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불광사, 불광 창립 4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개최

광덕스님이 1974년 불광회를 꾸리면서 시작한 불광운동은 ‘반야바라밀’ 사상을 통해 세상을 밝히자는 순수 불교운동이다. 스님은 불교의 생활화, 한글화, 대중화를 기치로 내걸고 월간 <불광>을 창간하고 불광법회를 여는 등 다양한 포교 및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불광법회를 창립할 당시만 해도 한국불교는 전통불교의 체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 사찰들은 초하루와 보름법회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일요법회를 중심으로 하는 불광법회 운영은 한국불교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82년 광덕스님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불광사를 건립했다.

불광회의 성공은 한마음선원, 구룡사, 능인선원 등 서울과 전국 주요 도시에 도심 포교당이 문을 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불광은 2004년 회주로 취임한 지홍스님이 중심이 되어 8년여에 걸친 중창불사 과정을 통해 2013년 10월 수도권 최대의 ‘도심전법도량 불광사’로 다시 태어났다.

방영준 교수 “광덕스님은 혁명가이자 행동하는 실천가”

이날 기조발제에 나선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광덕스님을 가리켜 “행동하는 실천가이자 혁명가였다”고 강조했다.

방 교수는 1953년 소천스님의 ‘금강경 독송 구국 원력대’와 광덕스님의 ‘바라밀 운동’의 첫 출발지로 거론되는 마산의 한 목욕탕 2층집에서 처음 스님을 만났다. 아홉 살 시작된 첫 인연은 평생 동안 이어졌다.

방 교수는 “불광회는 여느 절 법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며 “‘불광’이라는 월간잡지를 발행하고 불교합창단이 있고, 처음 들어 본 찬불가라는 노래도 불렀다”고 말했다. 방 교수는 “요즘말로 표현하면 스님은 매우 ‘쿨’하신 분이었으며, 법문을 하실 때는 광장에서 군중을 설득하는 혁명가를 연상케 했다”며 “특히 불교교리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면보다 행동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어 “현대 조직이론과 홍보 그리고 리더십 이론을 통합해 불광운동을 이끄셨다”며 “사찰 순례 때 항상 앞에서 산에 오르셨고, 초파일 연등행사 때도 여의도 행사장에서 조계사까지 도보 행렬의 맨 앞에 서서 불광의 제등행렬을 이끄는 등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보여주셨다”고 회상했다.

방 교수는 “광덕스님은 불광의 모든 구성원이 주인의식을 갖는 불광회가 되기를 염원하셨다”며 “스님은 떠나셨지만 그 원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실천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김정희 서울대 강사 “용성스님 사상 발전적으로 계승”

이어 광덕스님의 불광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백용성 스님과 소천스님과의 사상적 교류를 고찰한 논문들이 차례로 발표됐다.

우선 김정희 서울대 강사는 백용성 스님의 대각사상이 광덕스님의 불광사상 형성에 미친 영향과 그 의미를 살폈다. 용성스님은 불교의 현대화를 주창하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화엄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한국불교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선지식이다. 광덕스님은 용성스님의 손상좌로, 용성스님이 지향한 불교운동이야말로 한국불교가 길이 지켜 나가야할 표본으로 높이 평가했다.

김 강사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불교의 참여와 책임에 주목한 용성스님의 대각교 운동은 광덕스님의 불광운동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며 “불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법의 등불이 되어 스스로를 밝히고 자기 조국을 불법으로 가득 채우자고 주장한 광덕스님의 불광운동은 용성스님의 대각교 운동을 계승했다”고 밝혔다.

이날 김 강사는 “광덕스님은 용성스님의 인간관을 계승하면서도 이에 머물지 않고 조직화된 불광운동을 통해 불교 생활화를 확립함으로써 불교의 모순과 사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했다”며 “이런 점에서 광덕스님의 운동이 대중포교의 보다 발전된 모형을 제시했다”고 역설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소천스님 광덕사상에 결정적 영향”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1950년대 서울, 부산, 마산 등지에서 전개된 소천스님(1897~1978)의 <금강경> 독송 구국 운동은 광덕스님의 ‘바라밀 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음을 피력했다. 소천스님은 1953년부터 금강경을 변역해 5만권을 배포,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금강경을 읽자’는 독송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결성된 모임이 ‘금강경 독송 구국 원력대’다. 광덕스님은 소천스님이 이 운동을 전개할 때 실무적으로 보좌한 주역이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광덕스님은 선방 수행의 해제기간을 주로 이용해 소천스님의 <금강경> 독송 운동에 참여했다.

김 교수는 “(광덕스님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참선수행, 조실 시봉, 선방 소임을 보면서 소천이 주관하는 운동에 가담했다”며 “그의 은사, 도반들은 소천의 금강경 운동에 동참을 자제시켰지만 광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광덕이 이 운동 참여를 통해 체득한 실천성이 반야바라밀운동에 투영됐다”며 “소천에게서 나타난 운동의 한계성은 광덕의 불광법회를 통해 해소됐다”고 밝혔다. 이어 “소천의 <금강경> 독송운동은 실천적으로 전개됐지만 거점 사찰 확보,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많은 한계가 있었다”며 “광덕의 반야바라밀 운동은 불광법회로 대중화 토착화 됐다”고 평가했다.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불교 물줄기 새롭게 전환”

이어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전법의 선구자로서의 광덕스님을 재조명했다.

서 연구원은 “부처님은 전법을 강조하셨지만 사람들은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 주제에 남한테 무슨 말을 하랴’는 생각으로 전법하지 않았던 것이 한국불교 모습이었다”며 “광덕스님은 이와 같은 한국불교에 내재해 있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전환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서 연구원은 “깨달음을 위해 수행에 몰입하는 스님들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모든 스님들이 이것만을 지상 목표로 삼는다면 불법은 존재할 수 없다”며 “불광운동은 이와 같은 전법행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서 연구원은 “광덕스님이 전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법 운동을 펼치면서 신선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100여개 포교당이 생겨났다”며 “전법을 통해 자신의 신행을 완성하고 정토구현이라는 사회완성의 길로 나가는 것이 불광운동이 지향하는 바라밀국토의 이상”이라고 강조했다.

김응철 교수 “불광정신 불교계에만 머물러선 안 돼”

이날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김응철 중앙승가대 교수는 향후 불광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불광운동을 보편적인 사회운동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꼽았다. 즉 광덕스님의 사상을 보편적 가치관으로 전환시켜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광의 전법교화 활동을 수도권 지역에 국한하지 말고 전국으로 퍼트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의견이다. 이를 위해 불광정신과 사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찰을 묶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도 실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2002년 불광불교대학이 조계종단의 인가를 받으면서 불광사는 종단 소속 사찰로서 종단적 정체성을 확립했다”며 “현재 정식으로 종단에 등록하지 않은 사찰이 100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불광사는 전법교화의 역할이 쇠퇴하고 있는 사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종단 울타리를 넘어가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으므로 방황하는 사찰들을 대상으로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노하우를 전수하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김 교수는 불광사가 추진한 사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로 2010년에 설립한 ‘불광연구원’을 들었다. 단위 사찰 차원에서 연구원을 개설하고 전문 연구위원을 위촉해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

김 교수는 “연구원은 불광사와 불광법회의 새로운 발전 방안을 연구하고 구체적 실천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선봉에 서있다”며 “연구원 성과가 축적되면 불광은 물론이고 한국불교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불광사 회주 지홍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보현행원으로 중생의 마음 밭을 일구고 법등을 밝혀들고 전법으로 세상을 밝혀 온지 40 성상이 흘렀다”며 “이번 세미나를 통해 불광운동의 사상적 원칙을 다시 점검하고 미래 전법비전을 다시 만들어 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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