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골기암 한 조각 남긴 염불승

 

軒七尺身 頭圓鼻直

眉롰目紺 口方耳長

而聲音淸越 人幸而見之者

善心自生 一夫稱之

衆人聞之 好善者

遐邇應之 所著方袍

雖與儒冠不同 所貴在乎德也

老宿之儀範 其如此

其餘異行怪 光多有之

恐本心明鏡中影 不必書之

 

“위풍이 당당하고 몸은 칠 척이며 이마는 둥글고 코는 곧다/ 풍부한 눈썹에 눈은 검푸르고 입은 반듯하고 귀는 길다.// 음성은 맑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그를 보고/ 착한 마음을 스스로 내어 한 사람이 그를 칭찬하면/ 많은 사람들이 듣고 좋고 좋다고 하였다.// 유생들과 함께하였으나 같이하지는 않아 귀함이 있고 덕스럽다.// 스님의 위의와 규범이 이러하며/ 그의 나머지 기이한 행도 많다.// 한갓 마음의 명경 가운데 그림자를 꼭 적어놓을 필요는 없다.”

 

해봉스님이 묘사한 화적두일(和寂斗一, 1702~1775)스님의 모습과 성품으로 <호은집>의 화적출서문(和寂出瑞文)에 실려 있다. 이 글은 비록 화적스님의 영찬은 아니지만 내용에서 현재 해인사 국일암 벽암당에 모셔진 진영 속 화적스님을 위한 찬문이라 해도 무방하다.

화적출서문은 스님의 이적(異蹟)을 제목으로 삼고 있으나 전체 내용은 행장에 가깝다. 강릉 출신인 스님은 어린 나이에 보현사(普賢寺)의 신원(信元)스님에게 출가해 서산스님의 6세손인 봉암국평(鳳岩國萍)스님의 묘결을 듣고 법맥을 계승했다. 현전하는 승보(僧譜)에는 두 스님에 관한 기록이 없기에 어찌 보면 해봉스님의 글이 두 스님에 관한 유일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화적스님은 평소 구름처럼 명산을 자적(自適)하며 염불에 힘썼고 가야산 중봉암(中峯庵)에서 좌탈했다. 이적 후 대중들이 절차를 갖춰 다비를 치렀는데 불이 사그라질 무렵 손가락 한마디 크기에 자색이 도는 정골(頂骨) 한 조각이 기암(奇巖)으로 솟아올랐다. 해봉스님은 이 정골이야말로 화적스님이 평생 수도한 힘이라 감탄하며 이 상서로움을 각 사찰 스님들에게 알려 많은 이들이 선심(善心)을 일으키길 바랐다.

다비 후 문인들은 국일암 인근에 스님의 정골을 모신 승탑을 세웠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784년 12월, 문도인 화승 관허설훈(寬虛雪訓)스님은 마음을 내어 진영을 제작했다. 관허스님은 해봉스님의 글처럼 스님의 얼굴을 묘사하는 한편 선객(禪客)의 납의를 입은 모습을 그려 수행자의 삶을 살다 간 화적스님을 표현했다.

[불교신문3234호/2016년9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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