊어버리고 매달려 있다는 인생무상(人生無常)에 대한 비유담이 있으니 꿀방울을 먹던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만공스님은 “작야몽중사(昨夜夢中事)니라”하고 혜봉(慧峰)스님은 “불불능원작불(佛不能原作佛)이니라.” 하였고 혜월(慧月)스님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으니 염득불명(念得不明)이니라”고 하였고 용성스님은 자답(自答)하되 “표화(瓢花)가 철리출(徹籬出)하야 와재마전상(臥在麻田上)이니라” 하고 보일(寶日)스님은 “하시입정(何是入井)”이라고 했고 고봉스님은 “아야 아야”라 하고 전강스님은 “달다”라고 하였다 하오니 노스님은 이에 대하여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누가 나에게 그런 것을 묻는다면 문자(問者)가 상신실명(喪身失命) 하리라고 답(答)하겠노라” 하니 납자가 큰절을 하고 물러갔다. 

문책재시자(文責在侍者)

혜암(惠庵)노스님은 수덕사 선방 조실로 계시는데 금년 84세로 60년간을 선리(禪理)만 정진(精進)하신 선지식(善知識)이다。 

■  혜암스님은…

혜암스님은 1886년 1월5일(음력 1885년 12월21일)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부친 최사홍(崔四弘) 선생과 모친 전주 이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897년 수락산 흥국사에서 보암(保庵)스님을 은사로, 금운(錦雲)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이때 받은 법명이 현문(玄門)이다. 스님은 1908년 23세의 나이에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처음 안거를 한 이후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1911년 27세에 해담(海曇)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만공(滿空)·혜월(慧月)·용성(龍城)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에 몰두했다. 이 무렵 묘향산 상원사 주지와 태백산 정암사 주지 소임을 잠깐 보았다. 

혜암스님은 1929년 45세 때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전법을 받았다. 이때 만공스님이 혜암이란 법호를 내렸다. 이로써 스님은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은 법제자가 되어 ‘경허·만공의 선풍’을 세상에 보였다. 

1956년 72세에 수덕사 조실로 추대된 혜암스님은 20여 년간 후학을 지도했다. 1984년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 우리나라의 선을 미국에 전파하는 값진 역할을 했다. 스님은 그 해 말에 설립된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다. 1985년 5월19일(음력은 3월30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스님은 세수 101세, 법납 89세에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만년에 평생 수행자로 살아온 세월을 회고하며 한편의 시를 지었다. “行狀衲衣一枝(행장납의일지공) / 東走西走走無窮(동주서주주무궁) / 傍人若門何處走(방인약문하처주) / 天下橫行無不通(천하횡행무불통)” 묘봉스님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내 행장 누더기 한 벌과 주장자 한 개 / 동서로 달리기 끝없이 하였네 / 누가 만약 어디로 그렇게 달려가냐 하면 /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리. 

[불교신문3254/2016년12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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