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후회와 두려움만 남아

생로병사 속에서 행하는 업

생사 모습마저 그를 따르고

목숨이란 호흡 사이에 있어

한 호흡만 멈추면 곧 내생 … 

우리의 일생을 생로병사(生老病死) 네 단계로 나누기도 합니다. 이를 달리 네 가지 고통(四苦)이라고도 하는데 생은 출생(出生), 노는 노쇠(老衰), 병은 병환(病患), 사는 죽음(死亡)입니다. 누구나 이 과정 속에서 있지만 어떤 사람은 선행을 주로 닦고 어떤 사람은 악행을 자주 저지릅니다. 선행이나 악행 모두 업(行爲)으로써 자신의 현재 모습은 그러한 행위(業)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금의 자신을 보면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위산대원선사가 쓴 글의 상황이라면 한탄스럽기까지 할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병으로 누우니 병석의 온갖 고통이 얽혀서 핍박함에 조석으로 헤아려 생각해 보면 마음속이 혼란하고 앞길이 망망하여 (죽은 후에)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한다. 이로부터 비로소 허물을 뉘우치지만 목말라 샘 파는 격이니 어찌 하겠는가. 일찍이 수행하지 않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여러 가지 과오와 허물 많은 것을 한탄하며 죽음에 임해서는 몸부림치며 두려워 어찌할 줄 모른다(一朝臥疾 在牀衆苦 榮纏逼迫 曉夕思忖 心裡릓惶 前路茫茫 未知何往 從玆 始知悔過 臨渴掘井 奚爲 自恨早不預修 年晩多諸過咎 臨行揮샅 怖惶).”

출생하는 순간 노병사의 틀을 벗어나 숨을 곳은 없습니다. 이를 부정하든 안하든 그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업(행위)이라는 말로 묶어서 설명하지만 모두 똑같지 않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정황도 달라서 네 가지(四種死)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목숨은 다하였으나 재물이 남아 있는 죽음입니다(壽盡財不盡死). 단명이라 미처 적선하여 복을 짓지 못하고 그저 생활을 위하여 재물 모을 줄만 알아 그 수명이 다하였을 때 많은 재물만 남기는 경우입니다. 둘째 재물은 이미 소진하였으나 수명이 남은 상태에 죽음(財盡壽不盡死)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생계를 잘 경영하지 못하여 적은 재물에 수명이 남았는데 재물을 다 써버려서 혹 굶어 죽거나 추위로 고통 받다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입니다. 셋째 수명도 다하고 재물도 다한 죽음(壽盡財盡死)입니다. 단명의 업을 짓거나 재물을 경영하는데 능숙하지 못하여 수명도 다하고 그 재물도 다한 경우입니다. 넷째 목숨도 다하지 않았고 재물도 다하지 않은 죽음(壽不盡財不盡死)입니다. 장수할 업을 짓고 재물 경영도 잘하여 재물도 다하지 않고 수명도 다하지 않았으나 다른 인연으로 홀연히 횡사하는 경우입니다.

<사십이장경>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느냐?” 제가가 대답하였다.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도에 능하지 못하다.” 다시 제자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느냐?” “밥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너도 도에 능하지 못하다.” 다시 제자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느냐?” “숨 쉬는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너는 도를 닦는 이라고 할 수 있다(佛問諸沙門 人命在幾間 對曰 在數日間 佛言子未能爲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 在飯食間 佛言子未能爲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之間 佛言善哉 子可謂爲道者矣).”

생로병사가 기계처럼 진행되더라도 길고 짧음은 각자의 행위(업)를 따라 달라집니다. 달리 말해서 개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 단계를 거치는 기간이 다르므로 수명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사가 거의 동시에 진행되거나 생로병사의 단계를 차례대로 거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에서 곧장 ‘사’로 내지는 ‘노’나 ‘병’을 건너뛰고 ‘사’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연히 단명과 장수의 차이가 생기는 것으로 무상하고 신속한 생사의 가르침에서 관심 가져야 할 것은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까지입니다. 위산대원선사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몸은 사대(四大)를 부지하였으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지는 까닭에 무상하게 늙고 병드는 것이 (나와) 더불어 기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침에 있다가도 저녁에 없어지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찰나에 숨을 돌리면 곧 내생(來生)인데 어찌 편안히 있으면서 헛되게 지낼 수 있겠는가(四大扶持 常相違背 無常老病 不與人期 朝存夕亡 刹那異世 (略) 念念迅速, 一刹那間, 轉息卽是來生, 何乃晏然空過).”

[불교신문3233호/2016년9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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