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자연의 소리

 

모든 것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불법<佛法>

만물이 진리 말해주나 듣고보지 못해

송나라 때 문장가로 유명한 소동파(1036~1101)가 동림상총(1025~1091)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제가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고자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스님께서 이 미혹한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거사님은 이제까지 어느 스님을 만나셨습니까?”

“저는 여러 고을을 전전하며 스님들을 많이 만났지만, 아직도 공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상총이 말했다.

“거사님은 어찌 무정(無情) 설법은 들으려 하지 않고, 유정(有情) 설법만을 청하십니까?”

소동파는 여러 선사들을 만났지만 ‘왜 무정설법은 들으려 하지 않느냐?’는 말을 처음 들은 지라 의문을 품은 채 집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녘 온 마음을 기울여 선사가 던진 말을 참구하다가 마침내 폭포 앞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의 경치 그대로가 부처님의 법신이로다’라는 오도송을 남겼다.

필자는 소동파의 깨달은 경지를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등록〉에서는 “산과 시냇물과 대지가 법왕의 몸을 그대로 드러낸다(山河及大地全露法王身)”고 하였다. 상총선사가 말한 것처럼 모든 만물이 우리에게 진리를 설해주건만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동파가 깨닫기 전에도 자연의 소리와 산의 경치는 불심(佛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나 선사들의 깨달은 세계를 표현하는 문구를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하는데, 〈법화경〉에서 유래된 말이다. 화엄에서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불법’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봄 학기에 경주 동국대 강의가 있었다. 올 봄에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벚꽃이 피기 전에는 아름다운 자태의 꽃들이 피었는데, 그 다음 주에는 벚꽃이 만개한 모습을 보았다. 또 그 다음 주에는 벚꽃은 졌지만, 붉고 흰 복사꽃이 피어 있었고, 그 다음 주에는 복사꽃잎이 떨어지자, 작은 사과꽃과 배꽃이 피었다. 또 다음 주에는 붉고 흰 찔레꽃이 피었고, 그 다음 주는 찔레꽃이 시들하더니 아카시아가 온 교정에 머물러 있었다.

해년마다 무수한 꽃들이 핀 것이 기정사실이건만 나는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한정 베풀어주고 있건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만용 때문이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모습으로 진리를 설하건만 예사로 보아 넘기고, 대나무는 꼿꼿한 곧음을 보여주건만 우리는 예사로 보아 넘긴다. 소나무는 한결같지 않은 마음을 늘 여일(如一)하라고 가르치고, 대나무는 이기심대로 움직이는 간사한 마음을 강직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옛 선사들은 대나무를 그려 개인 방에 걸어두었는데, 위로 뻗은 모습은 곧음을, 속이 빈 것은 무심(無心)을 상징한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같은 사물이라도 어떻게 보고 형상화하는가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다”고 하였다. 법을 구하고자 하는 오롯한 마음만 있다면 보이는 모든 사물이 공부하는 방편이 됨이요, 들리는 어떤 것이든 나를 공부케 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즉 공부하고자 하는 구도심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물이 내게 진리를 설해준다. 송대의 유학자 주무숙(1017~1073)이 불인요원(1020~ 1086)선사에게 물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눈앞에 보이는 푸른 산들이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지 않은가?”


[불교신문2931호/2013년7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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