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대원성 보살 70년

불자로 살아온 삶의 기록

 

 

아직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스님들이 지방을 가면 신도집에 들러 하룻밤 묵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부산 온천장 인근에 살고 있는 이정옥(법명 대원성) 보살의 집도 많은 스님들이 찾았다. 종정을 지낸 고암스님을 비롯해 일타스님, 혜암스님, 지관스님 등과 인연이 깊었다. 부산불교신도회 부회장으로 16년간 활동하면서 청심장학회를 만들고, 연꽃모임을 창립하는 등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해온 대원성 보살이 칠순을 넘겨 수필집 <바라밀 일기>와 시집 <누가 허공을 비었다 했는가>를 펴냈다. 70년 신행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두 권의 책이다.

 

현대불교신문에 연재한 ‘바라밀 일기’를 엮은 이 책은 근대 부산불교의 역사기록이기도 하다. 신심 깊은 불자 집안서 태어난 대원성 보살은 젊어서 출가를 위해 집을 나왔다. “신심 깊은 아버님이었지만, 출가를 극구 만류하셨어요. 몇 달만에 다시 집에 오면서 ‘마을에 살지만 스님들처럼 포교하며 살겠습니다’ 맹세를 했어요. 부족한 것이 없진 않지만 그 말대로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지난 7일 만난 대원성 보살은 “부족한 글이지만,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위안을 찾고 신심을 내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허공이 비었다고 누가 말했나/ 천지만물을 다 품어/ 부모의 품과 같은 넉넉함으로/ 뭍 생명들을 다 살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내 형제자매와도 같은 것/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피와도 같고/ 살과도 같은 많은 생명들을/ 부지런히도 살생하고 살았구나/ 늙어 죽어 갈 이 한 몸을 살리려고.”(허공이 비었다고 누가 말했나) 시집 글 한편 한편마다 부처님을 향하고, 가르침을 체험한 느낌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지난 7일 만난 이정옥 대원성 보살이 불교와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원성 보살이 결혼을 해 연년생 자녀를 두었다. 하루는 고암스님과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이 있어 세 아이를 업고, 안고, 손에 잡고 갔다. 하지만 버스를 몇 번 갈아타다보니 그만 마지막 기차 시간에 늦고 말았다. 그런데 고암스님이 마지막 기차를 포기하고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약속에 늦은 것을 질타하기보다 오히려 힘들게 왔다고 위로해 주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대원성 보살은 일타스님과의 일화도 전했다.

한번은 일타스님과 함께 방생법회를 갔다. 좋은 물고기를 고르느라 이것저것을 살피는데 스님이 “저 다라의 고기 전부 주세요”하는게 아닌가. “몇몇 고기들은 금세 죽을 것 같은데 왜 다 사세요?” 묻자 스님은 “죽고 사는 것은 자기의 문제이고, 살려주는 마음은 평등해야 한다”는 말이 지금까지 대원성 보살의 좌우명으로 남았단다.

대원성 보살에게 아쉬웠던 점을 물었다. 답은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집에 스님이나 손님이 오면 꼭 국이랑 밥을 새로 지어 드렸어요. 손님이 자주 오다보니 남편이랑 저는 늘 남은 음식을 먹게 됐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아무 말없이 따라준 남편에게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

<바라밀 일기>에는 큰스님의 인연이야기를 비롯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손자손녀 이야기 등 삶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교육자였던 남편과 사이에 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은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다. 수필 한편 한편에서 1970~90년대 우리네 삶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름보다 법명으로 더 잘 알려진 대원성 보살은 “다른 사람에게 생활이 곧 불교여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불교가 곧 생활이었다”고 회고했다.

[불교신문3121호/2015년7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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