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육식과 살생

칼을 대자 선홍색 피가 쏴~ 터져 나온다. 펄떡이던 몸통에 금세 힘이 빠지고 자신감 넘치는 칼잡이의 몫이 되어버리면, 더 이상 생명 있는 존재가 아닌 누군가의 입을 즐겁게 할 맛깔스런 음식으로 바뀌게 된다. 요리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방송의 실상을 비판하며 지난 2일, 사단법인 보리에서 <생명생태주의 시각에서 본 방송모니터링 보고서>를 발간했다. 방송에서 소개된 음식의 80%가 육식이라는 점과 조리과정에서 살생하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인간의 양심을 찌르는 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보고서다.

올해 1월에는 사료 값 급등으로 인해 죽어가는 소가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고, 한우 값 폭락에 항의하는 한우농가들이 소 1000여 마리를 데리고 상경하다가 경찰에 막힌 일도 있었다. 우리의 축산농가 이야기를 하자면 긴 한숨부터 나온다.

2010년에는 구제역으로 소 15만 마리와 돼지 330만 마리를 생매장했고, 조류독감으로는 647만 마리의 오리와 닭을 생매장했다. 그것도 국가가 앞장서서 말이다. 게다가 이번엔 소 값이 폭락하니 인위적으로 40만 마리를 죽여 문제를 해결하겠단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야말로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 국가가 앞장서서 가축에 대해 잔혹한 피의 정책들을 감행하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종교, 어느 단체 하나 제대로 말리지 못한다. 특히나 그런 일에는 ‘묵빈대처(默賓對處)’로 일관하는 종교가 있으니 참으로 딱할 노릇이다.

가축에 대한 무자비한 살처분

과도한 육식문화에서 비롯돼

세계동물보건기구의 규정에 의하면, 전염병 방역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경우, 가스나 전기요법, 약물투여를 통해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생매장이라는 잔혹한 ‘묻지마식 살처분’을 감행하면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구제역 발생농가 반경 3㎞안의 관련 가축들을 모조리 죽이는 예방적 살처분도 문제거니와 거기에 더해 산채로 묻어버리는 야만적인 도살이야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여러분은 알고 계시는가?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과도한 육식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그저 양질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대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마하승기율> 제19권에는 활 솜씨를 자랑하며 새를 잡아 부처님께 올린 비구 우타이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부처님은 우타이를 나무라며 “그대는 내가 한없는 방편으로 살생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고, 살생하지 않는 이들을 칭찬하는 것을 듣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이렇게 악한 법을 짓는 것이냐? 이는 법도 아니요, 율도 아니어서 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선법(善法)을 키우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고의’로 축생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율로 금하였다.

율장은 이어 고의로 살생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내용은 몸으로 짓눌러서 살생하는 것과 몸의 일부분을 사용하여 살생하는 것, 도구를 이용하여 살생하는 것이다. 또 축생을 죽이기 위해 칼과 약을 써도 안 되며, 토하거나 설사를 나게 해서도 안 된다.

더구나 뱃속의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다. 죽이기 위해 주문을 외워서도 안 되며, 가루나 올가미, 그물, 구덩이, 험한 길, 건너지 못할 강 등을 이용해 축생의 목숨을 끊는 것 모두가 죄가 된다고 설한다.

그럼 인류는 왜 이토록 동물을 죽여 왔는가? 가장 큰 원인은 육식, 그것도 ‘더 맛있는 고기’를 위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사육형태가 문제다. 광우병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사람만 모였다하면 등장한다는 치킨은 300㎠의 밀폐된 닭장에서 사육된다고 한다(미국). A4용지 한 장이 500㎠인 것을 감안한다면 닭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생명문제를 다루면서 육식문화를 거론할 수밖에. 행동주의 철학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육식의 종말>에서 “인간의 식단에서 육류를 제외한다는 것은 인간의식의 역사에서 인류학적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식문화를 넘어서야만 인류를 위한 새로운 과제를 정할 수 있다. 또한 생태계보호, 인간의 영양공급, 지구를 공유하는 다른 생명체들의 안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모쪼록 우리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육식을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혔다.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불교도라면 적어도 생명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불교신문 2797호/ 3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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