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총림 범어사ㆍ불교신문사 공동
동산대종사 열반 50주기 특별기획 1. 수행〈上〉 참선

 

1927년 7월5일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방부를 들이고 정진하던 동산스님이 방선(放禪) 시간에 포행을 하고 있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을 만나 대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확철대오(廓撤大悟)의 순간이었다.

“서래밀지(西來密旨)가 안전(眼前)에 명명(明明)하였다.”

‘서쪽에서 은밀하게 전해온 가르침’이 눈앞에서 밝게 펼쳐졌다는 뜻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불문(佛門)에 들어 수행한지 15년 무렵이었다. 바람에 부딪힌 댓잎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한 스님은 당신의 별호를 ‘순창(筍窓)’이라고 했다.

동산스님은 이보다 앞서 1924년 4월15일부터 직지사에서 3년 결사를 결행하며 정진하는 등 한시도 수행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범어사에서 오도(悟道)의 환희심을 맛본 동산스님은 은사 용성(龍城)스님에게 견처(見處)를 말씀 드렸고, 용성스님은 그 자리에서 인가(認可)했다.

동산스님의 출가 본사인 범어사는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한국불교의 으뜸가는 수행법인 참선 수행의 중심 도량이다. 구한말 쇠퇴한 수행 가풍을 진작시키고, 간화선 정진의 선풍(禪風)을 일으켜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존경받는 경허(鏡虛, 1849~1912)스님이 범어사 선원에서 납자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제방에서 정진하며 수행한 경허스님이 근대 한국불교 간화선 수행의 씨앗을 뿌리며 수좌들을 인도한 도량이 바로 범어사이다.

경허스님의 시문(詩文)을 모은 <경허집>에는 범어사와 관련된 글이 여러 편 나온다. ‘범어사계명암수선사 방함 청규’ ‘범어사설선사계의서’ ‘범어사총섭방함록서’는 물론 ‘범어사계명암 창건기’, ‘동래군금정산범어사계명암창설선사기’와 보제루를 소재로 한 오언율시 등 다수에 이른다.

경허스님이 범어사에 머문 시기가 북쪽으로 몸을 숨기고 열반에 들기 불과 수년 전이란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평생 수행 정진한 결과를 범어사에서 후학들에게 전하고 회향(廻向)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어사는 조계종은 물론 한국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 경허스님의 유훈을 간직한 도량이다. 즉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의 요체와 법향(法香)을 간직한 수행처이다.

경허스님은 1902년 음력 10월15일 결제일에 ‘범어사계명암방함청규’를 대중에게 전했다. 이때 경허스님은 “대중과 의논해 정한 것”이라면서 10가지 청규(淸規)를 제시했다. 이 가운데 “진정한 참학자는 시끄럽거나 고요함에 틈이 없기에 마침내 생사열반에 구애가 없다”면서 “음주와 음행은 부처님께서 깊이 경계하심이니 마땅히 엄단하여 쫓아낼 일”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동산스님은 경허스님의 가르침이 사라지지 않고 있던, 1912년 용성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범어사 경내 대나무 숲.

환성-경허-용성스님 맥 계승

1920년대 후반 범어사 선원에서 정진하며 견처를 확인한 동산스님이 경허스님의 참선 수행 전통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은 동산스님 은사인 용성스님 역시 간화선 수행을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용성스님은 한국불교 선맥을 형성하고 있는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스님을 원사(遠嗣, 같은 시대가 아니어서 직접 배우지는 못하고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음)로 임제선맥(臨濟禪脈)을 계승했다. 동산스님은 자연스럽게 은사인 용성스님을 통해 간화선 수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경허스님 열반 후 <경허집>을 발간한 만해(萬海, 1879~ 1944)스님이 범어사에 주석했고, 용성스님과 인연이 각별했다. 동산스님이 선교(禪敎)를 지도받은 한암(漢岩, 1876~1951)스님이 경허스님 제자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해스님 거처인 심우장의 현판을 직접 써준 오세창(1864~1953)은 동산스님의 고모부다. 동산스님이 평생 수행의 지남(指南)으로 삼은 참선 수행은 환성지안스님과 경허스님, 용성스님 등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사의 남다른 의미가 있다.

동산스님은 1942년 만해, 만공, 한암스님 등과 함께 <경허집> 을 발간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연도 있다. 후학들에 따르면 동산스님은 고려시대 불일보조(佛日普照, 1158~1210) 국사(國師)와 경허 선사를 존경했다고 한다.

보조국사가 간화선 수행의 수승함을 강조하기 위해 저술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마음이 부처님을 자각하고 수행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내용을 담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애독한 것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동산스님은 오도 후 범어사는 물론 제방선원에서 납자들을 지도하며 한국불교 선수행의 전통을 확고하게 수립했다. 깨달음을 성취한 다다음해인 1929년 범어사 금어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참선납자들을 제접했다. 범어사뿐 아니라 선산 도리사 선원 조실(1937년), 영천 은해사 선원 조실(1939년)로 수좌들을 지도했다.

1938년 범어사 내원암 조실에 이어, 1940년 용성스님이 원적에 든 후에는 1941년부터 금어선원에 석장(錫杖)을 두고 가행정진과 눈 푸른 납자들을 인도하는데 매진했다. 불교정화불사에 흔연히 나선 까닭 가운데 하나는 청정한 승단을 구현하기 위한 원력에 따른 것이다.

후학들을 제접하고 전법교화에 전념하면서, 한국불교의 수행전통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동산스님의 제자인 성철스님은 은사에 대해 “항상 (범어사) 청풍당에 머물면서 납자를 다루는 용광로는 더욱 뜨겁고 그들을 편달하는 망치질이 더욱 신묘하여 봉황의 새끼들은 나뭇가지에 가득하고 금빛고기들은 못에 가득하더라”고 회고한바 있다.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스님은 동산스님의 ‘일상’에 대해 “선방 입선(入禪) 시간을 준수하셨다”며 “보기 드문 모범적인 선지식으로 추앙한다”고 회고한바 있다. 총무원장을 지낸 경산스님 역시 “일생을 참선으로 정진 일관하셨다”면서 “우리 종단의 거성(巨星)”이라고 존경을 표했다.

지난 2월18일 중창불사 회향식을 가진 금어선원에서 수행가풍을 이어가는 스님들(사진제공=범어사 석공스님).

“평생 참선정진 일관”…선교겸수 지향

동산스님은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수행을 지향했다. 선교율을 겸비한 용성, 한암, 용봉스님 등의 지도를 받은 것은 물론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물론 중심은 참선 수행이었다.

동산스님은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중생의 근기가 낱낱이 다 알고 다 보고 해서 그 근기에 맞춰 말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이 항복하게 되고, 그 제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이지만 필경 구경처(究竟處)는 만법을 통하여 일심으로 돌아가는데 있다”고 설했다.

<화엄경>의 핵심인 ‘통만법귀일심(通萬法歸一心)’과 맥을 같이한다. 동산스님은 “만법을 통합하여 일심에 돌아가면 거기는 능과 소는 없으나 그 밖에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 조사관(祖師관)이요, 우리의 90일 공부가 바로 이것이다”고 강조하며 수좌들의 정진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동산스님은 평생 화두 참구를 수행의 중심에 두고 정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찰대본산으로 간화선 수행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는 범어사는 일제강점기에도 꾸준하게 선원(禪院)을 열어 전국에서 운집한 납자들이 정진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동산스님은 범어사 선원 조실로 후학들을 지도하며 간화선 수행 전통을 계승했다. 이같은 전통은 금어선원을 비롯한 금정총림 본ㆍ말사 선원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5년 2월에는 금어선원 중창불사 회향식을 거행해 수좌들이 더욱 정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간화선 수행을 중심에 두고 평생 정진하며 후학을 제도한 동산대종사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총림 차원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허스님의 간화선 수행전통 향훈(香薰)이 배어 있는 범어사의 선풍(禪風)을 계승한 동산스님의 정진은 후학들에 의해 한국불교의 꽃을 피웠다. 납자들은 물론 제자들이 간화선 수행을 중심으로 정진하고 있으며, 금정총림 범어사, 해인총림 해인사, 쌍계총림 쌍계사 등의 총림과 전국 사찰에서 동산스님의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

성철ㆍ지효ㆍ지유ㆍ능가ㆍ고산ㆍ광덕ㆍ정관ㆍ무진장스님 등 기라성 같은 후학들을 길러 낸 동산스님은 한국 선불교 중흥의 뿌리를 내린 선지식이었다.
 


■ 동산 대종사 어록

“만약 터럭 끝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번뇌 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을 뚜렷이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은 다만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치기를 기약할 따름이라”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셔서 바로 우리의 마음 천진불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사가 이르기를 ‘마음이 부처요, 부처가 이 마음이라’ 하였으니 우리의 마음을 여의고는 부처가 없고 또 부처님의 각(覺)한 마음을 떠나서 우리의 마음이 아니며,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사람마다 갖추어 있는 천진의 면목은 부처님에 있어서 더하지 않고 중생에 있어서 덜하지 아니하여 찰나에도 나지 않고, 찰나에도 멸하지 않는다. 우리 중생은 그러한 천진면목(天眞面目)을 잠깐 미(迷)했기 때문에 본래 없던 경계가 보이면서도 광명이 보이지 않고 꽉 막힌 장애물로 보이는 것이다.” - 보살계 법어

“집착하는 마음을 짓지 말고 온전히 텅 비어 버리고 생각만 놓아 버리면 낱낱이 천진자성(天眞自性)이다. - 보살계 법어

“우리의 마음 본(本)바탕은 본시 한 티끌도 없고 그것이 천진의 부처이며 누구에게도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 1964년 음력 4월15일 범어사 하안거 결제 법어

“오계를 잘 가진다는 것은 궁실을 짓는데 먼저 터를 견고히 하는 것과 같다. 터가 견고해야만 집을 세울 수 있고 터가 견고치 못하면 집을 세울 수 없다. 마치 허공에 집을 지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먼저 오계부터 잘 가지고 마음 그릇이 청정해진 뒤에야 참으로 실답게 공부할 수 있다. 한편 실답게 공부를 하려면 불가불 조사의 공안인 화두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 1964년 음력 4월15일 범어사 하안거 결제 법어

55세 무렵 범어사에서 동산대종사.

■ 동산대종사 행장

1890년 음력 2월25일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7세부터 13세까지 향숙(鄕塾)에서 한학을, 19세까지 익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서울 중동학교를 거쳐 의학전문학교에서 의술을 배웠다. 24세에 범어사에서 용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우두암에서 한암스님에게 사교(四敎)를, 범어사에서 영명스님에게 대교(大敎)를 수료했다. 운문암, 상원사, 마하연, 복천암, 백운암에서 참선 수행하고 직지사에서 3년 결사를 했다. 석왕사, 내원암에서 납자를 지도하고, 1934년 범어사에서 화두를 타파하고, 용성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청정승단 재건을 위해 전국수좌대회 준비위원, 선종 평의원, 순회 포교사 활동을 하고, 1936년 용성스님의 법인(法印)을 전수했다. 범어사 금어선원 수좌로 납자들을 지도하며, 1941년 유교법회(遺敎法會)에 참석해 선지(禪旨)를 전했다.

1954년 불교정화의 깃발을 올리고, 1956년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1962년 통합종단 출범에 즈음해 종정의 위(位)를 사양하고 범어사에서 납자를 지도하며, 도량을 일신(一新) 중수(重修)했다. 41세에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보살대계를 전수하고, 54세에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설전(說傳)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에게 천화계법(千華戒法)을 전수했다. 1965년 음력 3월23일 열반했다. 세수 76세, 법납 53세.

오는 5월11일 동산대종사 열반 50주기를 앞두고 금정총림 범어사와 문도회를 중심으로 교학대회, 사진전 등 추모사업 준비가 한창이다. 사진 왼쪽은 최근 범어사 경내 대나무 숲, 오른쪽은 지난 2월18일 중창불사 회향식을 가진 금어선원에서 수행가풍을 이어가는 스님들(사진제공=범어사 석공스님).

[불교신문3094호/2015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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