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택스님(왼쪽)이 지난 11일 사숙인 흥교스님을 만나 은사 성철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다.

“‘그래도 종자라도

남겨놓아야지

다 주지시키고 나면

우리 집안에 공부할 사람

없지 않겠느냐’

 

범어사 주지 시절

지효스님에게 전해들은

사형(성철스님) 말씀

잊히지 않습니다

노(용성)스님이 임제선을

내세웠다면

은사 동산스님께서는

선.교.율 세 가지 전통

통합시키려고 노력

성철 사형님은

선불교 사상 굳혀…”

흥교스님은…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수지. 상원사 범어사 칠불사 만덕사 벽송사 등에서 14안거 성만. 범어사.대각사.성주사 주지, 조계종 제5.6.8.9대 중앙종회의원,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역임. 선찰대본산 범어사 전계대화상, 학교법인 원효학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범어사 이사장으로 창원 성주사에 주석하고 있다. 국민훈장 동백장, 조계종 종정상, 총무원장상 등을 수상했다.

 

“성철스님은 은사인 동산스님을 참으로 존경하고 정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여느 상좌들처럼 은사를 가까이서 시봉하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 상좌보다 더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신 분이 성철스님입니다.

잘난 제자는 스승 못지않은, 아니 스승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만큼 되어야 정말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할 만하지요. 옛글에도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푸른 색깔(靑)은 쪽(藍)에서 나오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말이지요.

 

성철스님은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공부를 성취, 대각(大覺)을 이룸으로써 스승의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시지 않았습니까? 제자가 스승을 드높이는 일이 이보다 더한 일이 있겠습니까? 성철스님이 스승 동산스님 열반 후 쓰신 동산스님의 비문을 보면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정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 비문은 천하명문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설 다음날인 정월 초이튿날. 우리 일행은 흥교(興敎)스님을 뵈었다. 스님은 동산스님 상좌로 성철스님과는 사형사제간이다. 흥교스님은 사형 성철스님과의 법연, 그리고 동산스님의 은사인 용성스님과의 인연담과 용성-동산-성철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여러 이야기를 시간가는 것도 잊고 많이 말씀해주셨다.

 

- 세 분 선지식께서는 스승과 제자이시지만 사상 면에서는 서로 다른 점이 있는 걸로 압니다. 사숙님(흥교스님)께서는 이를 더 잘 알고 계신 걸로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성 노사(老師)께서는 한국불교의 정통계율과 선(禪)불교의 전통을 회복시켰고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시지 않습니까.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분이십니다. 용성 노사께서는 3.1운동이후 6개월간 형무소에서 복역했지요. 그때 나의 은사이신 동산스님께서는 용성 노사의 옥중 뒷바라지를 지극정성으로 하셨지요.

은사스님은 1913년 출가한 후, 1965년 열반에 드실 때까지 평생토록 일본화한 한국불교로부터 한국의 선불교와 계율을 부흥시키려는 노스님의 정성을 당신의 출가본사인 범어사를 기반으로 충실히 계승하셨지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진행된 불교정화운동을, 한국불교계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리고 3번이나 종정을 역임하면서 일본화된 한국불교를 정화하여 독신수행승인 비구주의와 채식주의의 한국불교전통을 성공적으로 회복시켰습니다. 사상 면에서 본다면 노스님이 임제선(臨濟禪)을 내세웠다면, 은사스님께서는 선(禪).교(敎).율(律) 세 가지 전통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하셨다고 봅니다. 성철 사형님은 노스님의 선불교 사상을 굳혔다고 봅니다.”

- 그래서인지 스님(성철스님)과 노스님(동산스님)의 관계가 서먹했다는 이야기도 항간에서 나오는 가 봅니다.

“그건 전혀 모르는데서 나오는 말입니다. 사형님이 은사스님을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모신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입니다. 부자간에도 생각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고 특히 사상 면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이 아들이 아니다 하겠습니까? 나는 사형님이 ‘나는 우리 스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사형님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정성은 남들은 모른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 스님께서는 사형님에 대한 회고담이 많으실 텐데요….

“할 말 많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면 나는 사형님의 사랑을 나만큼 받은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하나하나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범어사 주지에 추대되었을 때입니다. 당시 사형님은 종정으로 계셨고 녹원스님이 총무원장이셨을 때지요. 총무원에서 임명장이 근 두 달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어요. 당시 지효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다녀오시고 나서 안 사실입니다. 지효스님이 사형님께 이렇게 말했답니다. ‘스님, 범어사에 내려가셔서 사십시다. 스님께서 직접 챙기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니 사형님께서 나의 일 때문인 줄 아시고는 그 자리에서 서울에 전화하셨답니다. ‘그 범어사 주지건 얼른 처리하라’고. 그러고서 사형님은 지효스님께 말씀하셨답니다. ‘그래도 종자라도 남겨놓아야지. 다 주지시키고 나면 우리 집안에 공부할 사람 없지 않겠느냐’고.

노스님 49재 때인가 오셔서는 나를 보고 ‘흥교, 니 눈이 너무 번쩍거린 데이. 눈 좀 감아라’ 하셨어요. 내가 주지할 때도 오신 적이 있어요. 그 때 내가 손님 대접하느라고 차를 끓여 직접 따라주고 있으니 사형님이 이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니, 주지한다 카더니(하더니) 사람들한테 차 따라 주고 있네. 이눔이가(이놈이) 산중기생 다 됐구나.’ 하셨어요.”

- 듣고 보니 스님께서 사숙님을 많이 좋아하셨나 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마음 찡한 말씀이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왜 내가 사형님이 범어사 내원암에 계실 때 노스님과의 일화를 얘기한 적이 있지요. 사형님이 노스님께 그러셨답니다. ‘스님, 전라도 출신 스님 중에 유명하신 스님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러면서 전라도 사람 험담을 노스님 앞에 늘어놓았답니다. 노스님은 한참을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왜? 전라도 출신 스님들이 참 많지.’ 그러시면서 어느 스님도 전라도 출신이고 어느 스님도 전라도 출신인데 다 유명하신 분이 아닌가 하셨답니다. 그 말끝에 노스님은 ‘나도 전라도지’ 하셨답니다. 이 이야기는 사형님 젊은 시절 일화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내게도 직접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흥교, 니도 전라도 아이가? 그런 전라도가 돼야 해.’ 하셨어요. 나는 사형님의 그 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 후학들에게 한 말씀해 주시지요.

“사형님이 얘기해 주신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만공스님과 스승 경허스님 이야기예요. 만공스님이 앓아누웠을 때 경허스님이 약을 지어주었답니다. 그래놓고서는 약값을 제자에게 받았답니다. 헌데 그 약값이 시세의 3배나 되었답니다. 만공스님이 덕산장에 가서 알아보니 그렇더랍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약 사주고 3배나 울궈먹은 거지요.

또 있어요. 경허스님의 허리띠가 하도 예뻐서 만공스님이 탐을 내니까 그것도 곱절 값을 받고 제자에게 팔았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그랬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더 재밌는 이야기는 바로 이거예요. 깊은 산속에 스승ㆍ제자가 딱 둘이만 있는데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한 사람이라도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답니다. 그 때 만공스님이 그랬답니다. ‘스님 날 잡아먹고 스님은 불법홍포 하세요.’ 그러면서 만공스님은 그러셨답니다. ‘그 분은 내가 한 이 말에 눈 하나 깜짝 않고 날 잡아먹고도 남았을 거다’라고. 스승과 제자가 어떤 사이입니까? 우리는 어른 스님들의 그런 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교신문 2891호/2013년 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