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가람 원형복원과 기능복원한 점 주목”

양양 낙산사 주지를 역임했던 무문스님은 ‘낙산사 복원불사 연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스님은 2005년 화마로 소실된 낙산사 복원을 계획하고 불사를 회향하기까지 과정은 물론 복원불사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고찰했다. 스님은 낙산사와 관련된 역사자료나 김홍도의 ‘낙산사도’ 등을 참고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불교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 등을 통해 가람배치의 원형을 찾아냈다.

또 승가, 불자는 물론 강원도와 양양군 등 지역기관과 문화관광부, 문화재청, 산림청 등 정부기관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불사가 진행됐다.

스님은 “이 과정이 사찰의 기능을 복원한 것으로 지역사회 구성원과의 소통 및 화합, 관세음보살의 구세대비행 실천으로 구현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낙산사 불사 당시 세웠던 8가지 지침을 실례로 사찰에서 불사를 할 때 지켜야 할 기본 원칙으로 제시했다.

 

“원효스님, 깨달음 실천 중요하게 인식”

법성스님은 ‘원효의 번뇌론 체계와 일승적 해석’에서 원효스님의 번뇌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찰했다. <대승기신론별기> <이장의>를 중심으로 원효의 번뇌론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과 구조상의 특징을 밝혔다. 또 <이장의> 이후 저술인 <기신론소>의 번뇌론 이해를 출발점으로 <열반종요> <무량수경종요> <금강삼매경론> 등 저술에서 번뇌론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일승적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했다. 법성스님은 원효의 번뇌론이 개인적 수행에 의해 성취된 깨달음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데 있어서 나타나는 장애라는 관점에 의해서 다뤄진다는 점을 파악했다. 스님은 “원효는 번뇌론을 개인이 성취한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해석하고 있다”며 “이것은 <이장의> 이후 원효가 번뇌론 해석에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문제의식이 바로 개인적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피력했다.

 

“절략본, 신라사경으로 스님교재였을 것”

우석스님은 ‘도다이지(東大寺)·쇼쇼인(正倉院) 소장의 절략본 신라화엄사경 연구’를 진행했다. 절략본은 경전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듯이 절략(節略)한 사경을 말한다. 스님은 “도다이지 도서관이나 쇼쇼인에 소장하고 있는 절략본 화엄경 사경본은 신라사경임에도 필사에 관한 기록이 없고 출처를 밝히는 기록마저 없어 국적에 대한 신중한 의견이 있었다”며 “논문에서 신라의 사경으로서 양상과 특징을 찾아내고, 어떤 용도로 사용됐을지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자료가 발견된 도다이지는 나라시대 때 화엄경 강설이 처음 시작됐고, 화엄강회를 개설하고 강설한 강사가 한반도와 관련된 인물이 많다는 점을 토대로, 유학승이 절략본을 일본에 전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 “절략본은 화엄법회에서 강사나 복사자가 교재용으로 사용했거나, 강경할 때, 혹은 강사가 강론을 마치고 다 같이 합송할 때 사용했던 독송용 교재가 될 수 있다”고 피력했다.

 

“소식, 이규모 유마경 능엄경에 주목”

이연 박사는 ‘소식과 이규보의 불교시 비교 연구’에서 송대 문인 소식과 고려 문인 이규보의 불교시에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을 토대로 두 나라의 불교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했다. 소식은 평생 2800여 수의 시를 창작했는데 그 중 500여 수가 불교시다. 이규보도 시 2100여 수 중에 430여 수의 불교시를 썼다.

이 박사는 “소식과 이규보의 불교시에서 선종의 대표적인 경전인 <유마경>과 <능엄경>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소식은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힐의 이미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든 상황과 무진등(無盡燈) 불이(佛二)법문 등 사상을 구현했다”며 “이규보는 <유마경>에서 논술한 공관(空觀) 선열(禪悅) 불이법문 등 사상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소식은 <능엄경> 속 삼무루학의 지혜에 관심을 가졌고, 이규보는 마등가(摩登伽)의 전고로 세속의 일에 대해 경고했다” 지적했다.

 

6~8세기 천축구법승 15명

한중불교 신행 사상에 영향

계미향 박사는 ‘한국 고대의 천축구법승 연구’에서 6세기 전반부터 8세기말 사이 구법순례를 떠난 15명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고 그들이 추구했던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불국기> <송운행기> <대당서역기> 등에 따르면 6세기 겸익, 의신스님, 7세기 아리야발마, 혜엄, 구본, 현격, 현태스님과 두 명의 실명승(失明僧), 혜륜, 현유스님이 구법행에 올랐다.

또 원표스님은 7~8세기, 혜초, 무루, 오진스님은 8세기 천축구법승이다. 이들은 첫째 아직 전래되지 않은 범본 경전을 구해 번역하거나, 전래된 경전 중 오역을 확인하고 수정하고, 둘째 나란다 대학에서 불교사상을 공부하는 것, 셋째 불교성지순례를 위해 길을 나섰다. 일부 스님은 천축 땅을 밟지도 못하고 입적했지만,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 화엄사상을 널리 알린 원표스님, <왕오천축국전> 저자 혜초스님, 신라왕자 출신으로 서하불교에 영향을 미친 무루스님, 중국인들에 의해 500나한 중 478번째 나한으로 꼽힌 오진스님의 행적이 돋보인다.

 

사리 대신 봉안된 금동불 망자추선 원불

‘한국 석탑 불상 봉안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분희 불교중앙박물관 팀장은 석탑에 봉안된 불상의 성격과 특성을 규명했다. 통일신라시대에 등장해 조선후기까지 100여 점에 이르는 석탑 봉안 불상은 불전에 모셔진 불상과는 차이가 있다. 탑에 불상을 봉안한 것은 중국에서 비롯됐는데, 중국의 목탑 내부에 불상을 봉안하고 예불할 수 있는 형식이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사리공에 불상을 봉안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소수의 불상을 봉안한 것에 비해 고려시대는 탑 여러 곳에 봉안했고, 조선시대에는 탑 내 불상봉안이 크게 유행했는데 아미타신앙에 의해서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탑에 불상을 봉안하는 것은 탑을 부처가 상주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진신사리가 부족한 현실에 사리신앙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극락왕생과 망자추선을 기원하는 한국불교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마디수행이 현대에 필요한 이유

안유숙 박사는 ‘유가사지론의 사마디 수행 연구’를 통해 유가행파의 사마디 수행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이유에 대해 고찰했다. 먼저 <유가사지론>에서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대승불교의 사마디 수행체계가 어떻게 결합됐는지를 확인했다. 작의(作意)와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니밋따와 유사(唯事)개념을 중심으로 <유가사지론>에서 설명하는 사마디 수행의 특징을 고찰했다. 안 박사는 “깊은 사마디 수행에서는 오직 사(事)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육체의 물리적 경계는 감지되지 않으며, 세상과 자신을 분리해 자각하는 인식작용조차 멈추게 된다”고 강조했다. 또 “인식대상의 비실재성에 대한 관점에 비춰보았을 때 고통은 온전히 자신의 왜곡된 사유를 통해 나타난 오염된 니밋따일뿐”이라며 “현대인들은 사마디 수행을 통해 심층의식 속 고통 혹은 상처를 치유하고, 세계가 인드라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불어 사는 삶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불서간행 주도한 유성종 고찰

서수정 박사는 ‘19세기 불서간행과 유성종의 덕신당서목(德新堂書目) 연구’를 진행했다. 혜월거사 유성종(1821~1884)은 보광거사 유운으로도 알려있는데, 월창거사 김대현 문하에서 수학하며 19세기 불서 편찬과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재가자다. <덕신당서목>은 862종 5619권의 불서가 기록된 책 목록이다. 서 박사는 유성종의 활동을 토대로 그가 1850년 무렵부터 1870년까지 대략 20여 년간 불서를 수집해 1870년과 1880년 사이에 <덕신당서목>을 편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책에는 불서 경장류가 369종으로 가장 많고, 중국찬술류가 337종에 달하는데, 중국, 일본찬술류 불서는 정토관련 논서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는 “한국찬술류는 선과 염불 두 가지 수행문에 해당하는 저술이 확인된다”며 “유성종이 정원사(淨願社)와 감로사 결사에서 편찬하고자 한 불서가 선과 정토관련 불서인 점으로 보아 선정일치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지눌스님의 선교일치론 재규명해

정희경 박사는 ‘지눌의 화엄론절요 연구’논문에서 지눌스님의 <화엄론절요>와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경론>의 내용을 비교분석해 지눌스님의 선교일치론을 재규명했다. 정 박사는 “<화엄론절요> 서문에서 밝히듯 지눌은 <신화엄경론>서 선교일치의 도리를 발견했다”며 “그간 학계에서는 <화엄론절요>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원돈성불론>의 단편적인 내용에 의거해 지눌의 선교일치를 논의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눌은 결코 돈오와 점수를 따로 논한 적이 없고, 화엄교학의 성기설과 연기설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자심이 곧 불지(佛智)이자 불과법계(佛果法界)이므로 자심의 일진법계 안에서 먼저 정각한 후 점차 닦아나간다’는 이통현의 논지를 <화엄론절요>에 요약했다. 그는 “이런 ‘자심의 불지, 불과법계에 기반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행원리’가 선이든 교이든 똑같다는 것이 지눌의 선교일치론”이라고 피력했다.

[불교신문3231호/2016년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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