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옥 경남여의사회장의 네팔 구호활동기

■ 4월 27일 월요일 - 출발 전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네팔에 가 있었습니다. 토요일 언양 관자재병원에 저녁 9시경 간암 말기 환자를 하늘나라로 잘 보내고 나서 네팔 지진 소식을 들었습니다. 3층 당직실에 올라가서 뜬눈으로 지새우고 일요일 네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보니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봉사단체 여러 곳을 전화하여 같이 갈 팀을 수소문 하였습니다. 조계종 종단에 연락하니 이미 팀이 다 짜져 갈수가 없다고 하기에 사비로 가고 싶다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열린의사회도 아직은 미정이라 그러던 중 대한의사회 응급대책위원장이신 박양동 회장님이 이미 전화가 와서 대한의사회 선발대로 가주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남편에게 먼저 물어보겠지만 일단 추진하라고 말했습니다. 대한항공 네팔비행기가 금요일 뜨니까 약품준비를 3일 동안에 다해야하므로 병원직원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응급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가족에게 가서 동의를 구했습니다. 엄마가 10년간 1년에 두 번씩 그들이 편안할 때 소풍삼아 의료봉사를 가서 그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 친구 이웃들이 자연의 재난으로 전쟁터와 같은 위험에 처해있어 생명을 다투는 진짜 위험한 시기에 의료봉사를 가지 않는다면 지금껏 한 의료봉사는 가식이며 앞우로 더 갈 이유도 없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가장 절실한 의료봉사이므로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아들 둘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조심해서 갔다 오기위해 엄마 올 때까지 108배를 하면서 기도해준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반대도 하지 않고 허락도 하지 않고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있더군요. 잘 다녀올 수 있도록 남편의 주력 다라니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열심히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사히 잘 다녀와서 이런 글을 적을 수 있는 것은 우리 가족과 108자비손 이웃들의 기도 덕이라 생각합니다.

■ 5월1일 금요일 - 봉사 첫날

전날 밤차로 진주에서 출발해 인천공항에서 4시간 정도 새우잠을 잤습니다. 의약품 짐이 많아 일찍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도와주는 분들이 많아 500kg 되는 가방 22개 되는 짐이 무사히 공항을 통과했습니다. 카트만두 공항에 내려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모였더군요. 일본봉사팀은 무사답게 절도 있고 조용한 행동이 눈에 띄었습니다. 중국과 한국팀은 시끄러운 것이 딱 표가 나더군요.

공항을 빠져나와 파괴된 유적지를 보니 눈물이 나더군요. 관광으로 먹고사는 이 나라가 유적이 파괴되어 장래 일도 걱정이고 온 인류의 문화유적인 파탄, 박타푸르의 유적도 파괴되었습니다. 운전기사 집도 파괴되어 지금은 천막에서 살고 있고, 돌마와 싼티의 집도 금이 가서 불안해 천막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파수파티 화장터는 시체가 넘쳐 강 옆의 임시화장막에서 여러 구의 시체를 한꺼번에 화장을 하는 비극이 연출돼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도 크다고 합니다.

지진이 난 지 일주일째라 카트만두 인구의 3분의 1이 빠져나간 상태이고 지금 남은 사람 대부분은 오갈 때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라 그 암울함과 불안함이 더 큰 상태였는데, 외국에서 봉사팀과 물자가 들어오는 도움을 보면서 약간의 안심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도착한 그 날도 흔들리는 여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5월 2일 토요일 - 봉사 2일째

피해상황이 가장 큰 에베레스트 산 쪽의 신두팔촉의 초드라로 의료봉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대한의사회 선발팀은 네팔의 틸강가 안과병원의 닥터 루이트와 연계를 가지고 봉사일정을 정했습니다. 닥터 루이트는 65세의 의사로서 한국의 장기려 박사라 할 만큼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안과수술을 무료로 해주고 있으며, 몇 년 전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네팔의 대표 의사라고 소개받았습니다. 그 분의 소개로 신두팔촉에 있는 로컬 시립병원과 연계하여 봉사활동을 펼치기로 하고 아침 5시에 출발하여 6시간에 걸쳐 갔습니다.

길가는 곳곳에 건물이 파괴되고 절망과 암담한 표정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신두발촉의 병원도 금이 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 속에 있는 상황이라 진료를 할 수가 없었고 그곳의 네팔 의사들이 이미 운동장 같은 공터에 진료소를 설치하여 일주일간 진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수술을 요하는 환자는 헬기로 이미 카트만두 병원으로 옮긴 상태이고 외상환자와 차가 접근하지 못하는 외진 곳에 있는 환자를 헬기로 싣고 와서 응급처치 후에 카트만두 병원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마에 깊은 상처가 난 소녀를 보고 눈물이 나더군요. 아마 가족과 집을 잃은 아픔 때문인지 뼈가 보일만큼의 깊은 상처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담담한 표정의 소녀를 보는 우리의 마음이 더 찢어졌습니다. 척추손상을 입은 환자가 벌거벗은 채 텐트 속에 있고 팔과 다리, 머리 손상을 입은 환자들은 천막 속에 가득했습니다.

우리 한국의사가 치료하는 것보다 네팔 의사들이 치료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하여 우리가 준비해간 의약품을 3분의 1 정도 주었습니다. 많은 의약품이 후원으로 들어왔지만 공항으로 들어와서 공무원의 승인을 받고 현장까지 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중간에 사라질 대량의 물건을 생각하면 이렇게 직접 의약품을 현장에 전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도움이라 생각됩니다. 큰 천막에는 가족과 아픈 사람들이 섞여 있고 부서진 관공서 옆 마당 큰나무 밑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 아무 말 없이 앉아있기만 하였습니다.

많은 가족이 사고를 당해 혼자 있기 불안하고 아직도 여진의 공포 속에서 같이 모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과 배고픔의 눈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공항에 내릴 때 구호물자와 먹을 음식이 많이 들어 왔는데,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수백 명이 모여 있는 공터의 큰 천막 옆에 달랑 큰 솥 두개가 전부였습니다. 일주일까지는 구조와 의약품이 필요하고 2주째부터는 주거할 수 있는 천막과 먹을 수 있는 물과 음식 그리고 옷 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신두팔촉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멜랑지의 피해가 심하다해 갔더니 네팔 군인캠프에 이미 폴란드 의료팀이 자리를 잡고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가 파괴되어 접근하기 어려운 산속의 환자들을 헬기로 실어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팀이 모자라는 의약품을 전달하고자 한다고 했더니 자기들 나라에서 풍족하게 가져와서 도움이 필요 없다며 캠프 안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때 배가 부른 산모가 헬기로 실려 왔습니다. 일주일 전 손상을 받아 배도 아프고 불안한 산모를 치료할만한 의사와 기구가 없기에 무척 당황한 상황이 왔습니다. 그때 우리 팀의 정태기 원장이 저를 소개하면서 산부인과 의사이고 포터블 초음파를 가지고 있어 태아건강을 체크할 수 있다고 했더니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료를 허락하더군요.

권현옥 경남여의사회장이 임산부의 뱃속 아기가 안전한지 초음파기기를 이용해 확인하고 있다.

산모를 우선 안심시키고 전기선을 연결하는 동안 폴란드 의료진에게 수액을 연결하라고 지시하고 통역을 통해 내가 산부인과 의사고 아기의 건강을 지켜주겠다고 안심시킨 후 초음파로 태아를 검사했습니다. 문진을 해보니 일주일 전에 사고 때 배가 부딪혔고 그 뒤로 양수가 흐르는 느낌도 있고 아기가 움직이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첫 아이 출산 후 6년 만에 어렵게 임신하게 돼 본인의 건강보다 태아의 건강이 더 걱정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 혹시나 태아가 배 안에서 사망을 했으면 어쩌나 싶어 저도 긴장하면서 태아의 심장소리를 찾았습니다. 초음파로 터지는 태아의 심장소리에 폴란드 의료진과 네팔 산모, 한국의료진 모두가 환호성을 터트렸습니다. 산모가 성별을 묻기에 아들이라 가르쳐 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더군요. 산모가 굶게 되면 태아도 배가 고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태동을 느끼지 못하므로 산모는 태아의 건강을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수액과 제가 준 사탕을 먹자 태아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산모도 긴장이 풀리면서 태동을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사인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비오는 어둠 속에서 다시 헬기를 타고 카트만두 병원으로 가는데 2시간 넘게 걸리다 보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 내일 아침에 옮겨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해주어 안심시켰습니다. 들어갈 때는 별로 반기지 않았던 폴란드 의료팀이 돌아갈 때는 손을 흔들며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500만원어치의 의약품보다 30분의 포터블초음파의 위력이 더 큰 역할을 해낸 셈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세 번째 캠프가 세워진 멜랑지 로컬병원에 의약품이 부족하다해 갔습니다. 일본 의료팀이 10명이 와서 병원 팻말과 함께 일본국기와 일본의료팀이라는 표시를 해놓았더군요. 한발 늦은 우리 한국 의료팀의 대응이 아쉬웠습니다. 치료하는 환자들이 있었고 네팔의사들에게 의약품을 전해주었더니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새벽 5시 출발해 저녁 8시경 어둑할 때 빠져나오는 길에 트럭 20대가 식량을 가득 싣고 신두팔촉으로 향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통역을 맡은 돌마 씨에 의하면 이 트럭은 네팔과 인도 국경에서 온 것인데 네팔 사람이 90%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동포애로 이렇게 보낸 것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굶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늦은 밤에 올라가는 트럭을 보면서 세계의 사랑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5월 3일 일요일 - 봉사 3일째

신두팔촉과 멜랑지에서 의약품 전달로 의료봉사를 대신했고 앞으로의 의료봉사 진로를 위해 현지상황을 알기 위해 UN에 들렀습니다. 코이카 회원인 세 명의 젊은 한국인을 만났는데 신선하고 밝은 이미지가 한국의 장래를 말해주는 듯해 자랑스러웠습니다.

UN의 보고는 의약품과 의료품보다는 천막, 먹을거리 등이 더 필요하고 앞으로 갈수록 2차 감염과 영양결핍으로 인한 장기대책을 세워야하며, 부서진 학교와 병원 등을 재건설할 후원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한국팀은 봉사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틸강가 병원의 닥터 로이트를 만났습니다. 2차 팀과 함께 다음 봉사에 동행하기로 하고 내일은 조금 떨어진 다딩이라는 곳으로 실정을 알기 위해 가기로 했습니다.

다딩 로컬병원에서 만난 산모와 아기. 네팔의 부처님오신날인 음력 4월15일에 태어났다.

■ 5월4일 월요일 - 봉사 4일째

다딩 로컬병원은 손상이 덜 되어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네팔 의사도 많고 다른 나라의 의사들도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약품을 보충해주고 병원을 안내받다가 산모들이 있는 분만실을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네팔 달력으로 음력 4월 15일인 부처님오신날이었습니다.

분만실에 방금 태어난 아기와 산모, 그리고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임산부 두 분이 있더군요. 부처님께서 태어난 날에 선물을 하고 싶어 임산부 두 분에게 아이 옷을 주고, 산모 건강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고 그 병실에 있는 많은 환자들에게 비스킷을 선물했습니다. 슬픔 속에 잠시 웃는 그들의 환한 미소를 보았습니다.

■ 5월 5일 화요일 - 봉사 5일째

지진의 피해가 가장 큰 신두팔촉, 멜랑지, 다딩, 박타푸르 네 곳을 둘러본 결과, 의료봉사는 이미 많은 나라에서 지원하고 있어 시기적으로 조금 늦은 상태이므로 의약품 키트와 음식, 천막, 생수 등의 구호품 지원이 가장 시급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래서 2차 팀은 의료팀이 오는 대신에 응급세트 1000세트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비행기 운항 사정상 2차 팀이 5월 8일 들어오는 까닭에 그 사이 시간이 있어 룸비니 쪽으로 지진피해를 알아보기 위해서 가기로 했습니다. 룸비니에 마이트리아 스님과 동생 분을 만나 생생한 지진 피해현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님은 당시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는데 건물 밖에서 들리는 지진 소리가 불도저로 땅을 미는 굉음과 함께 바닥이 파도처럼 꿈틀거렸다고 전하며 그렇게 무서운 공포는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 몰려드는 환자들로 병원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됐고, 다리와 머리를 다쳐도 복도와 응급실 밖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수습이 되어 두 분은 룸비니에 있는 IBS 무료병원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IBS 무료병원은 라오스 불자들이 세워준 병원으로 세계의 많은 불자 의사들이 의료봉사를 오는 곳입니다.

룸비니에 위치한 IBS무료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네팔 주민들.

그렇지만 약은 항상 부족해 역할을 다 못하고 있는데 제가 봉사를 가면 2~3일 사이에 1000명 이상의 환자들을 진료하게 됩니다. 우리 ‘108자비손’ 의료팀은 좋은 약과 영양제를 충분히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최근까지 근무하던 프랑스 산부인과 의사가 지진이 나자 3일 전에 출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곳에 왜 왔냐고 마이트리아 스님의 동생인 아니가 걱정을 하더군요. 친구가 아픈데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냐고 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했습니다.

카트만두의 지진으로 인해 네팔의 경제전체가 어려워져 룸비니 성지에도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아 하루에 3명을 태워야 밥을 먹고사는 릭샤 아저씨도 힘들고 병원의 후원금도 줄어 직원들의 월급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카트만두에 있는 스님 절이 부서지고 동생이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한 상태라 몸과 마음이 약해져있었습니다.

평상시 그렇게 당당하고 열정적인 마이트리아 스님이 자기가 죽으면 이 무료병원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모습에 나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제가 능력은 미약하지만 한국의 불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병원이 꼭 유지되도록 부처님의 가피를 빌겠다는 약속을 하고 후원금을 드리고 왔습니다.

무료병원에서 의약품이 많이 모자라 우리에게 남은 의약품을 주었더니 의사들이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더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재난 당한 곳보다 재난의 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남부 쪽의 피해가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그 여파는 아주 심각합니다. 매년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전 세계 불자와 네팔 대통령까지 와서 성대하게 치렀는데, 올해는 간소히 하고 지진피해자를 돕는 행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지진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지순례를 온 방글라데시인 50명이 카트만두의 타멜 거리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 무너지면서 산채로 묻혔다고 합니다. 룸비니에 있는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삼동스쿨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비스킷과 의약품을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의 환한 미소가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습니다.

랑그랑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권현옥 회장.

■ 5월 6일 수요일 - 봉사 6일째

부처님 생사리를 2000년간 모셔온 랑그랑은 모든 성지 중에서 가장 열악한 곳입니다. 지난 2월 10차 봉사 때 너무 많은 환자가 몰려와 제대로 봉사를 하지 못해 한국에 와서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 이번에 하루 시간을 내서 랑그랑 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봉사는 질서가 그런대로 잡혀졌습니다. 끝까지 봉사를 해준다는 약속을 지켜서인지 많은 환자가 몰려와도 줄을 지키더군요.

랑그랑 부처님 사리탑 앞에 일본 절이 하나 세워져있습니다. 시설이 잘 갖추어져있기에 그곳에서 의료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여름철이라 피부병과 염증, 관절염 환자가 많았고 진짜로 약이 필요한 기관지염, 폐렴, 감기 등의 호흡기 질환 환자들도 많았습니다. 여성들의 영양을 위해 칼슘, 비타민 등 선별해서 주고 연고, 파스는 상비약으로 나눠줬습니다.

여성 장애인 세 사람을 만나게 됐습니다. 힌두교나 이슬람에서 장애는 자신의 전생 업으로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애인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심하게 구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폭력이 있는 곳이기에 여성 장애인들은 그 피해도 더 많다고 합니다. 3살 된 아디티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눈에 지방종이 있어 한쪽 눈이 실명하는 상황이 올 수 있을 것 같아 이장님과 아디티 부모님을 불러 수술비를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10살 모니사는 엄마가 임신 중에 불순물이나 영양부족으로 인해 손과 발가락이 두 개뿐인 기형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5년 동안 장학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르밀라는 눈에 종양이 있는 15살 아이인데 2월 10차 진료 때도 왔었습니다.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어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그래도 찾아왔더군요. 그래서 제가 갖고 있던 핀과 청진기가 들어있던 예쁜 가방을 선물로 주었더니 매우 좋아하더군요.

사르밀라에게도 장학금을 주면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위로해줬습니다. 랑그랑에서 500명을 진료한 것보다 장애아동 3명을 후원한 것이 더 큰 선물이며 그들에게도 사랑의 큰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이 3명의 장애아동들이 받은 작은 사랑은 그들이 살아가면서 큰 용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나라에 지진이라는 자연재해와 경제적 위기가 전국을 뒤덮어도 사람들의 선한 눈빛과 나누고자 하는 작은 정은 참으로 눈물 나게 아름다웠습니다. 룸비니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룸비니의 여러 절에서도 카트만두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후원의 손길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번 마야데비 사원 부처님오신날의 행사는 평상시의 행사보다 훨씬 축소해 간단하게 치렀다고 합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젖어있기에 행사를 작게 치르고 재난 피해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쳤다고 합니다.

눈 기형 장애를 안고 태어난 소녀들과 함께 한 권 회장. 이들의 후견인으로서 장학금을 전달했다.

■ 5월 7일 목요일 - 봉사 7일째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길에 네팔의 가장 자랑스러운 다라하라 탑과 보다나트 탑이 무너진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일 들어오는 대한의사협회 응급의료팀 2진은 네팔에 처음 오는 것이라 1차 봉사와 연결되려면 한사람이 남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네팔의 실정을 알면 알수록 제 아픔은 더욱 커지는 것 같아 2진이 오면 4일간 더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 5월 8일 금요일 - 봉사 8일째

2차 봉사 계획을 짜기 위해 틸강가 병원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신두팔촉보다 더 오지인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까르띠까는 산 속에 있기에 도로가 끊겨 차량이 접근하지 못해 아직까지 구호품과 의약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네팔 틸강가 병원 의료팀과 한국 대한의사회 2진과 미국 의사, 싱가폴 기자팀 등으로 다국적 팀을 결성해 5월 10일 가기로 했습니다.

그곳은 지금도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인데다 비가 조금만 와도 건물이나 흙이 무너져 일반차로는 가기가 어려워 트럭과 4륜구동 차량만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갈 수 있는 차를 구하는데 하루가 걸린다고 합니다.

닥터 루이트와 회의를 마치고 약간의 시간이 있어 5월 6일 랑그랑 의료봉사 이야기를 하면서 눈에 기형이 있는 아이 두 명의 이야기를 잠시 드렸습니다. 그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 아이들의 수술을 해주고 싶어 한국에서 후원자를 구해보겠다고 하니 닥터 루이트가 무료로 수술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닥터 루이트는 티베트 출신으로 불교신자입니다.

네팔 지진 재해로 닥터 루이트를 만났고 랑그랑 봉사를 한 번 더 가게 돼 장애아동을 만났고 그 아이들을 살리고 하는 내 마음이 결국 기적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다시 정상적인 눈을 갖게 된다면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합니다.

■ 5월 9일 토요일 - 봉사 9일째

2월에 10차 진료를 갔던 나가르곳의 마하칼리 학교가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 응급진료세트와 빵, 비스킷을 사서 갔습니다. 히말라야 산 기슭에 있는 이 학교는 2005년에 대만 로타리클럽에서 건립했습니다. 선생님의 월급이나 운영비는 마을 주민들이 거둬 어렵게 운영하는 가난한 학교입니다. 학교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모두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건물에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은 2개월 전에 만났던 어린이를 가르치는 여자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를 알아보고 무척 반기더군요. 학교를 지을 만큼의 후원은 되지 않아 지을 수도 없고 아이들이 학교를 지을 때까지는 올수가 없다고 하니 안타까워 눈물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아이들 중에 집에 있다가 죽은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구호약품과 비스킷 등을 전달하고 학교를 짓게 되면 연락 달라고 했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돈을 보태 주기로 했습니다.

파탄의 야소다라 학교도 들러보니 휴교상태라 아이들은 없었고 학교를 운영하는 스님과 선생님 한 분만이 계셨습니다. 학교와 절 보수공사를 하다가 중지됐다고 해서 물어보니 후원금으로 조금씩 해나가는데 이도 어려워 지금은 중지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알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능력은 되지 않고. 여기도 응급세트와 음식, 비스킷 등을 전달했습니다.

오지인 까르띠까로 가는 길에 차바퀴가 빠져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빠졌지만, 네팔 스님들의 도움으로 가던 길을 무사히 갈 수 있었다.

■ 5월 10일 일요일 - 봉사 10일째

가장 오지인 까르띠까라는 곳에 갑니다. 대부분의 세계 봉사팀이 차가 갈 수 있는 신두팔촉에 모여 있습니다. 그 이상의 산 속은 위험하고 도로도 끊겼고 굶주리고 위험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인 없이는 가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틸강가 병원의 닥터 로이트의 후원아래 4개국이 모여 의약품과 구호물자 등을 세 트럭에 싣고 지프차 두 대로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신두팔촉까지 4시간, 거기서 까르띠까까지 다시 6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신두팔촉에서 까르띠까로 가는 도중에 의약품과 구호물자를 군데군데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맨 처음 간 곳은 보건소였고 네팔 의사가 있어 현재 상황을 들으니 부서진 보건소를 건립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세 군데를 거쳐 가다가 어떤 여자 분이 아픈 환자가 집에 있다고 의사 진료를 청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의약품을 들고 우리팀과 함께 논두렁을 건너 10분정도 걸어 그 집으로 갔습니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참했습니다. 지진으로 집은 다 무너졌고 논두렁에 비닐하나를 천막처럼 치고 온 가족인 일곱 사람이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다리를 다쳐 2주째 앓고 있었습니다. 응급처치를 해주고 약을 주고 온 가족이 굶고 있는 것 같아 약간의 돈도 후원했습니다.

비가 오기 시작하고 여진도 조금씩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의약품이 반이나 남아있어 까르띠까로 가야합니다. 지리산보다 더 깊숙한 산골 같은 시골길을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처럼 올라갔는데 누구하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 온 뒤로 여진을 밤마다 간간히 느꼈지만, 오늘 여진은 조금 두려웠습니다. 비도 많이 오고 여진이 계속 되면 흙이 무너질 수도 있고 오는 길이 끊길 수도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됐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드디어 까르띠까 근처 2km 지점에서 차가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모든 사람을 동원해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2시간 동안 노력하다가 꼼짝도 하지 않는 차는 비가 오면서 더욱 구덩이에 빠지더군요. 낙담하고 있는데 윗마을에서 봉사를 하고 내려오던 네팔 스님의 트럭 한대가 나타났습니다. 스님 서른 분이 물 속 웅덩이에 맨발로 들어가 차를 들어 올린 끝에 차가 움직일 수 있게 됐습니다. 곳곳에 의인이 있다는 허준의 말씀이 실감나는 하루였습니다.

봉사 왔던 네팔 스님들은 까르띠까 주민들이 배고픔과 공포에 노출돼 거칠다며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더군요. 길도 이보다 더 험하니 돌아가라는 충고도 했지만 우리는 이곳까지 온 목적도 있고 이 약을 꼭 전해야한다는 일념아래 계속 갔습니다. 2km를 더 올라가보니 1000명 정도 모여 있더군요. 더 깊은 산속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의약품과 구호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난 군중들 속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는데 군인 차가 들어와 질서를 유지해주더군요. 그래도 구호품과 의약품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어떤 할머니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지 못하고 구호 식량이 있는 트럭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려워 의약품과 구호품을 군인 보호아래 동네 이장에게 맡기고 보건소에서 균등하게 나눠줄 것을 약속받고 내려왔습니다. 내려 오다보니 한 무리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 있더군요. 구호품이 더 필요한데 윗마을만 주고 자기들은 주지 않아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비스킷과 빵을 아이들과 여자들에게만 나눠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닥터 로이터와 딸 세라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우리 한국팀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10년간 인도와 네팔을 다녔고 지난 10일간 네팔에 있었지만 오늘만큼 극적인 날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 은혜로 랑그랑의 눈 기형 두 소녀에게도 수술을 꼭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한 번 더 받았습니다. 제가 10월에 다시 방문할 때까지 두 아이의 수술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랑과 일들 속에서 제 가슴이 가장 아팠던 것은 차가 빠져 2시간가량 빗속에서 서 있는 와중에 길가에 완전 무너진 집 위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초라한 노인이었습니다.

까르띠까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한 노인. 가족 모두가 사망한 상태에서도 집을 다시 짓겠다고 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2시간째 계속 무너진 집 잔해를 소쿠리로 한 개씩 한 개씩 나르는 모습이 개미가 허물어진 성터를 옮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통역 돌마 씨를 보내 물어보았더니 가족이 모두 사망하고 혼자 남은 것 같았습니다. 옷은 사고 난 당시 그대로 2주째 입은 상태이고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절망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할아버지에게 왜 무너진 잔해를 왜 파냐고 물었더니 이 집을 다시 지어야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정말 충격 받았습니다. 가족이 죽은 마당에 또 이미 다 파괴된 집터에서 무엇을 짓고 누구를 위해서 짓는단 말입니까. 본인도 곧 돌아가실 만큼 연약한 상태인데 제 마음에서 신이 있는가 하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처음에 사탕을 건넸더니 안 받으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털어 전해드렸더니 극구 거절해 억지로 쥐어주자 자기가 생각한 것 보다 큰돈이라며 깜짝 놀라 돌려주더군요. 100달러면 10만원입니다. 우리에게는 큰돈이 아니지만 그 분에게는 하늘이 준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돈을 쥐어주면서 굶지 말고 집도 끝까지 짓고 끝까지 사시라고 했더니 눈물을 흘렸습니다.

■ 5월 11일 월요일 - 귀국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제 삶의 가치를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땐 어느 가게에나 있는 생수입니다. 그러나 의사가 없는 의료오지에서는 생명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차피 없어질 등불이라면 밝고 환한 곳보다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등불을 밝힌다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야데비 왕비가 2500년 전에 부처님을 낳다가 산욕열(염증)로 사망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자는 이 날을 기뻐하며 축배를 듭니다. 그러나 룸비니의 그 밀림 같은 고온의 들판에서 아기를 낳다가 죽어가는 마야데비 왕비를 상상해보십시오. 아직도 네팔 여성들 특히 룸비니 여성들은 염증과 영양부족과 여성차별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불자들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룸비니의 여성들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를 지면으로 알리는 것은 저로 인해 아름다운 향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을 뿐이고 제 봉사의 가피 경험을 불자들에게 알림으로써 신심을 더욱 증장하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바람 때문입니다.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대회가 한국에서 크게 열립니다. 그 시기에 네팔의 부처님 자손들은 아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있습니다. 우리의 한국 불자들의 온정을 모아서 부처님 나라에도 환한 세계평화의 등불이 밝혀질 것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한 가지 꼭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의약품이나 식량은 많은 단체에서 같은 곳에 보내다보면 불균형을 이루고 그들 간에 불협화음을 초래할 수도 있기에 조계종에서 네팔 후원창구를 단일화하고 네팔 스님들이 함께 동참해 네팔국민이 원하는 것을, 부족하고 필요한 곳에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 보내야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나라, 네팔불교의 등불을 지키는 길이 세계불교인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불교신문3107호/2015년5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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