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스스로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군다

먼저 자신에 대해 냉정한 

반성이 앞서야 하고

상대의 잘못을 

단죄하려 하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이다

완연한 가을이다. 내가 살고 있는 백양사는 단풍으로 이름난 곳이다. 매년 단풍철이면 곱게 물든 단풍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북적인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기간이 보름이 아니라 1년 내내 고운 빛을 띠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사람들의 푸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단풍이 붉은빛을 항상 띠고 있다면 정말 사람들이 더 좋아할까? 겨울에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가 봄에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 한여름의 무더위를 견디고 가을에 곱게 물들어 우리에게 보름 남짓 고운 자태를 뽐내다 낙엽이 돼 뒹구니 좋아 보이는 것이지, 사시사철 붉은 빛을 띤다면 사람들은 그저 단풍은 본래 그러려니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도 잠시 피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우리의 삶도, 건강도 유한(有限)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길 것이다. 법성게에 “중생을 위한 보배가 허공에 가득한데 중생들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네”라는 구절이 있듯이 우리가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이 세상도 사실은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이대로 완전하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다. 

20여년 전 은사 스님을 모시고 살 때 은사 스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떠오른다. 수행자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엄격하셨던 은사 스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님께서 광주 추강사에서 머무실 때 한 젊은 스님이 저녁이면 몰래 나가 말썽을 피우자 스님께서는 호된 꾸지람과 함께 그 스님을 결국 절에서 쫓아내셨다고 한다. 

그 제자가 절에서 짐을 싸서 나가면서 은사 스님께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 편지는 “은사 스님은 저희에게는 바다와 같은 존재이신데 도랑물이나 시냇물 같은 저희를 깨끗하지 못하다고 거부하고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저희는 어디로 흘러가야 합니까?”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 편지를 읽으신 은사 스님께서는 부끄러운 마음에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시며 무릇 수행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다른 사람에겐 한없이 관대해야 하는데 아직 젊어 미숙할 때라 그러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 설명해 주셨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율법에 따라 돌로 치려 하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고 말하니 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 피하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을 때 예수님이 ‘나도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성자가 아닌 범부는 다른 이를 심판할 자격이 없으며, 성자는 모든 이를 부처님처럼 여기기 때문에 다른 이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제야 나는 은사 스님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도 왜 그리 자상하게 대해 주시는지 이해가 됐다. 절집에는 용도 살고 뱀도 살기 마련이고, 한번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언젠가 동쪽으로 넘어지게 돼 있으니 못나고 사고뭉치인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과 인연돼 절집에 왔으니 자비로 섭수해 제도하고자 하시는 은사 스님의 비원(悲願)이 느껴졌다.

우리는 보통 스스로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 군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 불자라면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엔, 먼저 자신에 대해 냉정한 반성이 앞서야 하고, 상대도 본래는 부처님이라는 마음가짐과 상대의 잘못을 단죄하려 하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이다. 

[불교신문3244호/2016년10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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