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왕실 비구니원

1422년(세종 4) 5월10일 태종이 죽고 난 직후, 궁궐 안에서는 의빈 권씨를 비롯한 태종의 후궁들이 은밀히 모였다. 그들은 모두 삼단같은 머리를 자르고 승려계를 받았다. 궁궐 안팎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아니, 몇몇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체 침묵을 지켰다. 열흘 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조정은 발칵 뒤집혀졌다. 국상(國喪) 준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후궁들이 대형 사고를 쳤으니, 수습을 해야겠는데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았다.

실록에서는 “의빈 권씨와 신녕궁주 신씨가 임금(세종)에게 알리지도 않고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자, 그 뒤를 이어 후궁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머리를 깎고, 염불하는 기구를 준비하여 아침저녁으로 불법을 행하였는데, 임금이 금하여도 듣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세종이 죽은 바로 그날 밤 또다시 10여명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았다. 각 궁에서 자수를 잘하는 나인들을 불러 모아 부처를 수놓게 하고, 밖에서는 최고의 장인을 수소문해 불상을 제작케 했다.

신하들은 또 “임금이 하는 일은 비유하자면 해와 달이 중천(中天)에 떠오름과 같으니 (후궁들의) 그릇된 일들을 막으시라”고 간했으나, 이미 해와 달은 서쪽으로 기운 뒤였다.

문종이 죽은 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문종의 후궁들은 일제히 비구니가 되었고, 집현전 학사들의 저지는 역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에 그쳤다.

조선전기, 후궁들이 머리를 깎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나라에서는 숭유억불을 주장하면서,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치켜세울 궁리만 하는데, 왕의 여자들이 일제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면 국가의 체통이 뭐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선왕 죽자 후궁들 줄지어 출가

‘억불’ 신료들 반대 빗발쳤지만

왕조차 “난들 별 수 있냐?”

이때마다 왕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난들 별 수 있냐?”

선왕의 후궁들은 새로이 즉위한 왕에게는 종통상 모친에 해당되는 촌수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머리를 깎는 일에 대해 아들이 왈가왈부 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었다. 간혹 만류를 한다 해도 후궁들이 왕의 청을 들어준 경우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다. 친아들이 애걸복걸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가 머리를 깎자 그 아들 의창군이 왕에게 달려가 “우리 어머니 좀 말려 달라”고 애걸했다. 신빈이 비구니가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2년 뒤의 일이니, 그동안 모자(母子) 사이에 무슨 일들이 오고갔는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이에 단종과 의정부가 한목소리로 “비빈(妃嬪)의 예에 맞지 아니하니 머리를 다시 기르라”고 사정했지만, 신빈 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이 죽으면 선왕의 후궁들은 일제히 궁궐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다. 보통은 왕이 하사한 저택과 토지를 받아 독자적인 궁방을 운영하며 살아갔다. 비구니가 된 후궁들은 인수궁, 자수궁, 수진궁, 창수궁, 수성궁 등 여러 이름의 궁에서 따로이 살기도 하고 모여 살기도 했다.

겉은 궁궐이었지만, 속은 사실상 절이었다. 불당을 마련해 불상을 모시고, 종루를 만들어 범종을 달고, 수시로 스님들을 초청해 법석을 벌였다. 아침저녁으로 궁궐에 범패소리가 들린다고 할 정도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이들 궁방은 인수원, 자수원이라 해서 아예 사찰로 불렸다.

조선전기까지 후궁들의 집단 출가는 계속 이어졌고, 왕실 비구니원 또한 계속 유지되었다. 이곳은 선왕의 비빈이나 늙은 궁녀들이 말년을 보내는 곳으로 이용되었고, 간혹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왕실 비구니원에 와서 출가를 하기도 했다.

사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이 죽은 후 후궁이 출가를 하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오히려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전기 후궁들의 입장에서, 선왕이 죽은 후 비구니가 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고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유습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선황제의 후궁과 궁녀들이 황제의 원찰인 비구니원으로 들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당 고종이 당 태종 이세민의 명복을 비는 사찰에 갔다가 태종의 후궁에게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맞이했고, 나중에는 그녀가 황제까지 되었다는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그 유명한 측천무후이다.

비록 1인자의 그늘 밑에 살았지만 한평생 목단처럼 살다가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부용화로 피어났으니, 이 또한 멋드러진 인생이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불교신문 2859호/ 10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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