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한암스님의 제자인 보문(普門, 1906~1956)선사는 세수 50세에 입적하셨다. 선사를 알고 있던 분들은 “보문스님이 일찍 입적한 것은 청정한 계율을 지키기 위해 음식을 철저히 지켜 영양부족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보문 선사는 평생 수행자로서의 본분사 이외 안위 따위는 없었던 투철한 두타행자였다. 한 신도가 질 좋은 베개를 공양했는데, 스님은 “내가 평안하게 잠을 자려고 출가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칼로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스님은 제자들에게 ‘승려는 목침을 이용해야지 베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다. 선사는 세속의 삶은 짧았지만, 철저한 두타행자로서 후대 스님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다.

독일의 쾰른 지방의 페터 노이야르(Peter Neujahr)는 거지 성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님들처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며, 음식도 빌어먹는다. 페터는 제도권 안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며,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소유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라면서 ‘부처님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승려는 세상에서 가장 허름한 옷(사람들이 버린 천을 조각조각 기운 가사), 가장 거친 음식을 취하면서도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최선(最善)을 지향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다. 특히 음식 관련 계율이 엄격하고, 불멸후 100년 무렵, 2차 결집의 원인도 계율 문제로 발생했다. 이때 계율 열 가지를 다시 정비(十事非法)했는데, 다섯 가지가 음식과 관련된다.

언제부터인가 사찰 음식이 대세다. 어느 학회에서는 스님들의 음식을 주제로 다루기도 한다. 사찰에서 음식 시연을 하고, 사찰음식점이 생겨나며, 출판사마다 총 컬러판으로 사찰음식 책을 출판한다. 글쎄? 소납은 음식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다양한 사찰음식에 눈이 즐거울 때도 있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스님들이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 음식물 섭취에 공을 들였던가?

부처님께서 성도 직전에 고행을 하셨는데 ‘지나친 음식 제한으로 팔다리는 시든 갈대와 같았고,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질 정도로 야위었다’고 했다<맛지마 니까야>. 12세기 티베트의 밀라레빠는 수행 당시 먹을 것이 없어 풀을 삶아 먹었고, 신라의 무상대사는 사천성 천곡산에서 두타행을 하면서 음식이 없어 흙을 먹기도 하였다<역대법보기>.

초기불교 스님들은 어떤 음식이든 신자들이 공양 올린 것은 차별하지 않고, 맛에 천착하지 않으며, 수행을 유지하는 약으로 생각하고 먹었다. <불유교경>에는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정도로만 기갈을 면하라’고 했다. 어른 스님들도 반찬을 세 가지 이상 올리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오분율장>에 부처님께서 ‘비록 내가 제정한 법이지만 다른 나라에 풍습 상 맞지 않거든 그 풍습에 맞추어도 된다’고 했으니, 대승불교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사찰 음식이 발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포교차원에서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불교’, ‘승려=수행자’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사찰음식의 발전은 결코 지향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는 1982년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운문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종단 교육아사리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맨발의 붓다> <경전숲길> <명상, 마음치유의 길> 등이 있다.

[불교신문3082호/2015년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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