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선사와 불교정화 ⑧ 탄생과 출가

당대 최고의 선지식 금오선사는 1896년 7월13일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에서 동래 정씨인 부친 용보(用甫)와 어머니 조(趙)씨 사이에서 2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금오(金烏), 휘(諱)는 태전(太田), 옛 이름은 태선(太先)이다.

선사가 태어난 병영면은 조선 효종 때 남쪽 해안국경을 경비하기 위해 세운 병영(兵營)에서 나왔다. 평지에 성을 세우고 마을은 계획도시처럼 바둑판같이 만들었다.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구금돼 성(城)을 쌓았던 곳이 바로 이 곳 병영이다.

조선의 일반적인 마을이 조상을 정점으로 성씨(姓氏) 촌이 형성된 것과 달리 병영은 군사적인 이유로 각처에서 들어와 마을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이곳은 특정 성씨 마을이 없다. 그래서인지 인근 사찰 외에는 이곳 출신 금오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마을에는 전해오지 않는다.

1896년 전남 해안

군사도시서 태어나

15세까지 서당에서

전통교육 받아…

박동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찰 수인사의 한 보살은 “금오 큰스님이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곳 스님들은 잘 알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며 집성촌이 형성돼 있지 않아 스님의 남은 속가 가족에 대한 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문도회 기록에 따르면 태선은 어릴 적부터 천성이 영민하여 서숙(書塾)에서 공부하는 학동(學童)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났다고 한다. 성격은 고집이 세고 생각이 깊었다고 한다. 출가하기 전 일화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아마, 금오스님 생전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던 몇 마디가 남아서 전해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루는 태선이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친형에게 매를 맞았다. 그 때 태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까짓 글공부만 해서 뭐해, 쓸데도 없는데.” 왜 이같은 말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15살이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인식하는 ‘청년’에 접어들 나이다. 1910년경이다. 짐작해보는 것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청년의 울부짖음이다.

조선 멸망 후

강진 백련사서 스님 만나

화두공부 참선 접한 후

금강산으로 출가

마하연에서 경허 이은

은사 회상에서 공부

나라 잃고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을지 모른다. 병영이 해안가를 침입하던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사요새임을 감안하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어린 학동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속가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고, 불법(佛法)아닌 말은 입에 올리지 않은 선사의 성품 탓에 출가 전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1911년 초가을 태선은 불교와 처음 인연을 맺는다. 강진 백련사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백련사는 병영면에서 50리가량 거리다. 백련사는 바다와 인접해있고 강진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다. 걸어서 한 나절이면 도착하는 지근거리다.

금오선수행연구원에서 편찬한 스님의 공식 행장(行狀)에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백련사에서 만난 스님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에 백련사 스님은 태선에게 인생에 대한 화두를 던져 이를 화두 삼아 밤낮으로 참구했다고 한다. 화두를 참구하던 중 의심이 크게 일어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그 스님에게 고승을 소개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백련사는 원묘국사가 염불수행을 중심으로 한 백련결사로 유명한 고찰이다. 고려시대 8국사를 배출했고 조선시대는 8대 선사가 나온 유서 깊은 절이다. 17세기 말 다산 정약용과 교류했던 혜장선사가 남긴 시문을 보면 선사는 이곳에서 참선수행에 매진했다. 그 전통이 100여년이 흐른뒤 태선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금오스님이 처음 출가했던 금강산 마하연 모습. 이곳에서 경허의 법을 이은 혜월스님의 제자 도암긍현 선사를 만나 6년간 정진한다.

태선은 백련사 스님의 소개로 금강산 마하연의 도암선사를 찾아 간다. 이때가 1911년 태선의 나이 16세 되던 해이다. 금강산 마하연은 오늘날 조계종을 낳은 산실로 불릴 정도로 고승들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갔다. 효봉 성철 청담 벽안스님 등 현대 한국불교 고승으로 이름을 올린 스님치고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은 분이 없다.

하지만 그 시기는 태선 보다 20여 년 뒤인 1930년대다. 1935년 <선원(禪苑)>에는 마하연선원에 37명의 수좌들이 정진 중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25개 수좌 선원 중에서 가장 많은 수다. 하지만 1932년도 조사에 따르면 금강산에 유점사 비로선원, 표훈사 선원, 신계사 미륵선원, 석왕사 선원은 나오지만 마하연선원은 기록이 없다.

1931년 창간호에 유점사 선원에서 70명이 정진중인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하연 등 내금강의 토굴을 합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10년대는 마하연이 정식 선원으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행자로 3개월간 정진한 태선은 혜월스님의 법제자인 도암긍현(道庵亘玄)으로부터 수계를 받는다. 도암스님은 혜월스님의 제자라는 사실 외에는 전해오는 기록이 없다. 혜월스님은 경허스님의 뛰어난 제자인 혜월, 월면(만공), 수월스님을 일컫는 3월(三月) 중 한 명이다. 1862년 충남 덕산면에서 태어난 혜월스님은 정혜사에서 출가, 천장암에서 경허스님을 만나 글을 배우고 선법을 익혔다.

스승으로부터 화두를 받고 일념으로 정진하다, 짚신 한 켤레를 내려놓는 소리에 눈이 열려 경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혜월’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08년 48세부터 남으로 내려간 혜월스님은 선산 도리사, 팔공산 파계사, 양산 통도사 극락암, 범어사 등을 옮겨 다니며 후학을 지도하고 가는 곳마다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어 대중과 주민들을 먹여 살려 영남에서 명성을 떨쳤다.

열반할 때까지 부산 선암사에서 머물렀다. 제자 중 운봉스님의 맥이 향곡스님으로 이어져 현 진제 종정스님에게 닿는다. 금오스님이 마하연에서 첫 인연을 맺은 은사가 경허의 문손인 셈이다.

혜월스님은 운봉스님과 철우스님에게는 전법게를 내렸지만 도암스님에게 내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태선이 마하연에 갔을 당시 1911년에는 혜월스님이 천장암에 머물때다. 경허는 이듬해 삼수갑산에서 입적한다. 태선이 금강산에 들어오기 전 수월스님은 금강산 묘향산을 거쳐 은사가 머물던 만주로 갔다. 도암은 수월스님을 따라 금강산으로 왔다가 머물렀을 수도 있다.

태선은 도암긍현선사로부터 ‘이뭐꼬’ 화두를 받고 정진한다. 마하연에서 3년을 보낸 후 20세 때 안변 석왕사 내원암으로 발길을 옮긴다. 여기서 또 3년 동안 용맹정진 결사에 들어갔다. 금강산에서 6년간의 긴 수행을 마친 태선은 26세 때인 1921년 드디어 금강산을 벗어난다.

그리고 2년간 전국으로 흩어진 경허의 직계 제자들을 찾아 나선 뒤 마지막으로 만공선사가 있는 충청도로 향한다. 금강산에서 ‘이뭐꼬’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 한 태선은 이제 마지막 고비를 향해 치달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6년 간 용맹정진으로 기초를 다진 태선은 부족함을 채우려는 듯 은사의 스승들을 찾아 나섰다.

먼저 찾아간 곳은 오대산이었다. 오대산에는 한암스님이 있었다. 한암 역시 경허의 법제자이다. 태선보다 20살이 많은 한암은 합천 해인사에서 경허스님에게 “원선화(遠禪和)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에 올랐다”는 인가를 받고 법제자가 됐다.

묘향산 내원암, 금선대, 평북 맹산군 우두암,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행하고 건봉사 조실로 추대됐으며 47세 되던 1923년 서울 봉은사 조실이 됐지만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과 식민지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산문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한암선사가 상원사로 오자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려는 수좌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건봉사. 신흥사. 유점사 등 강원지역 3본사가 공동으로 수련원을 개설하면서 대중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작은 암자에 불과했던 상원암이 ‘한암’이라는 고승으로 인해 조선 팔도의 수행 중심도량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 태선이 오대산으로 갔던 1921년에는 한암스님이 없을 때이다. 만약, 태선도 이 사실을 듣고 금강산을 나와 오대산으로 찾아갔다면 모를까 그보다 2년여나 앞서 오대산으로 간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오대산을 나온 태선은 다시 영남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번에는 노스님인 혜월선사를 참방하러 가는 길이다. 먼저 통도사 보광전에서 잠시 가부좌를 튼 태선은 곧바로 혜월스님이 회주로 있던 천성산의 미타암 선원으로 간다. 태선은 만주로 간 수월스님도 찾아가 정진했다. 그리고 경허의 ‘삼월’ 중 마지막이며 경허의 숨결이 서려있는 충청도로 향한다. 그곳에서 태선은 금오로 다시 태어난다.

※법주사ㆍ금오선수행연구원 이사장 월서스님·불교신문 공동기획

[불교신문3068호/2014년12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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