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공수(良醫拱手)

 

선(禪)에선 스승의 친절보다 발심이 절실

지나치게 베푸는 것은 독이 될 수도 있어

위앙종 종조 위산 영우(771~853)의 제자 가운데 향엄 지한(?∼898)이 있다. 지한은 경전 및 유학에도 매우 해박하였다. 어느 날 스승 영우가 지한에게 물었다. “그대는 경전 구절에 의지하지 말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을 한번 말해보게나.”

지한은 스승의 말에 아무 답변도 못했다.

“네게 대답해 줄 수 없으니, 그대가 직접 궁구해서 답을 찾아야 하느니라.” 스승 입장에서 볼 때, 지한이 뛰어난 근기를 갖고 있는데도 발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지한은 고심하다가 만행을 떠났다. 만행 중에 남양 혜충 국사가 상주했던 향엄사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한은 마당을 쓸다가 기와 조각이 떨어지면서 대나무에 ‘딱!’하고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지한은 스승이 있는 쪽을 향해 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화상의 대자대비한 은혜는 부모의 은혜보다 더 지중합니다. 그 당시 나를 위해 자상하게 법을 설해주었다면, 어찌 오늘날 제가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도 유사한 선사가 있는데, 벽송 지엄(1464~1534)이다. 지엄은 선지식을 찾다가 벽계 정심이 황악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정심은 유생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팔며 겨우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지엄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스승에게 도를 물으면 정심은 대답이 한결 같았다.

“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닐세. 행주좌와에 ‘내 마음이 무엇인고?’라고 궁구하게나.” 수개월간 지엄은 죽어라 일을 하면서 스승에게 선지(禪旨)를 물으면, 스승은 “허, 그걸 알면 그것도 알아지는 걸세”라는 똑같은 대답뿐이었다. 지엄이 재차 물으면, “답을 해줄 수 없지”라고 퉁명하게 말했다. 마침내 지엄은 스승의 무성의에 화가 나 하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엄이 산을 내려가는데, 스승이 쫓아와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때 스승이 “나를 보고 가게나”라고 소리치자, 지엄이 고개를 돌렸다. 이때 스승이 말했다.

“옜다. 내 법을 받아라!” 지엄은 스승의 말을 들으며 주먹을 보는 순간, 활연 대오하였다.

다음은 조동종의 종조 동산 양개(807~869)와 스승의 이야기이다. 양개는 출가 이래 자신을 지도해 줄 선지식을 찾아 오랫동안 행각하였다. 마침내 양개는 운암 담성(772~841)을 만났다. 양개는 몇년간 담성의 도량에 머물며 수행하였다. 스승 담성이 입적하기 전, 양개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께서 입적하신 뒤에 누군가 ‘화상의 초상을 그릴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할까요?” “다만 그에게 ‘다름 아닌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면 된다.” 스승이 입적하고 3년이 흘러 양개는 사형 선산과 함께 담성의 제사를 지내러 위산으로 길을 떠났다. 가는 길녘, 담주에 이르러 큰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양개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이후, 양개는 스승에 대해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 운암이 나를 위해 법을 설해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여길 뿐이다”

양개는 그의 어록에서 양의공수(良醫拱手, 훌륭한 의사는 단지 팔짱만 끼고 있을 뿐)라는 말을 강조하였다. 즉 훌륭한 의사는 환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본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도울 뿐이지, 지나치게 베푸는 것은 오히려 독이라는 뜻이다. 어떤 배움에서도 제자 스스로 체구연마(體究練磨, 직접 실천하면서 부딪쳐 깨달아가는 것)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니 마음 닦는 선에서는 스승의 친절보다 스스로의 발심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불교신문3059호/2014년11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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