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무로, 흙에서 흙으로’라는 표현으로 무소유정신을 접하곤 한다. 그것은 나 같은 풋내기 소설가를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들이 직업을 물을 때마다 나는 당혹스럽다. 비행기를 탈 때도 직업란을 채우란다. 그때마다 나는 애초부터 글로 밥을 구할 기대를 접은 것에 안도한다. 언젠가 무슨 공모전에 당선소감을 쓰면서 나는 문득 내 직업을 의심했다. 주제넘게도 전업 작가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려던 참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처럼 그저 살아가는 상태일 뿐, 직업이라고 말하기엔 자못 쑥스러웠다.

끼니와 당장의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절대적 빈곤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욕망은 모두 상대적이다. 남과 비교하여 허탈감이 느껴지지만 않으면 된다. 동창생이 새로 뽑은 ‘제네시스’를 보고나서 멀쩡하게 굴러가는 자신의 ‘쏘나타’를 발로 차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상대적 빈곤은 자존감의 문제다. 다행히 소설가의 무소유적 자존을 지켜주는 게 하나 있다. ‘소설가는 작은 신’이라는 명제다. 큰 신이 세상만물을 창조한다면 소설가는 자신의 글 세상에서 만물을 만들어낸다. 등장인물들을 창조해 왕이나 거지로 만들 수도 있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거지를 휘황찬란한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작은 신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무소불휘의 힘을 과시한다. 소유하지 않은 자가 누리는 기쁨이다.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 속에 진실을 담지 못하면 기쁨도 없다. 정치와 역사는 사실을 거짓으로 자주 바꾸지만 소설은 허구 속에서 진실을 캐낸다. 세상의 바닥을 훑어가며 부조리를 고발한다.

공직자 부패가 그칠 줄을 모른다. 사실무근임을 주장하는 자들은 종종 소설을 끌어들인다. 소설 같은 이야기라느니, 언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느니…. 애꿎은 소설이 죄인취급을 받는다. 소설을 모독하지 말라. 시대정신을 불씨처럼 움켜쥔 작은 신들의 자존감을 짓밟지 말라. 미세먼저 폴폴 날리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되는 수도원에서 위로를 얻는다. 절집에서 마음의 오물을 털어내고 영혼을 재충전 한다. 무소유 정신이 살아있는 청정의 공간은 보호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안에서도 오로지 책 대신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는 세상을 원망해본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상상 속에 청정의 공간을 창조한다. 하여, 내 속에서 똬리를 트는 탐욕을 한 번 더 비워낸다. 오늘도 돈 안 되는 소설을 쓴다.

 

[불교신문3225호/2016년8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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