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와 친구를 평등하게 대할 수 있을까?

‘욕망’으로 인한 증오와 사랑으로

원수와 재회하고 친구와 이별하니

 

욕망이 부르는 ‘악순환’ 끊으려면

원한과 집착 없는 평등심으로 생활 

“두 가지 법은 세상 사람들이 버리는 것이다(世人所捐棄).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것과(怨憎共會)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다(恩愛別離). 이것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世人所不喜). 다시 두 가지 법은 세상 사람들이 버리지 않는 것이다(世人所不棄). 미워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과(怨憎別離) 사랑하는 이와 한 곳에 모이는 것이다(恩愛集一處). 이것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이다(世人之所喜).”

<증일아함경> 선지식품을 간추린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미워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을 원증회고(怨憎會苦)라 합니다. 좋아하지 않는 대상과 몸이나 마음이 회합(會合)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고통으로써 <불설오왕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이 원수와 미운 이를 만나는 괴로움인가? 세상 사람들은 인색한 풍속에서 함께 애욕을 구하고 살면서 서로 싸우며 급박하지 않은 일에도 서로 죽여 드디어 큰 원수가 되나니, 서로 피하려 해도 숨을 곳이 없다. 서로 칼을 갈고 살촉을 갈며, 활을 끼고 몽둥이를 지니며 만날까 두려워하다가 우연히 좁은 길에서 만나면 활을 꺼내 화살을 겨누며 두 칼은 서로를 향하여,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를 알지 못하나니 그때를 당하면 두렵기가 한량이 없다(何謂怨憎會苦 世人薄俗 共居愛欲之中 共諍不急之事 更相殺害 遂成大怨 各自相避 隱藏無地 各磨刀錯箭挾弓持杖 恐畏相見 會遇迮道相逢 各自張弓注箭 兩刀相向 不知勝負是誰 當爾之時 怖畏無量 此是苦不).”

경박한 중생이 하필이면 애욕을 두고 함께 함으로 다툼이 일어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마치 약육강식의 구조에서 욕망으로 서로 갈등하고 분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싫어서 혼자 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좋은 사람과 함께 하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알콩달콩 살고 싶으나 헤어지는 애별리고(愛別離苦)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이별할 때 느끼는 고통으로 <불설오왕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이 은혜하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인가. 안팎 가족과 형제, 처자가 서로 그리워하다가 하루아침에 패망하여 남에게 노략질과 겁탈을 당하여 뿔뿔이 흩어져, 아버지는 동쪽으로 아들은 서쪽으로 어머니는 남쪽으로 딸은 북쪽으로 갈라져 남의 종이 되고, 각자 슬퍼 부르면 간장이 끊어지며 아득하고 멀어서 서로 만날 기약이 없다(何謂恩愛別苦 室家內外 兄弟妻子 共相戀慕 一朝破亡 爲人抄劫 各自分張 父東子西 母南女北 非唯一處 爲人奴婢 各自悲呼 心內斷絶 窈窈冥冥 無有相見之期 此是苦不).”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도 우리 삶의 한 단면입니다. 대상을 항상 좋아할 수도 그렇다고 영원히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따라 좋아하다가도 미워하면서 웃고 우는 과정에 미운정 고운정 들며 한 평생을 보냅니다. 그 속에는 연인도 있습니다. 상식선에서 이야기한다면 연인이 곧 가족이 되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가족의 사랑’과 ‘연인의 사랑’ 정도인데, 그 미묘함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더라도 ‘사랑(愛)’이 때로는 ‘미움(憎)’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또한 친구가 원수로 바뀌기도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경전에 따르면 모두 욕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욕망으로 인하여 자리매김 되는 ‘원수’나 ‘친구’를 평등하게 대하라는 ‘원친평등(怨親平等)’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원수나 적을 대할 때 증오나 원한을 품지 않으며(對於怨敵 心無憎恨) 사랑하는 것에 집착이 없는(對於所愛 亦無執著) 상태, 즉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 바탕은 자비(慈悲)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원수와 친구를 평등하게 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의 여부는 ‘의문’이 아니라 ‘의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서력 722년(開元十年)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경덕전등록>에 전하고 있습니다. 육조 혜능선사 입적 후 그의 머리(首)를 몰래 모시려 법구를 훼손한 도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를 붙잡은 관리는 곧바로 형벌을 가하지 않고 먼저 선사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처단할까?” 하고 의향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문도인 영도선사는 “국법으로 논하면 사형이 마땅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로써 원수와 친함이 평등합니다. 다만 선사를 모시려고 그러한 것이니 죄를 용서해 주소서(若以國法論理須誅夷 但以佛敎慈悲冤親平等 况彼求欲供養罪可恕矣)” 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신문3213호/2016년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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