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했다. 30대 초반에 지점장이 됐고, 승진도 빨라서 40대 초반에는 모 기관의 기관장이 됐다. 이곳저곳에서 줄을 대려고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동생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다.

동생은 사업 실패로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됐다. 어릴 때부터 안쓰러웠던 동생이었는지라 내가 빚을 대신 감당했고, 그때부터 고통은 내 몫이 되었다. 2년 반 정도, 지옥에서 살았다. 자실 시도를 두어 차례 해봤지만 목숨은 질겼다. 마지막 인사랍시고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무것도 모로는 아이들은 아버지가 낮에 전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 그게 진짜 괴로움이란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돈을 다 갚았다. 재산을 다 잃었지만, 그것보다 힘든 것은 평생 쌓아 올린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일순간에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억울했고 미웠다. 그때부터 날마다 새벽예불에 나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한마음선원 현관 셔터가 올라가길 기다렸다. 7년반 동안 안거에도 빠짐없이 동참했다. 그렇게 죽자 살자 ‘주인공’만 잡고 들어갔는데, 아마도 조금은 업장이 녹아지지 않았나 싶다.

비정한 세상에서 받은 아픔을 나는 수행으로 치유했다.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나를 찾아라 나를 찾아라’ 하고 말한다. 그때의 ‘나’란 말할 것도 없이 ‘참나’를 가리킨다. ‘참나’란 현재의 나를 이끌어가는 근본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주인공(主人空)이라는 용어를 주로 쓰고 있다. 내 주인공 부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서 참된 수행이 시작된다.
일체 경계를 주인공에 되돌려 나의 아상(我相)을 통째로 내려놓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일체 경계가 주인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자기 능력으로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급박한 경우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었으면 그 믿는 자리에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맡겨야 한다. “주인공! 당신이 나를 만들었으니 당신이 알아서 해!”

자리에 틀고 앉아있어야만 참선은 아니다. 참선이 잘 되지 않는다는 도반들에게 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내 마음 속에 부처님께로 이어지는 주인공이란 이름의 우체통이 있다. 그 우체통에 편지를 닥치는대로 넣으면 반드시 배달이 되고 답장이 온다”라고. 그렇게 믿고 맡기고 답장이 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관(觀)이다. 이렇게 ‘참나’가 발현되고 ‘참나’를 증득하는 날까지 온전하게 정진하며 정진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죽기 위해 산다. 

[불교신문3222호/2016년7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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