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하심(下心)이다. 아무리 수행기간이 길고 승직이 높아도 하심이 안됐다면 탐진치를 줄이지 못한 ‘가짜도인’으로 의심받는다. 하심은 수행의 성취정도를 재는 잣대다. <금강경>은 아상(我相)을 버리지 못하면 무상정등각은 십만팔천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자들에게 특단의 방법으로 겸손을 가르친다. 삼의일발로 욕심을 줄이고 걸식을 해서 연명을 하라는 것이다. 수행자를 ‘걸사(乞士)’라고 하는 이유도 거만하지 말고 자기를 낮추라는 의미다.

총림의 미담을 기록한 <인천보감>에 나오는 기(頎)선사의 일화도 새겨둘만하다. 오랫동안 큰절 주지를 하며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던 스님은 어느 날 뜻밖에도 난치성 피부병에 걸렸다. 그러자 고향 용성으로 돌아가 작은 암자를 짓고 조용히 살았다. 스님에게는 극자(克慈)라는 선림에서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그는 평생 걸식을 해가며 스승을 모셨다. 스님은 열반하기 전 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천성사 호태스님에게 출가한 이래 황룡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다. 이후 30여 년간 흥국사 주지를 하며 살았다. 이런 몹쓸 병에 걸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다행히 그 죄 값을 다 갚았다. 옛날 사람들은 몹쓸 병으로 도리어 도를 얻었으니, 허유(許由)와 소부(巢父)의 풍모를 마음에 품었기에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나도 이 몹쓸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이제야 자유를 얻게 되었다.”

요컨대 난치성 피부병 덕분에 하심하고 도를 닦아 생사의 그물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읽다보면 잘난 사람일수록 약점이나 허물하나쯤 가지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남 앞에서 건방 떠는 짓을 삼가고 겸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속담에 ‘골골 80’이라는 말이 있다. 건강한 사람은 잘난 척 함부로 살다가 쉽게 고꾸라지지만 잔병치레하는 사람은 조심하면서 80세까지 산다는 것이다. 매사에 하심하면 손해 볼 게 없다는 뜻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싶다.

[불교신문3142호/2015년10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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