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화쟁위원회·불교신문 공동기획] 김선우 연재소설 2부 <13>

잘 닦인 서라벌의 대로는 고적하다. 간간이 조약돌 몇 개가 길 위에서 반짝였다. 분황사로 가는 원효의 발걸음은 마치 누군가와 함께 걷는 듯 느렸다.

“분황은 군왕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서 풍겨 나와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폐하의 마음과 실천이 백성의 즐거워하는 얼굴에서 찾아지기를 다만 기도하옵니다.”

밤새 여왕과 나눈 길고긴 이야기들이 원효의 머릿속에서 지금껏 생각해본 적 없는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수행자의 길과 왕의 길. 이 둘은 다른 것 같지만 백성을 향해 있는 마음에선 하나의 길에서 만난다. 그렇다면 수행자의 향기란 무엇일까.

어둔 하늘 샛별이 동쪽하늘에서 반짝였다. 밤을 새고 궁을 나와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는 원효의 머리 위로 두 새벽이 뒤섞이는 서라벌의 하늘이 광활하고 시퍼렇다.

“나는 분황사를 지을 때 백성을 갈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절이 될 테니까.”

여왕은 힘주어 말했다.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도 결기가 분명한, 그것은 왕의 어조와 어울렸다. 여왕이 즉위한 후 가장 먼저 한 국책사업인 분황사 건립 과정은 여러모로 황룡사와는 대조적이었다. 황룡사와 지척인 분황사의 일주문은 야트막한 담장을 이웃한 채 고졸한 황금송으로 소박하게 세워졌다. 황룡사처럼 높고 큰 건물과 탑, 조상 등을 만들지 않는 대신 야트막한 규모의 전각들이 올망졸망 이웃하게끔 지어졌고 각각의 전각들은 백성들이 쉬이 드나들며 부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개방될 것임을 선언했다.

여왕이 친히 지은 이 절의 이름 분황사는 ‘왕의 향기가 나는 절’이라는 뜻이었다. 알만한 귀족들은 코웃음을 쳤지만, 여왕의 뜻에 진심으로 따라준 몇몇의 귀족들이 성심으로 여왕을 섬겼다. 김준후 공 일가의 후원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김준후 공 일가도 당혹스러워한 것이 분황사 건립에 활용된 노동력이었다.

자연석이 정교하게 쌓여진 기단 네 귀퉁이에 서있는 돌사자들의 이마를 문질러주며 원효는 천천히 탑을 돌았다.

여왕과 아미타의 벗들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공유할 일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발걸음을 돌리자 회흑색 안산암을 납작한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정성들여 쌓은 탑에 열린 감실이 보이고,

입구 양옆에는 인왕상이 조각되어 서 있다. 원효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여왕은 이제껏 어떤 왕도 시도한 적 없는 방식의 노역을 선택했다. 도적질을 하다 잡혀 형을 살고 있는 죄수들을 노역에 참여시킨 후 해당 일수가 차면 방면시켰다. 귀족들은 거세게 반대했다. 노비, 포로, 그리고 세금을 내지 못한 최하두품 평민들을 동원하면 될 일을 굳이 도적으로 하여금 신성한 사찰을 짓게 한 것은 귀족들을 향한 여왕의 도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여자 임금의 즉위를 못마땅해 한 귀족들은 물론이고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귀족들이 여왕에 대해 가진 불만이 식을 줄 모르는 때였다. 당연히 군대를 양성하고 전쟁준비를 해야 할 왕이 조그만 사찰 하나 짓는데 애착하여 쓸데없이 분란을 조장하는 것이 심히 국왕답지 못하다는 상소도 있었다. 그때를 회상하는 여왕의 얼굴은 번뜩이는 광배가 도는 듯해 보였다. 여왕은 원효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서라벌의 귀족들이야말로 도적들이 아닌가. 그들의 부는 백성들을 갈취해서 얻는 것, 지금 신라는 도적떼보다 귀족들의 해악이 더 심하여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도적들을 동원해 분황사를 짓게 한 내 마음을 알겠는가. 그대들은 진정 신라를 위해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는가. 젊은 수행자여, 서라벌의 사찰들에서 두드리는 목탁소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여왕의 탄식은 오랜 고뇌의 밤을 지새운 사람의 뜨거운 속울음과도 같았다. 귀밑머리가 희끗한 여왕이 탁자에 팔꿈치를 대며 이마를 짚었다. 요석이 탕약을 권하자 여왕이 손사래를 쳤다. 여왕을 바라보는 원효의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했다. 진흥왕을 비롯한 선왕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여왕이 조금만 더 일찍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면 신라의 오늘은 분명 달라졌으리라.

“즉위 후 5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백성들은 내 목소리를 들었으나, 귀족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분황사를 짓고 나자 그 사이 나는 이렇게 늙었다. 그러나 대답은 내가 해주겠다. 내가 누구인지.”

여왕의 말은 일면 허탈한 마음도 내비치고 있지만, 그 내면 깊이 아직 생생한 꿈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원효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연호를 고쳐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어짐은 평등해야 비로소 어짐이지 않겠는가.”

홍역을 치르듯 고통을 감내하며 즉위 초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여왕은 끊임없이 무언가 궁구하는 중이었다. 절벽을 향해 가면서도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야수와 같은 근성이 여왕에게도 있었고, 원효는 그런 여왕에게서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둘 모두 고독했고, 둘 모두 일생을 걸고 가 닿고 싶은 분명한 세계가 있었다.

그 길의 초입에서 그간의 고독을 토로하는 늙은 여왕은 아들 뻘 되는 청년 원효 앞에서 긴긴밤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었다. 허위의식이나 일체의 장식이 사라진 직설적인 말들이 여왕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흘러나왔고, 축시를 넘어서자 여왕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한 쇳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원효는 주로 여왕의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여왕을 향해 때로 긍정의 눈빛을 때로 의혹의 눈빛을 드렸고, 받았다.

정치와 왕권, 그것은 원효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였다. 그러나 날카롭고 신랄하며 열기에 차 있는 여왕은 귀족들의 탐욕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다고 원효는 판단했다. 그런데 여왕은 한 발 더 앞서가 있었다.

“그날의 백고좌 법회는 어떠했나. 화려하였지. 법회장은 말할 것 없고, 궁에서 황룡사 가는 길은 온갖 치장으로 마치 꽃놀이 행차와 같았다. 이제 신라는 점점 더 화려한 의례를 필요로 한다. 환각 같은 것이다. 장엄한 행렬이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겠지. 신라의 백성들은 고귀한 것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여 왕족을 신처럼 받들면 그들의 보호 아래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최대한 화려하게 보이려는 것은 고귀한 신분의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 아닌가. 모두 다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귀족과 백성의 그런 어리석음을 미워한다.”

한꺼번에 숨을 토하듯 쏟아놓는 여왕의 달변은 완전한 알몸의 것이었다. 어떤 허식도 부풀림도 없었다. 피가 밸 듯 입술을 깨무는 여왕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원효의 눈에 어느새 안개 같은 것이 번졌다. 여왕이 원효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마저 말했다.

“그대는 신라라는 한심하고 좁은 세상에 회의를 느끼겠지. 그런데 원효, 그대는 왜 중이 되었나? 대국에 유학 다녀와 황룡사에 주석하면 평생 명예와 부가 보장되고 백고좌에 초대되며 국사가 되기도 한다. 그대 같은 그릇이면 능히 국사 감이지. 그런데 그대는 왜 그걸 바라지 않는가. 그렇다면 뭘 얻고 싶은가.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대와 나는 공유할 수 있는 꿈을 가졌다. 물론 자네가 꿈꾸는 것이 내 것보다 클 것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하지만 어떤 꿈도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면 현실로 자라날 수 없다. 그대가 가진 것으로 가장 큰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아니, 이것은 그대가 나를 돕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내겐 신뢰하는 국사가 계시지. 자장스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하지만 그분만으로는 내 뜻을 펼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한 일. 나는 그대와 같은 포효하는 젊은이를 기다렸던 것이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여왕은 늙었으나 지혜로웠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통찰의 능력이 섬광 같았다. 원효는 기꺼이 여왕을 도우리라 마음먹었다. 멀리서 누군가 여왕을 위해서 금을 타고 있었다. 그 악기 소리는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낮고 아득했다. 지밀 어딘가에 있는 다른 공간에서 악기를 타는 어느 알지 못하는 손의 연주는 들어보지 못한 울음이나 노래처럼 대기를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여왕이 원효의 임무에 대해 들려주었을 때, 그는 잠시 의아했다. 그 일은 백성을 위하는 일이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여왕의 말이 뜻밖이기도 한 탓이었다. 원효는 자신이 지금 당장 이 일에 개입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화랑도를 파하고 출가를 결심할 때 그랬던 것처럼, 신라 최고의 사찰을 격하게 파하고 나온 지금, 그는 스스로 해결해야할 엄중한 숙제들에 당면해 있었다.

“소승이 지금 그 임무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의논할 수 있는 믿을만한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여왕의 청에 응대한 것은, 혜공스님과 바유, 흰새 등과 더불어 도모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왕이 바라는 것을 해나가기 위해 아미타의 벗들은 안성맞춤이었다. 그들 스스로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는 터, 아미타의 벗들이 꿈꾸는바 역시 여왕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예불의 시작을 알리는 도량석이 시작되었다. 도량석 목탁소리가 들리자 머릿속에서 들끓던 여왕의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정박해 있던 배가 미끄러지듯이 어둠이 밀려나면서 여명이 스며들고 있다. 분황사 경내는 소슬하고 단정하다. 나지막하고 평화로운 음영이 절 마당에 어른거리며 아침햇살의 기미가 부드럽게 경내를 깨웠다. 목탁소리는 메아리치듯 떨리며 퍼져나갔다. 분황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은 석탑이었다. 자연석이 정교하게 쌓여진 기단 네 귀퉁이에 서있는 돌사자들의 이마를 문질러주며 원효는 천천히 탑을 돌았다.

둥글둥글 순박한 인상에 강직한 풍모가 살짝 드러나는 돌사자들은 어딘지 아미타의 친구들을 떠오르게 했다. 여왕과 아미타의 벗들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공유할 일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발걸음을 돌리자 회흑색 안산암을 납작한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정성들여 쌓은 탑에 열린 감실이 보이고, 입구 양옆에는 인왕상이 조각되어 서 있다. 원효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원효는 분황사가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백성을 두루 이롭게 할 부처님의 말씀을 저술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때가 오리라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확신 같은 것이 들었다.

새벽빛이 아침의 붉은 기운으로 스미어 생동하는 시각, 세상에 처음 나온 생명처럼 원효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태양이 솟아 만물에 고루 빛을 비추는 지금 이 순간의 꿈이 말할 수 없이 환희로웠다. 나 역시 매일 아침 새롭게 태어나 세상에 새로운 빛을 뿌려야 하리라. 환희심이 가득 차오는 원효의 더운 심장이 분황사 석탑 앞에서 정과 망치를 두드리듯 맥박 쳤다.

때마침 범종이 울렸다. 석탑 속에서도, 사위는 흰 달 속에서도 심장소리가 들릴 것 같은 아침이었다. 문득, 여왕의 한 마디가 뇌리를 스쳤다. “그 일에 여기 있는 요석이 스스로 함께 하고 싶어 하니 그대는 요석을 특별히 살펴 달라.”

[불교신문 2831호/ 7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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