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처럼 좋은 것만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세속과 출가의 가치가 다르듯이

배우고 행하는 방법과 태도 달라 

세속의 가치 그리워 해 집착하며 

좋은 것만 추구하면 수행에 장애

<증일아함경> 마왕품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 없이 항상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는 것, 재물 모으기를 좋아하는 것, 가사와 발우에 탐착하는 것, 허황하고 잘 잊으며 생각이 어지러워 안정되지 못한 것,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때로 가르침을 받지 않는 것(與惡知識從事親近 非事恒喜遊行 恒抱長患 好畜財貨 貪著衣鉢 多虛乾妄亂意非定 無有慧明 不解義趣 不隨時受誨)”이 있는 자는 “현세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교화가 미치지 못한다(現法中不得長大有所潤及)”하였습니다.

호미현인의 경우 출가 이전 농사짓던 호미가 번뇌였지만 가사와 발우는 세속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탐착한다는 것은 출가 후 새롭게 일으킨 욕심일 것입니다. 속세에서 익힌 기량이나 지니던 물건이 수행에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하는데, 오히려 출가 후 새로운 집착을 일으켰으니 번뇌를 늘린 셈입니다. 

위 인용문에서 발우(그릇)란 수행자가 지녀야 할 것으로 현재 출가 연수와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가지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필자의 경우도 평생 사용할거라는 명분으로 플라스틱으로 된 ‘뿔’ 발우보다 나무로 된 ‘목’ 발우를 더 가지고 싶었고 또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간수하더라도 칠이 벗겨지고 파손되기도 합니다. 물질이 가지는 한계라서 당연하지만 다시 구할 때도 역시 같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를 이런저런 핑계대지 않고 곧장 말한다면 여러모로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우의 본래 의미를 잊어버리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집착이 될 것입니다. 

발우는 수행에 필요한 적당량의 음식을 담는 그릇이며, 세속생활과 같은 번잡함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다스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爲令修行者降低物質欲望, 竝避免世俗生活之紛華騷動). 때론 그 이외의 의미(傳承法脈)도 있지만 공양(식사)에 있어서 응당한 양이라는 점(應腹分量而食之食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에 진전이 있으려면 혹시 세속처럼 좋은 것만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두루두루 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출가(出家)가 단순히 삶의 무대를 집에서 절로 옮긴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출가에 대하여 원효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간결하게 이르고 있습니다. “마음에 애욕을 여읜 것이 스님이고, 세속의 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 출가다(離心中愛 是名沙門 不戀世俗 是名出家).” 

자의(自意)로 속세에서 벗어나 불도에 들어서는 출가(出家)나 다시 세속으로 되돌아가는 환속(歸俗)은 일생일대의 결심이 따릅니다. 

사전에 세속(世俗)이란 세간통속(世間通俗)이며, 세(世)는 진리를 은폐하고 파괴하는 것(有隱覆眞理 可毁壞之義), 속(俗)은 세상과 인정을 따르는 것(有顯現流世 顯現順於人情之義)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속세라는 어감은 욕망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간은 중생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한 토대에서 생사의 애환과 고락의 희비와 더불어 각자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부귀영화를 바라고 취하더라도 허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품고 있는 욕망을 구심점으로 하기 때문에 서로가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진리가 덮이고 파괴될 것이라서, 하나의 시류가 형성되면 생존을 위하여 그 흐름을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에서 벗어난 출가의 이로움을 간단히 말하면 오로지 일심으로 수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탐욕과 애정에 얽힌 세속(家是貪愛繫縛所)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出家人自行歸返俗家生活者 稱爲歸俗). 

환속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퇴타심(退墮, 물러남)이 생겨서 그렇다고 합니다. 즉 불도의 수행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출가 전에 익힌 것을 그리워하거나 세속적인 것을 새로이 배워서 그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교육이나 포교와 같은 분명한 기준을 세운다면 서로가 안심하고 이로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수행으로 승화시킨다면 애착의 굴레에서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마치 <화엄경>에 평등심으로 난승지에 들고 주하는 보살(菩薩以是十平等心 得入第五地 菩薩住難勝地)처럼 말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이미 집착을 내려놓은 상태라서 그에 따른 세속적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世法所不染 如蓮華在水).

[불교신문3241호/2016년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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