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인간이 되고 싶었다

홍일대사 지음 / 불광출판사

중국 남산 율종의 문헌을 완벽하게 정리해 11대 조사로 추앙받는 홍일대사(1880~1942)는 본래 유화를 전공한 미술가다. 자유로운 예술가로 살던 그는 서른아홉에 출가했다. 근대 중국의 선지식 허운스님, 근대불교개혁을 주도한 태허스님, 중국 정토종 13대 조사 인광스님과 함께 근대 중국불교를 이끈 위대한 스님으로 꼽힌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홍일스님 관련 문헌을 찾기 어렵다. 불광출판사가 중국 역사를 바꾼 근대 4대 고승 시리즈의 첫 순서로 홍일스님을 소개했다. 책은 홍일대사가 직접 쓴 글을 엮은 것이다.

스님은 행장부터 남다르다. 거상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전서를 알았고, 15세에는 시를 지었으며, 17세에는 인장에도 조예가 깊었다. 1906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유화를 주전공으로 공부하면서 피아노를 배우는 등 회화, 음악, 시 등 예술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중국 11대 조사 홍일대사

사회개혁운동 이상 컸지만

사회모순 해결 벅차 좌절

귀국해서는 텐진공고에서 중문학과 음악을 가르치는 등 7년간 교편을 잡았다. 예술가로서 활동한 그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사회변혁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작품에는 중국 신문화 계몽운동의 성향이 담겨 있었다.

사회개혁에 대한 이상과 포부는 컸지만, 혼자서 사회모순을 해결하기는 벅찼다. 괴로워하던 그는 점차 염세적이고 비관적이 생각에 젖어들었다. 신경쇠약증까지 앓게 된 그는 1916년 일본 잡지에서 단식이 각종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읽고 효험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단식을 결심했다.

조용한 장소를 찾다가 알게 된 곳이 항주 서호 근처에 호포사였다. 방장 스님에게 청을 넣어 출가자와 함께 지내며 단식정진에 들어갔다. 20일간의 단식은 그의 삶을 바꿨다.

신경쇠약 치유하려 시작한

20일 단식 후 인생 바뀌어

출가자로 평생 불법 설해

남산율종 문헌 완벽 정리

사찰에 머물며 스님들을 가까이 지켜봤던 그는 출가자의 삶을 동경하게 됐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방에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사찰에서 먹던 음식을 그대로 만들어 먹었다. <보현행원품>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 경전을 읽으며 불심을 키웠다.

겨울방학을 호포사에서 지내던 그는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고, 1918년 랴오우(了惡)문하에서 출가했다. 항저우 영은사에서 수계를 받았다. 법명은 연음, 법호는 홍일이다.

스님은 계율을 전하는 데 있어 어려운 경전을 인용하기보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은 얘기를 불자들에게 전했다. 관대하라, 손해를 보라, 말을 줄여라,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라,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지 마라,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 하지 마라, 성내지 마라 등이다.

강연현장에서 진행했던 즉문즉설을 읽다보면 스님의 가르침이 더 와 닿는다. 살면서 찾아오는 역경에 대해서는 “고통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경을 통해 업장을 닦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잘 풀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 청정한 서원이 더 견고해진다”고 격려했다.

1918년 랴오우(了惡)문하에서 출가한 홍일대사는 항저우 영은사에서 수계를 받았다. 사진은 영은사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가족을 불러 이것저것 묻거나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며 “대화를 하다보면 미련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승에 대한 집착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왕생에 방해가 된다”고 주의를 줬다.

또 수계에 대해서는 “수계를 하고 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계를 받지 않은 사람보다 죄가 무겁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며 “스스로 역량에 따라 수지할 수 있는 만큼의 계를 받는 게 가장 좋다”고 설했다.

오늘날 선종에서 말하는 ‘백장청규’에 대한 스님의 견해도 흥미롭다. 스님은 연지대사와 우익대사가 “사람들 중에 <백장청규>를 받들어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율학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백장청규>를 비판한 것을 언급하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당나라 백장회해선사가 이 책을 찬술했으나 원나라 때 상당부분을 수정했기 때문에 원래의 면목을 찾아내기 어렵다”며 “가짜 책을 볼 필요가 무엇이 있겠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불교학 연구에도 남다른 업적을 기록했다. 스님은 취안저우(泉州) 개원사 존승원 안에 남산불학원을 세웠다. 일본의 대소승경률 1만여 권을 정리해 <불학총간(佛學叢刊)> 4책으로 만들었다.

또 도선 율조가 지은 ‘남산 삼대부’ 즉 <행사초(行事鈔) <계본소(戒本疎)> <갈마소(羯磨疎)>의 방점과 교주 작업을 했고, 송나라 원히 율사가 삼대부를 풀이한 삼기(三記) <자시기(資詩記)> <행종기(行宗記)> <제연기(濟緣記)>의 방점과 교주작업을 진행했다.

스님은 1942년 취안저우 온릉 양로원에서 입적했다. 7일 후 승천사에서 다비식이 엄수됐다. 원적 후 스님의 저술은 책으로 출간됐다. 역작 <사분율비구계상표기>를 비롯해 <남산율재가비람약편> <율학강론삼십삼종합정본> <남산율원문집> <홍일대사대전집> 등이 출판됐다.

[불교신문3046호/2014년10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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