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진 거북들의 시간

엄 정 숙

내 손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낯빛은 납빛으로 변했다. 멋쟁이를 실은 보트가 붉은 삼각깃발 부표를 향해 남실남실 떠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멋쟁이의 캐노피천막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나도 따라 뛰었다. 천막 안을 두리번거리던 아버지는 음료수가 담긴 스티로폼박스의 뚜껑을 벗겨 들고 뛰어나갔다. 나는 엉겁결에 물고기무덤에 꽂힌 노를 뽑아들고 뒤따라나갔다. 옷을 훌렁 벗어던진 아버지는 들고 나온 스티로폼박스 뚜껑을 바닷물에 휙 던지고 내 손에 쥐인 노를 홱 낚아채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나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수영 못하시잖아요!” 나는 아버지가 수영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남들처럼 강이나 바다로 놀러가기는 했었으나 가슴팍 이상의 물속으론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물 가장자리에서 바닥을 짚고 물장구나 치다 올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넓고 깊은 바다로 뛰어든 것이었다. 스티로폼뚜껑에 납작 엎드린 아버지는 노를 입에 물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아니, 헤엄이라기보다 물장구를 쳤다는 표현이 맞지 싶다. 물장구든 헤엄이든 벙거지를 뒤집어쓴 아버지는 그런대로 물 주름을 접어 뒤로 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아버지가 벗어던진 옷을 들고 바닷물이 발등을 덮는 곳에 멈추고 두 눈의 초점을 하나로 모아 아버지와 멋쟁이의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어디 작년 같겠어요? 올핸 날이 좋을 거라잖아요. 네? 아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디 하루라도 밀린 적 있나요? 꼬박꼬박 찍을 거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무슨 좋은 소식인지 휴대폰을 끊고 웃는 멋쟁이의 얼굴은 꽃다발처럼 환했다. 나는 멋쟁이의 자전거 앞에 달린 소쿠리 속 비닐봉지를 손가락으로 한 번 꼭 눌렀다 떼었다. 이거 뭐예요? 이거? 밥이랑 반찬이야. 누가 먹을 거예요? 음, 아기토끼하고 늙은 거북이가 먹을 거야. 혼자 있니? 네, 아버지는 밀린 숙제하러 나가셨어요. 밀린 숙제? 저도 토끼를 키운 적 있어요. 나는 멋쟁이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두기 위해 재빨리 말했다. 노랑머리 삼촌 집에 살 때였어요. 멋쟁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을 뒤로 흔들었다. 잘 자거라. 토끼 꿈꾸고. 멋쟁이를 실은 분홍색 자전거는 밥집천막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꼼짝도 않고 서서 멋쟁이가 흘리고 간 잔영을 천천히 지웠다.

멋쟁이의 말대로 그날 밤 나는 토끼 꿈을 꾸었다. 하얀 솜뭉치 같은 애완토끼는 주먹만 했다. 다 크면 얼마만해요? 글쎄, 요만 할걸. 노점상은 두 손을 바가지처럼 오므려 허공을 폭 떠 보였다. 새끼도 낳나요? 어디 보자. 노점상은 토끼 두 마리를 번갈아 들고 뒷다리 새를 까보았다. 요렇게 한 쌍이구나. 아버지, 사주셔요. 안 돼, 냄새나. 제가 청소 잘할게요. 안 된다니까 그러네. 키우고 싶어요. 잘 키울 자신 있어? 네. 나는 심할 때마다 케이지의 빗장을 열었다. 토끼들은 마당의 무성한 풀을 뜯다가 어스름이 되면 케이지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토끼들이 똑똑해요. 저녁이면 집으로 들어가요. 그걸 귀소본능이라고 하는 거다. 토끼들은 노점상이 폭 떠 보인 허공보다 훨씬 커졌다. 늙은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왔다. 아니, 저눔애 토깽이는 워디서 나타난겨. 망할노무 토깽이! 이 가뭄에 채수값이 금값인디 이걸 다 어쩐다냐, 워디 잡히기먼 혀봐라! 아버지, 토끼 한 마리가 안 보여요. 그러게 내가 빗장을 열어놓지 말랬잖니, 구석구석 잘 찾아봤어? 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요. 에이 참 내, 그럼 같이 찾아보자.

자, 오늘의 숙제야. 나는 아버지가 내미는 문제집을 공손하게 받았다. 일찍 시마이하는 날 시험 칠거야. 하나 틀리면 한 대인 거 알지? 네. 나는 모기소리 만하게 대답했다. 문제집은 만날 그렇듯이 하단 모서리 다섯 페이지쯤이 작은 삼각으로 접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콧수염과 노랑머리와 함께 엉덩이를 까딱 치켜들고 안전화의 끈을 바짝 조인 뒤 발을 쿵쿵 구르며 연장주머니를 허리춤에 둘렀다. 세 사람의 적 벽돌색 안전화는 뭉툭한 앞부분이 상처투성이였고 새것이었을 때 보라색이었던 연장주머니는 빛이 바래있었다. 오전 참 때가 되는 세 시간 후면 얼굴을 또 볼 일이었지만 나는 세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배꼽 절을 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얀색 안전모를 옆구리에 낀 세 사람은 입에 문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이며 밥집천막 모퉁이로 사라졌다. 제 주인을 따라가는 담배연기의 꼬리가 사라지자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문제집을 펼쳤다.

날개 하나에 청색 테이프를 붙이고 정신없이 도리질치는 벽걸이선풍기에선 헬리콥터 소리가 났다. 헬리콥터가 일으키는 바람에 문제집의 페이지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파닥거렸다. 몸통을 팽이처럼 돌렸다. 바람이 옷 속으로 들이쳐 내 몸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팔다리를 들어 올렸다. 날아라, 슝 슈우웅.

나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비록 학교에 다닌 적은 없지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아버지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어디선가 새것과 다름없는 깨끗한 교과서를 구해오고 새 문제집을 수시로 사 왔다. 나는 가끔 시험도 치러야했고 틀린 개수만큼 매를 맞고 벌도 서야 했다. 매는 매번 살가죽에 흔적을 남겼고 벌은 매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가스통 옆에 세워진 멋쟁이의 분홍색 자전거가 눈 속으로 달려왔다. 나는 애벌레의 흉내를 내며 꿈틀꿈틀 일어났다. 앙상한 두 발을 샌들에 꿰었다. 캥거루처럼 폴짝 뛰어 자전거 앞에 쪼그리고 앉아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받침대 위에 올라진 뒷바퀴가 허공을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라 달려!

타고 싶니? 나는 벌떡 일어나 브레이크를 잡았다. 멋쟁이가 압박붕대 속 팔목을 긁적이며 웃고 있었다. 나는 멋쟁이의 붕대 속 맨 팔목을 본 적 있었다. 컨테이너로 온지 한주 쯤 되었을 오후 참 때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삐뚤빼뚤한 식탁을 바로잡아놓고 나가려는데 멋쟁이가 손을 까불렀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밥시간 때 말고는 밥집천막에 가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멋쟁이가 연거푸 손을 까불렀다. 나는 머뭇머뭇 주방 안으로 들어가 체벌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두 손바닥을 허벅지에 붙이고 섰다. 거기 앉아.

멋쟁이가 빙긋 웃으며 맞은편으로 턱짓을 했다. 나는 국수를 한 움큼씩 건져 사리를 만드는 멋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멋쟁이는 국수 몇 올을 건져 손가락에 돌돌 감았다. 자, 아 해. 나는 새끼 새처럼 입을 아하고 벌렸다. 맛있니? 네, 쫄깃쫄깃 맛있어요. 근데 너, 쓰레기랑 젓가락 줍고 그러는 거 네 아빠가 시켜서 하는 거니? 아니요. 제가 그냥 하는 거예요. 그래? 기특하구나. 더 줄까? 나는 입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국수를 씹으며 멋쟁이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굵은 지렁이 같은 바느질자국이었다.

현장 종료를 앞두고 하늘은 시꺼먼 바윗돌을 굴리더니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끝마칩시다! 인부 하나가 망치를 번쩍 치켜들고 화살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냅다 달려 밥집천막으로 뛰어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무기를 번쩍 치켜든 장수와 같았다. 인부들은 말발굽소리를 내며 장수를 따라 들어와 말갛게 치워진 식탁을 점령했다. 멋째이아지매요! 아까 낮에 묵던 돼지고기 좀 있는교? 인부 하나가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흔들며 막걸리처럼 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잘 타고 있는 담배의 허리를 분지르며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인부들은 돼지고기가 나오기도 전에 선 채로 양재기에 막걸리를 콸콸 쏟아 쭉쭉 들이켠 뒤 돌아가고 고단한 하루를 밥집 뒤 컨테이너 날바닥에 눕히는 벙거지와 콧수염과 노랑머리만이 엉덩이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콧수염은 두 아이의 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도시로 나갈 궁리라며 막걸리를 쭉 들이켰다. 노랑머리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연상의 이혼녀와의 결혼을 탐탁치 않아하는 노모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며 막걸리를 쪽쪽 빨아 삼켰다. 벙거지는 연신 부럽다는 말만 하며 막걸리 양재기를 연거푸 두 번이나 비웠다.

막걸리 하실 줄 아시면 이리 오셔서 목 좀 축이실래요? 벙거지가 양재기를 쳐들었다. 식탁 닦던 손을 멈추고 벙거지에게 다가가 막걸리 반잔을 받아 들었다. 무슨 공부를 해요? 공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애가 그러던데요, 밀린 숙제하러 나갔다고. 벙거지는 얼굴을 붉히며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에이, 애한테 어디 바람피우러 간다고 말할 수가 있나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콧수염과 노랑머리는 웃음을 빵 터뜨렸고 나는 얼굴이 홧홧했다. 사람 참 무안하게 만드시네, 그럼 애는 밀린 숙제가 뭐라고 믿는데요? 걔요? 걔는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 엄마를 찾는 거라고 믿지만, 사실 난 나달나달하게 헤진 내 인생을 기워줄 여자를 찾는 거죠. 에휴, 죽기 전에 이 숙제를 마칠라나 어쩔라나. 벙거지는 깊숙이 눌러쓴 벙거지의 양 끝을 귀밑으로 잡아당겼다.

세 사내는 막걸리 병속의 탁한 내장을 깔끔하게 발라 옆 식탁에 세우기 시작했다. 굵은 소나기의 몸을 뚫고 나온 가느다란 빗줄기는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비명소리가 내 귓속을 찢은 것은 세 사내가 볼링 핀만큼 세웠다 쓰러뜨린 막걸리 빈병들을 쓰레기자루에 모조리 쓸어 담은 한참 뒤였다.

아버지! 잘할게요! 잘할게요! 뒤바람막이를 젖혔다. 문이 활짝 열려진 컨테이너 안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싹싹 빌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스무날 가까이 보아온 아이는 나무랄 데가 없는데 무슨 야단맞을 짓을 한 모양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이는 늘 인부들이 허출한 밥주머니를 꽉꽉 채우고 돌아간 다음에야 뒤바람막이를 살며시 들추고 들어와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고 빈 술병을 거둬다 상자에 집어넣곤 했다. 삐뚤빼뚤해진 식탁을 바로 잡아 놓은 뒤에 아주 적은 양의 밥과 반찬을 식판에 담아 아끼듯이 조금씩 먹곤 했다. 벙거지가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아이를 공사판으로 데리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오질 없는 어른보다 백배는 나았다. 이름이 뭐니? 인형이예요, 김인형. 인형? 미안한 말이지만 넌 꼭 수수깡인형 같구나. 자, 이것도 먹어봐. 골고루 먹어야 살도 찌고 키도 크지. 아이는 풀꽃처럼 방긋 웃었다.

가구도 없는 컨테이너 안에서 무엇을 부수는지 우당탕 쿵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이의 손바닥 비비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옆방의 콧수염과 노랑머리가 말려 주겠지 했다. 그러나 쿵쾅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들여다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어지러이 발 도장을 찍어대다가 행주를 팽개쳤다.

자, 봐! 몇 문제나 틀렸는지! 방안엔 책과 공책들이 나뒹굴고 팬티바람에 벙거지만 뒤집어쓴 벙거지가 파랗게 질려있는 인형 앞에 거꾸로 쥔 망치를 내젓고 있었다. 목수들이 사용하는 망치는 일반 망치와 달리 자루가 길다. 긴 망치 자루는 회초리라고 하기엔 무시무시한 흉기였다. 어쩌자고 못난 사내들은 화가 나면 밥 벌어먹는 도구를 들고 설치는 것일까. 내 못난 사내도 그랬었다. 걸핏하면 회칼의 끝을 세워 내 얼굴 한치 앞을 난도질하곤 했다. 그러다 결국 내 한쪽 눈에 무늬를 새겨 넣어 나를 진짜 멋쟁이로 만들었다.

굳게 닫힌 옆 방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었다. 콧수염과 노랑머리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입모양으로 이리 와 하며 팔을 벌렸다. 아이는 자궁을 막 빠져나온 임팔라의 새끼처럼 네발을 휘청거리며 다가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새끼 임팔라를 포옥 감싸 안았다. 새끼 임팔라는 목에 걸린 울음가시를 딸꾹딸꾹 밭아내기 시작했다. 벙거지는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오뚝이처럼 끄떡거리며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로 킬킬거렸다. 걔, 유령이예요, 유령. 이 세상에 없는 유령.

젓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바짝 튀겨진 갈치꼬리는 식판에서 미끄러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갈치꼬리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고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오이냉국에 밥을 말아 후딱 먹어치웠다. 주방을 향해 배꼽 절을 했다. 잘 먹었습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일일장부를 들여다보는 주인도 멋쟁이 대신으로 온 늙은 찬모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멋쟁이의 분홍색 자전거가 세워졌던 자리에 대신 세워진 빨간 스쿠터를 흘겨보고 내 자전거를 끌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목적지가 생겼다. 목적지에 희망이 있다. 희망을 향해 목적지로 달린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멋쟁이는 아버지의 희망이자 목적지이기도 했지만 내 희망이자 목적지였다. 아버지의 뾰족한 수이기도 했지만 내 뾰족한 수였다.

아버지가 내게 자전거를 사준 것은 멋쟁이를 우연하게 만난 다음날이었다. 현장에 목자재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목수들은 하루 일하고 이틀 쉬기도 하고 반나절 일하고 하루를 쉬기도 했다. 목수들의 뒷일을 하는 아버지와 콧수염과 노랑머리도 덩달아 쉬어야 했다. 목자재가 언제 공급 될지 모르니 타지에 있는 집에 가기도 그렇고 바람도 쐴 겸 무료한 시간이나 때우자며 노랑머리가 낚시를 제안했다.

방파제 입구에서 일회용 낚싯대와 갯지렁이를 산 세 사람은 유월의 태양을 정수리에 얹고 온돌처럼 달구어진 테트라포드에 앉아 부지런히 갯지렁이를 갈아 끼웠다. 나는 음료수 페트 병을 주워 들고 갯바위를 돌아다녔다.

세 사람은 버들잎 같은 치어들에게 미끼만 도적맞을 뿐 눈먼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나는 페트병 가득 작은 게를 잡아넣었고 따개비도 따 넣었다.

노랑머리가 오래전 언젠가 한번 어느 해수욕장에서 도다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노랑머리에게 잡힌 도다리가 근처 양식장에서 흘러나왔을 거라는 둥 적조에 떠올랐을 거라는 둥 갖가지 예측을 하며 아버지와 콧수염이 눈을 끔쩍거리며 킬킬거렸다. 화가 난 노랑머리가 입술을 꽈배기처럼 꼬아 내밀어 놓고는 한 낚시꾼에게 근처에 양식장이나 해수욕장이 있냐고 물었다. 낚시꾼은 두 곳이 다 있다며 허공에 지도를 그려주고 해안가로 가는 지름길도 알려 주었다. 에이 씨이, 따라와. 노랑머리는 자신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입증시켜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잰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나는 모래를 걷어차며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사장 정 중앙자리 캐노피천막 앞의 여자는 매우 낯이 익었다. 보라색 색안경을 쓰고 왼쪽 손목에 빨간색 아대를 찬 여자는 멋쟁이가 분명했다. 멋쟁이는 ‘자연산회 막 썰어 드립니다’라고 쓰인 나무 입간판을 천막 입구에 세우는 중이었다.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의외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을 거짓말처럼 우연하게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세 사람은 세상이 참 좁니 마니하며 호들갑스런 인사를 건넸다. 어쩌면 그렇게 하루아침에 밥집을 그만 둘 수가 있느냐는 둥, 당신을 대신해 온 늙은 찬모의 음식솜씨가 당신만 못하다는 둥, 당신처럼 청결하지도 않다느니 어쩌고저쩌고 너스레를 떨었다. 각자가 멋쟁이의 남편이라도 된 냥으로 맨손으로 모래구덩이를 파고 입간판을 단단히 심은 뒤 어깨를 쫙 펴고 손바닥을 딱딱 두드리며 뭐 더 시킬 일이 없느냐며 설레발도 쳤다. 멋쟁이는 마침 잘 됐다며 평상을 재조립해달라고 했다. 두해 전 여름에 장사가 끝난 뒤에 해체해 보관한 평상인데 다시 조립해서 써야한다며 철사 줄에 꽁꽁 묶인 각목더미를 보여주었다. 세 사람은 연장주머니 대신 낚싯대를 들고 온 걸 아쉬워하며 내일이라도 공구를 가져와 조립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멋쟁이는 정리가 완전히 끝나는 모래쯤이면 수족관에 자연산 활어를 가득 채울 거라며 빈 수족관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가더니 홍합 한 냄비와 소주를 들고 왔다. 세 사람이 홍합의 속살을 파내 입에 넣으며 여자들의 그것과 꼭 닮았다는 둥 어쩌다는 둥 낄낄거리며 낙엽 같은 얼굴을 노을빛으로 익히는 동안 나는 페트병 속에 잡아넣은 게와 따개비를 바다로 돌려보냈다. 세 사람의 갯지렁이는 종이 곽 속에서 고대로 말라죽었다.

콧수염과 노랑머리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목수들의 어깨를 둘러 뺄 만한 목재가 들어오려면 한 사나흘은 기다려야 된다는 바람에 콧수염과 노랑머리는 집에 다니러 갔고 갈 곳이 없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멋쟁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해수욕장 가는 길목의 한 자전거 가게 앞에 멈추었다. 어떤 게 맘에 들어? 나는 멋쟁이의 자전거 색깔과 똑같은 분홍색 자전거를 손으로 짚었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안 돼, 이걸로 해. 아버지는 짙은 회색 자전거를 골랐다. 바구니가 없잖아요. 바구니에 담을 것도 없잖니. 아버지의 말대로 바구니가 달렸다한들 바구니에 담을 것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새부리처럼 내밀었던 입술을 귀 밑으로 끌어올렸다. 한 번씩 뒤돌아보며 뒤따르는 아버지에게 웃음을 벙긋벙긋 던져주며 페달을 밟았다.

어휴, 그때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아요. 하여간에 눈이 여기까지 푹푹 빠지는 거예요. 이만큼요. 아버지는 세운 무릎에 손날을 그었다. 얘 백일에 맞춰서 왔는데 사라졌더라고요. 얘가 얼마나 울었던지 목이 다 쉰 거예요. 그 많은 빚도 다 갚아줬거든요. 얘를 여기 이 점퍼 속에 넣고 찾으러 나섰죠. 아버지는 촉촉해져가는 눈빛으로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빚이 더 남았다면 얼마든지 다 갚아줄 생각이었죠. 찾았어요? 마담도 전혀 모르는 눈치더라고요…얼마나 퍼마셨던지, 어떤 사람이랑 시비가 붙었나 봐요. 아마 치고받고 싸웠지 싶어요. 그 사람이 푹 쓰러지더라고요. 보니까 내 손에 깨진 맥주병이 들려 있는 거예요. 머릿속이 말 그대로 하얘지더라고요. 어머! 죽였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찔렀는지 안 찔렀는지도 모르겠고 그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도 모르겠고. 있죠 왜, 나비가 내 꿈을 꾼 건지 내가 나비 꿈을 꾼 건지 모르겠다는 말, 장자춘몽인가요? 어디서 주워들은 얘긴데 적절한 비유가 아니지요? 아버지는 계면쩍게 웃으며 소주병의 모가지를 잡고 흔들며 초침소리를 냈다. 똑, 딱, 똑, 딱, 똑, 딱, 범인은 사고현장에 꼭 다시 나타난다는 말 있죠? 그거 다 거짓말 이예요. 난 안 갔어요. 더 멀리 멀리 도망쳤죠.

그때부터 이 벙거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푹 눌러쓴 벙거지를 살짝 들추었다 내렸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더라고요. 잠 잘 때도 이 벙거지를 쓰지 않으면 잠이 다 안 오는 거예요. 아버지는 벙거지에 덥힌 정수리를 툭툭 두드렸다. 자수를 하지 그랬어요? 자수요? 어떻게 자수를 해요? 내가 피붙이 하나가 없는데 얘가 어디로 보내질지 빤하잖아요? 더구나 얘는…얘는 계집앤데요. 아버지는 내 고통이 느껴지느냐는 눈빛으로 멋쟁이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어머나! 얘가, 얘가 여자예요? 멋쟁이는 돋보기로 사물을 관찰하듯이 빨간 안경을 들추고 내 얼굴을 세밀히 들여다보았다. 난, 난 얘가 남자앤 줄 알았어요. 이름도 남자 이름이잖아요?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인형처럼 예쁘게 키우자고 약속했었거든요. 그래서 이름도 인형으로 지었는데… 이름을 인형으로 지으면 뭐해요, 출생신고도 못했는데. 예? 출생신고를 못 했다고요? 예, 할 수가 없었죠. 도망 다니다보니 얜 열한 살이나 됐고요.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이만큼이나 아프니까 어떻게 좀 해달라는 동정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애보고 유령이라 그런 거군요? 이상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애가 속을 썩이면 자식이 원수다 자식이 원수다 그러는데 애보고 유령이라고 하니까요.

꼭 누군가가 살다 버린 인생 같아요.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날름 주워 사는 거구요. 잘못 주운 이 인생 누가 제발 좀 다시 도둑질해 갔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겠지요?

아버지는 친형제지간처럼 지낸 콧수염과 노랑머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상처를 멋쟁이 앞에 훌렁 뒤집어 보였다. 아버지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것은 어쩌면 멋쟁이가 자기보다 더 큰 상처를 가졌다는 생각에, 멋쟁이의 상처를 보고 자신의 상처쯤은 별것 아님을 자위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비밀을 타인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는 것인지 그날 밤 나는 아버지가 자신이 만든 침대만한 평상에서 멋쟁이와 함께 이층 올리는 소릴 들었다. 여인숙에 살 때 티브이 화면상으로지만 벌거벗은 남여가 이층을 올리는 걸 수 없이 보아왔다. 노랑머리가 비워둔 촌집에 살적에도 철지난 민박집에 살적에도 아버지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를 데려와 밤새도록 이층을 올리기도 했었기 때문에 멋쟁이와 이층을 올리는 게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태풍의 엉덩이를 떠밀고 올라온 세 번째 태풍이 떠났다. 갈퀴라도 들고 왔는지 바다 속을 박박 긁어 갖가지 해초들을 뜯어다놓고 온갖 쓰레기들을 패대기 쳐놓고 떠났다. 나는 야무지게 꿰매놓았던 천막 펀치구멍의 나일론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뒤편 바람막이가 꿈쩍도 하지 않아 살펴보니 모래를 잔뜩 실은 노란색 보트가 처박혀 있었다. 보트라기보다 보트모형의 물놀이기구였다. 왼쪽 옆면의 둥근 고리에 밥주걱 같은 노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오른쪽에 있어야 할 노는 어디론가 더 멀리로 날아가고 없었다.

보트는 하필이면 왜 내 천막으로 날아와 표류된 것일까. 두 짝의 노가 다 있었다면, 보트는 표류되지 않았을까. 나는 보트의 주인이 누구냐며 비에 젖는 백사장을 청승맞게 누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보트를 한 쪽으로 던져놓고 수족관을 들여다보았다. 물고기들이 또 허연 배를 까뒤집고 둥둥 떠올랐다. 물고기들에게도 생각하는 뇌가 있는 것일까. 싱거워진 맹물을 먹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생을 포기라도 한 것일까. 둥둥 떠오른 주검들을 뜰채로 건져냈다.

노를 들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물살을 헤쳐야 할 노는 젖은 모래를 푹푹 파헤쳤다. 깊어진 구덩이에 생을 포기한 주검들을 묻었다. 무덤에 떼를 입힌 후 넉가래로 다지듯이 모래무덤을 툭툭 두드렸다. 무덤에 노를 푹 꽂고 손가락을 세워 묘비를 썼다. 마지막 물고기들, 여기에 잠들다.

하늘은 단 하루도 해다운 해를 내놓지 않았다. 해수욕장 개장을 축하라도 하듯이 물 폭탄을 퍼붓기 시작한 하늘은 이십여 일째 잔뜩 찌푸리거나 보슬비를 뿌리거나 안개비를 내렸다. 괴성을 지르며 장대비를 내리꽂거나 채찍 같은 빗줄기도 휘두르기도 하고 온종일 밧줄 같은 비를 늘어뜨려 허공에 물 커튼을 치기도 했다.

면벽수행자처럼 바다를 응시하던 몇 몇 상인들이 한 순간 깨달음을 얻기라도 했는지 조용히 짐을 꾸려서 떠났다. 그들이 떠난 천막 안으로 바람의 무리가 숨어들었다. 바람의 무리들은 면벽수행자처럼 가만있질 못하고 온갖 소란을 다 떨었다.

기필코 태양을 보고야 말겠다는 꿋꿋한 상인들이 내 작은 평상에 모여 술잔을 들었다. 통성명이 오가는가 싶으면 금세 형님이 되고 아우가 되었다. 채워지고 비워지는 술잔과 함께 호구조사 따위는 간단하게 끝마쳐지고 상인들의 얼굴은 과일주처럼 벌겋게 익어갔다. 내 서러움 네 서러움이 안주로 씹혀지고 왕년에 잘나갔다던 내 옛날 네 옛날들은 술잔 속에서 찰랑거렸다. 젓가락 장단으로 건져 부르는 구성진 옛 노래에 모두가 다 일류 연주자요 뽕짝가수였다. 가수 하나가 숟가락 마이크를 꺼버리고 입찰금의 얼마만이라도 되돌려 받자는 안건을 내놓았다. 모두가 장단을 치며 환호했다. 나도 관리사무실을 향해 씩씩하게 행군하는 상인들의 꼬리를 붙잡고 발 박자를 맞추었다. 피켓은 안 들었지만 우리는 입을 하나로 모아 입찰금의 얼마쯤이라도 되돌려 달라고 징징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관리소장은 인재도 아니고 천재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는 뒷문으로 물처럼 새나갔다.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낙지의 대가리를 움켜쥐었다. 달랑 한 마리 남은 놈이었다. 놈은 빨판을 바닥에 붙이고 극렬하게 저항했다. 낙지를 간신히 떼어내 대가리를 움켜쥐고 물기를 쪽쪽 훑어냈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두가 다 생을 포기했는데 어떻게 한 마리만이 쌩쌩하게 살아남았을까. 목숨 줄에 애착이 강한 것들이 가슴에 독을 품으면 더욱 독해진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시켜 보이는 것일까. 대가리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낙지는 있는 힘껏 대가리를 수축했다.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휘고 장기를 끄집어 당겼다. 낙지는 순순히 장기를 내놓지 않았다. 낙지가 빨판의 흡착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사람의 지문과 손톱을 가진 열 개의 손가락에 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산채로 장기를 적출당한 낙지는 빈 대가리의 수축을 멈추지 않았다.

손님상으로 가듯 호사를 누리게 해줘야 했다. 그것이 낙지가 끝까지 버틴 이유였고 낙지에 대한 예의였다. 낙지를 칠성판 같은 도마 위에 늘여 놓고 재빨리 칼질을 했다. 낙지는 토막들은 잘려나간 살점을 기필코 찾아 되 붙이기라도 하려는 듯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낙지에게도 통점이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고통에는 더 심한 자극을 주어야 고통에 익숙해진다. 송송 썬 쪽파와 채친 마늘을 뿌렸다. 토막들의 꿈틀거림은 마치 꽃 한 송이를 피워 올리는 것 같았다. 통깨를 솔솔 뿌렸다. 고통은 삶을 향한 고소한 몸부림이다. 삶은 고통으로 단단해지고 죽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소주 한 잔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극렬하게 저항하는 토막 하나를 기어이 떼어내 입안에 넣고 입술을 꽉 닫았다. 고통의 살점은 캄캄한 입속에서 얼마나 오래 견딜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저항을 멈추게 될까. 하늘인지 바다인지 전혀 구분되지 않는 곳에 설치된 구조대의 빈 망루를 바라보고, 전봇대에 목이 매달린 확성기도 바라보고, 배배 꼬여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현수막을 보는 사이에 꿈틀거림이 멈추었다.

한 잔의 소주를 또 목구멍으로 뒤따라 보내고 접시 밖으로 탈출하려는 놈의 토막을 재빨리 입속에 넣었다. 꿈틀거림의 기회를 주지 않고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소주병은 이내 투명한 속을 드러내고 일회용접시는 왕새우 한 마리를 밑바닥에 뉘여 놓았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물고기들을 건져 보트에 담았다. 물고기들은 힘겹게 아가미를 여닫으며 누추해진 지느러미를 털털 털어댔다. 악착같이 살아남았는데 날름 잡아먹을 수는 없었다. 어부가 바다 속 물고기를 다 잡는 것은 아니다. 그물 피하는 방법이나 제대로 배워 다시는 잡히지 마라. 보트를 바닷물에 뒤집었다. 물고기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보트가 내 천막으로 표류된 이유가 이것인가.

보트의 바람마개를 뽑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내리 삼년을 해수욕장 한 철 장사를 했지만 한 번도 물놀이를 해보지 못했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보트에 몸을 집어넣었다. 비좁았기에 팔다리를 밖으로 내놓아야 했다. 영락없이 뒤집어진 거북이 꼴이었다.

잔잔한 물결이 요람을 흔들 듯이 보트를 일렁였다. 나른했다. 살과 뼈가 바닷물에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잔잔한 물결은 나를 어디에다 부려놓을까…….

드넓은 초원에 육중한 거북 한 마리가 풀을 뜯는다. 거북은 더 맛있는 풀을 먹기 위해 코앞에 있는 풀을 대충대충 뜯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그만 벌렁 뒤집힌다. 웅덩이에 빠진 것이다. 웅덩이는 거북의 등딱지 두께만큼도 깊지가 않다. 거북은 목을 길게 빼내고 네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러나 등딱지의 폭과 웅덩이의 폭이 꼭 맞는 탓에 아무리 버둥거려 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다고 땅을 지고 허공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디선가 거북 한 마리가 나타난다. 거북은 버둥거리는 거북에게 재게 다가간다. 짱짱한 어깨로 버둥거리는 거북의 어깨를 밀치기도 하고 머리를 쑤욱 밀어 넣기도 한다. 밀치고 밀어 넣기를 반복하는 어느 순간에 버둥거리던 거북의 네 다리가 땅에 닿는다. 두 마리의 거북은 혀를 빼물고 서로를 바라보며 머리를 주억인다. 뭐라고 그러는 것일까, 일으켜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일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일까. 욕심 부리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부끄럽다고 하는 것일까. 거북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거북들은 각자의 갈 길로 엉금엉금 기어 사라진다.

만약에 뒤집힌 거북에게 또 다른 거북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뒤집힌 거북은 어떻게 됐을까. 또 다른 거북이 뒤집힌 거북을 못 본체 그냥 지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 소설 심사평

“아이와 여인의 시점

짜임새 좋고 형상화에 성공했다”

한승원 / 소설가

소설의 재미와 맛은 창조적인 서사의 형상화에 있다. 형상화는 그림 그리듯이 서술하여 독자의 가슴에 안겨주는 것이다. 형상화의 성공 여부에 따라서, 본심에 오른 5편 <새아사달> <앉은뱅이가 그린 만다라> <어떤 해후> <세월> <뒤집어진 거북들의 시간>을 깊이 읽었다.

<어떤 해후>와 <새아사달>은 이야기가 작위적이고 형상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문장이 섬세하지 못하고 거칠다. <앉은뱅이가 그린 만다라>는 문장을 잘 쓰기는 하지만, 소설적인 갈등과 대립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지루하고, 주제를 제대로 도출해내지 못한다.

<세월>은 문장이 정확하다. 3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나오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애라는 여자를 떠올리며 한 절을 찾아가고, 늙은 보살을 만나는데, 둘의 입을 통해 과거의 시간들이 양파껍질 벗겨지듯이 드러난다. 흥미 있게 구성하는 솜씨가 제법이지만, 결말이 빤히 들여다보이고, 리얼리티가 부족하다.

<뒤집어진 거북들의 시간>은 많이 써본 솜씨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문장이 정확하고 섬세하고 감칠맛이 있다. 아이의 시점과 여인의 시점이 교차 서술되는데, 짜임새도 좋고,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주제를 도출하기 위한 장치를 활용할 줄도 안다. <세월>보다는 <뒤집어진 거북이들의 시간>이 우위에 놓인다고 판단하여 당선작으로 밀었다. 당선작가에게 축하하고 정진을 빈다.


■ 소설 당선소감

“밥주머니 채운 거북이 머릿속 상자에서 나와…”

엄정숙

땅을 지고 허공을 걷는 거북들이 사는 마을에서 나는 밥을 팔아 밥을 먹고 살았습니다. 허출한 밥주머니를 채운 거북들은 밥값으로 책 한권씩을 놓고 갔습니다.

나는 거북들에게서 받은 책들을 내 머릿속의 상자에 넣었습니다. 밥을 팔지 않아도 밥을 먹고 살게 되어 몇 해 전에 나는 거북들의 마을을 떠났습니다.

근래에 들어 거북들이 내 머릿속의 상자를 열고 나와 자신들의 책장을 넘깁니다. 오늘 나는 거북들의 마을로 가 밥을 주문하고 밥값으로 책 한권을 놓아두고 나왔습니다.

공월천 작가님, 이승옥 선생님, 평생 밥을 사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심사위원님 고맙습니다.

[불교신문 2877호/ 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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