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이 시대 대장금’, 선재스님

직장 불교모임 만들고

용주사청년회 활동하다

화성 신흥사로 출가발심

 

독립운동에 의료봉사 부친

사찰에 음식공양 올리는 모친

宮 수랏간서 궁중음식 외조모

오늘의 선재스님 있게 한 ‘동력’

 

사찰음식 전문가로 유명세 타자

은사 스님, 속세에 휘둘릴까 걱정

“부처님이 강조하신 식문화는

질병치료 이전의 예방의학”

 

“저는 요리사도 의사도

과학자도 아닙니다.

그저 스님이면 됐지요…” 

선재스님은 바르고 깨끗한 음식이 사라지는 현실을 우려했다. 성장촉진제를 먹인 온갖 식재료들이 난무하고 편이적인 요리를 하기 위해 각종 약품을 쓰는 시대다. 스님은 “음식에 약(藥)이 아닌 것을 넣어서는 안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어? 수학여행 때 갔었던 신흥사(속초)가 여기에도 있네. 나중에 가봐야지.” 1970년대 사회초년병시절 직장동료들과 제부도로 놀러가는 길에 선재스님은 ‘화성 신흥사’ 안내판을 무심코 지나쳤다. 그 신흥사가 훗날 선재스님이 머리를 깎고 출가수행자로 다시 태어난 ‘고향’이 될 줄이야. 인연은 계속된다. 외조모랑 단골로 드나들었던 동네 목욕탕 주인이 갈때마다 카세트에 불경을 틀어놓길래 불자냐고 물었더니 대뜸 신흥사 신도라고 자랑삼아 말했다. ‘신흥사? 그래 한번 가보자!’ 신흥사 가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만난 목욕탕 보살님 왈. “신흥사 가는겨? 나랑 같이 갈까나?”

 

기독교 계열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 뒤늦게 불법(佛法)의 바다에 푹 빠진 선재스님은 용주사와 수원포교당서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다. 다니던 직장에 불교반을 만들었고 용주사에서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불심을 키웠다. ‘교회 주일학교처럼 불교도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불연(佛緣)을 심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 어린이불교학교에도 의지가 남달랐다. 그러던 중 난생처음 찾아갔던 화성 신흥사는 그야말로 다 무너져가는 농막이나 다름없었다. 낡은 법당에 부처님을 모시고 일자형 초가집에서 두 비구니 스님이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의 형상, 초가집 바로 앞 수도꼭지며 주변 산세까지 온통 전날밤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가물가물했던 꿈 속 작은 절이 눈앞의 신흥사와 너무도 흡사했다. 바람 든 무, 언 두부, 콩나물 뿌리까지 먹으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절살림을 살고 있었지만 당당하고 굽힘없는 두 스님의 모습에 또한번 놀랐다. 때마침 제 지내려고 찾아온 두 부부를 대하는 성일스님(現 신흥사 주지)의 남다른 ‘공심(公心)’을 느끼는 순간, 마음은 확고해졌다. ‘그래, 여기서 머리를 깎자.’

용주사서 정무스님의 설법 <부모은중경>을 듣고나서도 선재스님은 “출가밖에 길이 없다”고 여겼다. 부모 향한 가장 큰 효도는 뭐니뭐니해도 ‘모든 불행의 원인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8남매 중 여섯 번째 딸이지만 선재스님을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여겼던 부친은 약한 몸을 걱정하면서 애지중지 키운 딸의 출가를 만류했다. 모친은 눈물로 호소했고 선재스님을 유독 예뻐했던 외조모 역시 평생 함께 살자며 애원했다. 하지만 선재스님의 출가는 사실상 이들 세 어르신의 영향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출신 부친은 ‘시골의사’였다. 동네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침술치료를 해줬고, 집집마다 발품을 팔면서 의료순방도 했다.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집에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진료를 하면서 밥신세를 졌던 집에는 자식들에게 일일이 보리쌀과 국수를 싸주면서 답례를 하도록 했다. 어머니는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절에 공양을 올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값비싼 고급요리는 아니더라도 제철나물을 무치거나 가죽부각을 만들고 청포묵을 쑤어 머리에 이고 항상 절에 가셨다. 어머니의 음식솜씨는 외할머니를 닮았다. 외조모는 조선시대 수랏간 궁녀로 살면서 궁중음식을 몸소 익혔다. 외할머니 덕분에 궁중음식의 법도가 불교의 음식철학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터득했다. 아버지의 보시행과 어머니의 불심, 외조모의 손맛까지 두루두루 빼닮은 선재스님이 출가하자 “어디서 이렇게 솜씨좋은 행자가 왔느냐”며 여기저기서 칭찬이 쏟아졌다.

출가직후 공양주로 3년을 살면서 선재스님은 오래전 세운 원력을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청년회 시절 인연맺었던 도반들을 이끌고 신흥사 어린이불교학교를 본격 운영했다. 각양각색의 아이들을 접하면서 스님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음식습관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부모의 돌봄에서 벗어나 식습관이 제멋대로인 아이들은 거칠고 문제아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론 여러가지 원인이 중첩된 결과지만 스님이 절에 온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선 음식을 통한 힐링이었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른바 비행청소년들이 청정한 사찰음식을 섭취하면서 며칠간 절에 머물렀을 뿐인데 아이들의 비뚤어진 생각이 차츰 회복돼 갔다. 스님이 중앙대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사찰음식문화를 연구논문으로 채택한 이유다.

“부처님은 생전에 사람들을 만나면 맨 먼저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라고 물었어요. 인간의 삶과 사상, 몸과 마음의 근본에 깔려있는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신거죠. 부처님의 식문화는 병이 나서 치료하기에 앞선 예방의학이나 다름없어요. 저 역시 바쁘고 아픈 현대인들에게 일일이 묻고 싶어요. 당신들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 선재스님에게 사찰음식의 근본은 고기없이 풀만 먹는 채식이 아니다. 마음 속 깨달음을 지향하는 선식(禪食)을 추구한다. 계절음식과 양념에 대한 이론, 하다못해 주방의 그릇까지 <사분율>이나 <금강경>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실려 있다. 밥 한그릇 물 한모금을 내더라도 불법을 얹으라는 가르침도 스며있다.

“저는 요리사도 의사도 과학자도 아닙니다. 그저 스님이면 됐지, 무슨 욕심을 더 부려요? 부처님 가르침을 토대로 이 시대에 맞는 음식을 잘 만들어 함께 나누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귀하고 소중한 부처님 말씀 덕분에 제가 대접받고 살기에 늘 감사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지요. 저의 음식철학은 부처님 말씀에서 비롯되기에 세상 누구에게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1990년대 초 선재스님이 사찰음식으로 유명세를 타자, 낯모르는 사람이 스님의 이름을 따서 밥장사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은사 성일스님은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선재스님을 불러앉혀 “당장 옷벗고 나가라”고 호령했다. 엄동설한에 어디로 가느냐며 도반들이 매달려 은사 스님을 설득했지만 당시 성일스님은 가혹하리만큼 혹독했다. 너무나 섭섭하고 억울해서 한동안 은사 스님을 뵙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속세에 휘둘릴까’, ‘바깥바람에 물들까’ 노심초사 제자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알겠다며 선재스님은 눈시울을 붉혔다.

선재스님의 인터뷰는 지난 7월24일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 사찰음식강의실에서 이뤄졌다. 인터뷰 직전 선재스님은 차나 커피 대신 표고버섯냉면을 한그릇 내려놓고 먹으면서 하자고 했다. 찬기운이 왕성한 냉면에 표고버섯과 들기름, 배즙을 넣어 위장을 보호해준다는 ‘선재스님표 냉면’을 흡입하듯 다 비웠다. 30년이 훌쩍 넘는 선재스님의 수행과 삶에 깃든 온기와 맛을 한몸에 만끽한 기분이었다.


 

 

독일인도 환호하는 선재스님

유럽에서도 선재스님의 사찰음식은 인기다. 단순한 음식 레시피를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깃든 불교사상을 접목시킨 스님의 명법문이 늘 함께하기 때문이다.

2008년 한독(韓獨)수교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독일서 선재스님의 사찰음식전이 열렸다. 음식을 선보이는 요리전이 아니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문화전으로 꾸미기 위해, 선재스님은 관조스님의 작품 ‘한국의 꽃살문’을 더했다. 한국그릇의 미(美)를 대표하는 다기와 옹기, 목기도 선보였다. 애초 예상했던 관람객 300명을 뒤엎고 무려 1300여명이 몰려들어 한국불교문화에 감탄을 쏟아냈다.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현지 언론까지 가세하자 당시 독일대사는 선재스님에게 한국불교와 한국이 사찰음식을 충분히 이야기할만한 마당까지 펼쳐줬다.

“한국의 사찰음식에는 짜고 매운맛을 뺍니다. 오신채를 넣지 않아요. 불필요한 양념과 조미료를 쓰지 않아요. 무엇을 넣었다고들 자랑하는 시대에, 음식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하나라도 더 빼내고자 하는 뺄셈의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모든 생명은 둘이 아닙니다. 말못하는 채소도 잘못 다루면 아파하지요. 벌이 꽃을 해치지 않고 꿀을 따듯, 그러한 마음으로 만생명을 다뤄야 합니다.” 이 날 선재스님의 법문에 1000여명의 독일인들은 일제히 환호하면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한국음식의 최고의 브랜드인 김치 역시 선재스님의 설법으로 유럽인들의 마음깊이 새겨졌다. “값싼 배추라고 해도, 그 배추에는 수많은 농부들의 혼과 손을 거쳐 햇빛 바람 공기를 머금고 우리앞에 온 우주생명체입니다. 냉한 배추에 따뜻한 무와 생강, 고추, 곡식과 다시마, 해초, 간장까지 땅속 땅위 하늘에 달린거 물속에 사는 것까지 다 넣어 생명을 이뤄낸 것이 바로 김치죠. 위대한 수행의 결과 아닙니까.” 음식을 그저 ‘맛있다’ ‘맛없다’로 규정하며 살았던 유럽인들은 선재스님의 법문을 통해 사찰음식의 가치를 전해듣고 한국불교의 진면목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2009년부터 매년 독일의 대학생들은 선재스님을 찾아, 한국의 사찰음식을 찾아 한국에 온다. 선재스님은 인터뷰가 끝나자 “내일 독일 학생 50명을 만나야 한다”면서 갈길을 재촉했다.

[불교신문2935호/2013년8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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