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작가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억불시대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비화

1996년 5월. 마을은 신록 완연한 봄날이지만 설악산 봉정암의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시 봉정암에 기도 스님으로 머물렀던 정념스님은 “법당서도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봉정암의 긴 겨울끝에 생명의 화신, 봄의 전령사처럼 찾아온 사람이 정찬주 작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념스님은 “백담사에서 봉정까지 봄기운이 올라오려면 50일이 족히 걸린다”며 “겨울암자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봄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과 사람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알 것”이라고 했다. 생전 처음 만난 스님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은 정 작가는 그 시절 <중앙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암자로 가는 길’로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암자’라는 매혹적인 부처님도량을 제대로 알린 장본인.

정 작가가 기억하는 그 날 스님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처음 본 스님께서 나를 알아보더니 봉정암 까마귀들이 헌식한 보은으로 귀한 손님 오는 날엔 예고를 해주는데 그렇잖아도 아침부터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어대길래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셨다.”

지난 9월25일 흥천사 주지 정념스님은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의 역사를 복원한 소설가 정찬주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정 작가 역시 마음써준 스님에게 감사해했다.

정념스님은 정 작가가 집필한 만해 한용운스님의 일대기 <유마경>을 읽고서 20질을 구입해 도반들에게 선물했을 정도로 정 작가의 작품세계에 이미 인연을 맺어놓고 있었다.

같은해 정 작가는 속리산 복천암에도 취재차 올라갔었다. 그는 복천암에서 만난 선승, 월성스님으로부터 한글창제의 공이 많은 신미대사의 이야기를 난생 처음 들었다. 이후 8년여가 흐른 뒤 또다시 복천암에 갔을 적에도 월성스님은 신미대사의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줄곧 그 얘기만 반복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신미대사가 비밀리에 복천사와 흥천사, 대자암 등에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어느새 작가에게 ‘화두’가 됐다. 지난해 8월 정 작가는 마침내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비밀이야기’를 역사소설로 풀어냈다.

기막힌 연(緣)은 계속된다. 세종이 신미대사와 첫 인연을 맺은 사찰이자 한글창제의 산실이었던 서울 흥천사의 현 주지가 바로 18년 전 봉정암에서 만났던 정념스님. 태조 이성계가 세운 원찰 흥천사는 우여곡절 끝에 최근 존폐위기까지 맞았지만 3년 전 정념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확 달라졌다.

흥천사의 ‘잃어버린 600년’을 복원하는 불사가 경내 곳곳 사찰 안팎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념스님은 “사찰에 깃든 역사와 사상을 문헌상 근거를 토대로 복원해 현대에 알리는 것 역시 불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며 “우리같은 스님들은 행정한다고 화두도 잘 못챙기는데 평생 불교를 화두로 훌륭한 작품을 쓰는 정찬주 작가야말로 정말로 고마운 포교사”라고 말했다.

소설은 조선 세종2년(1420) 태종비(妃) 원경왕후의 천도재가 열린 흥천사에 세종이 직접 참석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세종과 신미대사가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훈민정음 창제의 비화가 전개된다. 조선왕조 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왕으로 평가받는 세종. 그가 이룩한 찬란한 업적, 한글창제에 공을 세운 또 한사람이 있었으니 조선 초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이자 학승 신미대사다.

儒佛 싸움의 진흙탕에서

佛이 살아 남긴 ‘우리 글자’

“세종이 창안, 신미대사가 만든

스물여덟자 훈민정음 이야기”

지금까지 한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실제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 어디에도 없다. 소설에 따르면 집현전이 한글창제에 대해 전혀 가담하지 못했다.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조차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찬주 작가는 신미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나간다.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불(儒佛) 갈등과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을 비롯해 한글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까지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특히 한글창제에 영향을 끼친 불교사상은 특정종교의 한 분파가 아닌 민족정신의 중심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국불교가 훈민정음에 나타난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 작가는 말한다.

“세종과 신미대사가 배불숭유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의기투합해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백성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뜻이 통했던 까닭이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던 두 사람은 우리 글자를 만들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과 같이 만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져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소설에서 눈에 띄는 또하나의 ‘비밀’은 한글창제 배경에 ‘대장경’이 있었다는 사실. 대마도 정벌 후 조선과 일본은 매년 사신을 왕래시키며 화친외교를 폈고, 숭불로 돌아선 왜국은 조선 절에 있는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했다.

유교국가였던 당시 조선에서 세종은 계속되는 왜국 사신의 요구를 물리치고 오직 한 질밖에 없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끝끝내 지켜낸 반면, “부처의 가르침이 아무리 빼어난 진리라 한들 한자를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면서 백성의 눈을 뜨게 해줄 글자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깨우쳤던 것.

세종의 애민사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우리 글자로 손수 만들어 두루 알린 대목에서도 엿보인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신미대사의 노고에 대한 보답도 잊지 않았다.

금동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해서 신미대사의 주석처였던 속리산 복천사에 시주했으며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라는 존호를 내리라는 유언도 남겼다. 세종이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의미로 지은 ‘우국이세(佑國利世)’는 훈민정음 창제를 염두한 말이다. 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승직은 우리나라 시조 이래로 처음 내려진 것이다.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만들어낸 탄탄하고 웅장한 서사와 역사적 현장에 직접 들어온 듯이 생생한 묘사, 인간사에 대한 밀도높은 통창력을 지닌 작품이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극찬이 쏟아진 이유다.

소설가 조정래는 “작가는 소설의 존재이유를 새롭게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게 하는 큰일을 해냈다”라고 평했고, 한승원 작가는 “우매한 민초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한 위대한 자산인 우리 한글이 불교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해석은 우리 삶의 미래에 찬란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라고 말했다.

정호승 시인도 “분열과 고통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국민을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국민을 사랑해야 하는지 불교적 영성의 큰 가르침을 준다”라고 밝혔다.

농부의 노고를 글농사로 보답하려고 전남 화순의 이불재 서재에 호미를 걸어둔다는 정 작가는 소설 하나 탈고하면 뭔가 토해낸듯 목이 쉰다고 한다. 지난 9월25일 만난 정 작가는 다 쉬어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다음 작품은 왜란에서 희생된 이름없는 승병들에 관한 이야깁니다.”

[불교신문3046호/2014년10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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