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희 서울구치소 불교분과위원장

지장보살님은 왜

지옥에서 중생구제하실까…

 

수용자 교화가 곧

이타행이자 보현행 회향처

수용자 교화활동 통해 오히려

제 인생의 가닥 잡아줘

 

서울구치소 법회

남자사동 120~150명

여자사동은 50~60명씩 참가

종교행사 중 가장 많아

 

총무원장 스님

봉축행사 특별법문 해주시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아

 

 

금강경 독송기도 통해

세상 모든 게 다 감사하고

인연의 소중함 깨닫게 돼

 

금강선원 ‘탄허화엄학관’

건립불사 ‘화주보살’로 나서

원만회향 기원 100일 기도

 

지난 18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난 최숙희 서울구치소 불교분과위원장은 수용자포교에 대한 스님과 불자의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30일 화요일 저녁, 최숙희 서울구치소 불교분과위원장은 비보를 전해 들었다. “오늘 행사가 있었어요.” 서울구치소 불교담당 교도관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최숙희 위원장은 “우리 식구는요?”라며 다급히 되물었다. 교도관이 말한 ‘행사’는 바로 ‘사형집행’을 뜻하는 ‘은어’.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그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23명 가운데 2명은 최 위원장이 7년 동안 교화를 맡고 있던 불자 수용자다.

“다음 주 금요일 종교행사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이 생생한데 정권 말기에 갑작스레 이뤄진 사형집행으로 인해 그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됐다. 특히 <반야심경> 사경을 1만번 할 만큼 자신이 저지른 죄를 참회하며 독실한 불자의 삶을 꿈꾸던 성연 거사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최 위원장은 사형집행 다음날 송암스님과 함께 구치소를 찾아가 아들 같은 성연 거사의 시신을 수습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지켜줬다.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재까지 지낸 송암스님을 위해 성연 거사의 어머니는 스님을 몇 년간 시봉하기도 했다.

“7년간 엄마와 아들처럼 지내다가 갑작스레 헤어지게 돼 얼마나 황당하고 슬펐는지 몰라요. 집에서 서울구치소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 한동안 성연 거사 생각이 났었는데 ‘그 곳에서도 열심히 수행 해야지’라며 정진을 당부했었지요. 얼마 뒤 꾼 꿈에서 ‘보살님! 저 가요’라며 하얀 강아지가 된 성연 거사를 만났어요. ‘이제는 몸 바꿔 왔겠지’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지만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최 위원장이 30년 동안 수용자 교화활동에 매진하게 된 것은 보현행을 강조한 서울 불광사 광덕스님의 영향이 크다. 당시 불광사는 수용자포교를 펼치는 보문부를 중심으로 영등포교도소, 영동포구치소, 성동구치소, 수원교도소 등지에서 교화활동을 전개했지만 찬불가를 지도할 수 있는 불자가 없었다. 그때 광덕스님의 눈에 음악가인 최 위원장이 들어왔다. 최 위원장은 경희대 작곡과를 졸업한 뒤 서울여상 음악교사와 조계사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초 광덕스님은 불광사 개포법등 마하보살인 최 위원장에게 ‘보현행으로 수용자에게 찬불가를 가르쳐 보라’고 당부했다. “광덕스님께서 ‘내가 밝고, 네가 밝으면 우리 모두가 밝으니 그게 바로 불국정토지’라며 수용자 교화활동을 당부하셔서 그 자리에서 ‘네’라고 답했어요. 큰스님과의 약속이자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라는 생각에 시작한 게 올해로 딱 30년이 됐네요.”

광덕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불광사 보문부 도반들과 함께 교도소와 구치소를 찾았지만 초반에는 무서움에 눈물도 많이 흘려야 했다. 하지만 제각기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수용자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보니 가여운 마음에 저절로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서대문형무소가 인덕원으로 이전해 서울구치소로 새롭게 문을 열자 ‘수용자포교의 대모’ 청정행 안효진 보살의 제안으로 1987년부터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법회를 주관하고, 불자 사형수 교화 등을 위해 틈나는 대로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매주 금요일 정기법회 때마다 남자사동은 120~150명, 여자사동은 50~60명씩 참가하고 있다. 종교 행사 중 법회에 가장 많은 수용자가 찾을 만큼 불교의 위상도 높아졌다는 게 최 위원장의 설명이다. 불자 수용자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최 위원장은 어느덧 안효진 보살에 이어 수용자포교의 대모가 됐다.

최 위원장은 ‘서울구치소를 얼마나 다녔을까’라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들어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니 1000번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제 집 드나들 듯이 방문했다. 간혹 출소한 뒤 찾아온 수용자를 믿고 도와줬다가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 손을 내밀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내칠 수가 없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올곧게 잘 살고 있다며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사겠다며 감사인사를 전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특히 최 위원장은 수용자 교화활동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닥을 잡아줬다고 강조했다. 수용자 교화가 곧 이타행이자 보현행의 회향처이기 때문이라는 게 최 위원장의 설명이다. “수용자 교화활동은 완장을 차고 생색을 내는 일이 아니에요. 정말 상(相) 없는 상인데도 불구하고 몇 차례 안온 뒤 ‘저놈의 죄인들은 해봤자 소용없어’라며 포기하는 스님과 불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중생구제하는 곳이 별도로 있습니까. 지장보살님은 왜 지옥에 계시면서 중생을 구제하고 계시는 겁니까’라고 되묻지요.”

최 위원장은 조계사합창단 지휘자를 맡으며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지은 작명가가 북쪽의 큰 절에 가보라는 말에 찾아간 곳이 바로 남양주 불암사. 첫 아이를 무사히 낳아 감사한 마음에 100일 불공을 드리다가 인연을 맺은 일면스님이 조계사합창단 지휘자 소임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대보살’이던 어머니와 매일 <천수경> 독경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었지만 삼귀의조차 모를 만큼 불교에 문외한이던 최 위원장은 조계사합창단 지휘자를 맡은 것을 계기로 불교공부에 뛰어들었다.

능인선원의 모태가 된 원심회를 통해 불교를 맛본 뒤 불광사 광덕스님 회상에서 본격적으로 불교공부에 들어갔다. 특히 1992년 광덕스님이 작사한 보현행원송을 세종문회회관에 올릴 때, 최 위원장은 합창단 노래 지도를 맡았다. 박범훈 전 중앙대 교수가 총지휘를 맡은 공연에서 최 위원장은 불광사 신도 중 노래에 소질이 있는 신도라면 다 모아 합창연습을 시켰다. 대다수가 아마추어인데다가 두 달 남짓한 짧은 연습기간에도 불구하고 밤낮없이 연습한 뒤 올린 무대는 감동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무대에 500명 넘게 올랐어요. 신심과 원력에 의한 천상의 목소리였어요.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환희심을 느꼈던 때였지요.”

최 위원장은 매일 새벽4시 기상한 뒤 2시간 동안 <천수경> <금강경> 독송과 참선을 하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할 만큼 불심이 깊다. 7년 전부터 금강선원과 인연이 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일요일마다 선원을 찾아 혜거스님으로부터 수행을 지도받고 있다. <금강경> 독송기도를 통해 세상 모든 게 다 감사하고 인연의 소중함도 깨닫게 됐다. 금강선원의 ‘탄허화엄학관’ 건립불사 화주보살로 나선 최 위원장은 100일 기도를 통해 불사의 원만 회향과 더불어 최근 인연을 맺은 탈북자 출신 불자 수용자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

최 위원장은 가톨릭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교정기관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며 수용자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데 불교계도 더욱 관심을 갖고 지원을 펼쳐주길 당부하며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전국 54개 교정시설에서 봉축행사를 열고 있어요. 그 봉축행사에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을 위시해 전국의 큰스님들이 수용자를 위한 특별법문을 해주셨으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네요. 특히 수용자 교화활동은 생색을 내기 위한 일이 아닌 만큼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원력과 자비심을 갖고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심문’ 최숙희 위원장은… 

1946년 12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최숙희(법명 자심문) 서울구치소 불교분과위원장은 문경여고를 거쳐 경희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서울여상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다가 출산과 함께 퇴직한 뒤 1979년 서울 조계사합창단 지휘자 소임을 맡으며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보현행을 강조한 광덕스님이 ‘수용자에게 찬불가를 가르쳐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30년 동안 수용자 교정교화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1987년부터 서울구치소를 다니며 교정교화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구치소 불교분과위원장 소임을 맡고 있다. 이같은 수용자 교화활동으로 1992년 국무총리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009년 제21회 포교대상 원력상(조계종 포교원장상), 2013년 제31회 교정대상 교정위원 자비상 등을 수상했다. 제3차 여성불자 108인으로도 선정됐다. 남편 이영락 전 KBS 예능국장도 수년간 부처님오신날 특별방송 제작 등의 공로로 지난 1992년 제5회 포교대상 특별상(조계종 포교원장상)을 수상할 만큼 독실한 불자다.

[불교신문3061호/2014년11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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