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대에 입소해 훈련을 받는 스님들 모습을 보도한 1975년의 불교신문.
 
 
스님들, 군부대서 군복 입고 총검술 훈련
 
 
 
1972년 12월27일 유신(維新) 헌법이 개정.공포되면서 제4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보리고개에서 구출한 경제 대통령에서 독재자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됐다. 언론 집회 결사 등 민주주의의 근간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전 국민은 반공(反共)을 앞세운 병영국가(兵營國家) 체제에 동원됐다. 새로 마련된 유신헌법에 의해 박정희는 12월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신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호국 안보 내세운 정부 정책 과할 정도로 적극 호응
 
호국승군단 창립, 16~60세 스님 군대조직으로 편제
 
 
전시에 버금가는 안보 동원체제는 불교계를 비켜가지 않았다. 통합종단 출범 당시부터 박정희 정권에 많은 신세를 진데다 이후 박정희 일가의 불교계 지원 그리고 옛부터 내려오는 호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계는 자발적으로 정부의 안보정책에 참여했다. 종단은 군사체제로 편제되고 스님들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맞아 출병했던 스님들처럼 승병(僧兵)으로 불리웠다.
 
종단의 중진 스님들은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병영에 입소해 사격훈련을 받았다. 사찰이 향토 예비군으로 편성돼 예비군복을 입고 소총을 메고 문화재를 지키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유명 포교사들은 전국을 돌며 안보강연회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정부의 유신 헌법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불교인사는 불교신문에 월남참전의 부당성을 논하는 칼럼을 실어 필화 소동을 일으킨 법정스님 뿐이었다. 군을 동원한 강압적인 측면이 있다 해도 살생을 금하는 수행자가 군복을 입고 사람을 죽이는 총검술을 연마하는데도 아무런 반대 의견이 없었다는 점은 지금껏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당시 모든 매체가 동원된 것처럼 <불교신문>도 매호마다 신문 지상에 ‘과시하자 민족단결, 완수하자 유신과업’ 등 유신 구호를 싣고 사설 기사 등을 통해 유신헌법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중앙종회도 고쳐야할 불교 과제에다 매번 ‘유신’을 관용구처럼 사용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비상 정부 이름을 국가재건으로 정했을 때 종단의 모든 숙제와 조직을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한 것처럼 종단은 ‘유신’으로 통일했다. 통합종단 발족 10년을 맞아 중진회의가 내놓은 수계제도 개혁안, 승니 위계질서 확립안, 종회의원 선거법 개혁안 등 종단 내 자정 및 제도 개선안이 모두 ‘유신’으로 둔갑했다.
 
불교계가 정부의 유신 안보 정책에 본격적으로 동원된 것은 1975년이었다. 1975년 베트남이 북에 의해 함락되자 남한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미국이 중국과 비밀리 교섭하는데다 월남에서 손을 떼자 바로 함락되는 것을 본 정부와 국민들은 안보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 때부터 반공과 국민총화라는 이름아래 호국 안보 담론이 전국을 휩쓴다. 1975년 2월 입춘 기도를 맞아 종단은 7일간 국태민안구국기도법회를 봉행한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기념한다는 명분이었지만 형태는 과거 왕조시대 왕실의 안녕을 비는 기도와 다름없었다. 당시 총무원장 경산스님은 “세계는 경제위기 속에 자국의 이(利)만을 추구하는 가운데 국가의 입장 또한 정계의 혼란과 경제 불안 속에서 처해 있는 차제에 국운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며 국가와 민족 위란시 선봉에 서서 난국을 타결해온 전통적 호국불교로서 공휴(公休)의 기쁨에 앞서 국가 민족의 내일의 번영과 국론통일을 위해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구국기도법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사진>해인사 스님들이 사찰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대한뉴스의 한 장면.
 
종정 서옹스님은 입재 법문에서 “불자들은 민족 번영과 총화를 위해 삼국통일시대부터의 백고좌법회와 팔관회의 호국불교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독선과 아집을 버리고 이기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 자기를 철저히 부정하고 참사람으로서의 자기를 재발견하여 크게는 국가민족과 적게는 우리 이웃을 위해 부처님의 정법을 지표로 삼고 실천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5월6일에는 종정 서옹스님이 직접 나서 ‘호국안보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4월28일 국민총화와 총력 안보에 관한 안보 담화가 나온 뒤였다. 종정 스님의 담화문 발표 자리에는 총무원장 경산스님, 종회의장 영암스님, 감찰원장 지효스님, 동국역경원장 운허스님 등 종단의 중진스님들이 배석했다.
 
서옹스님은 “우리 1000만 불교도는 불교의 호국 전통을 이어받아 국민적 단결함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국가안보에 모든 것을 귀일시켜 다시는 오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종교인은 반공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불교가 국민 단합을 위해 앞장서고 나아가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선구적 사명을 완수할 것을 호소한다”는 등의 5개항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어 부처님 오신날 국가공휴일 첫 해를 맞아 기념하는 봉축행사도 ‘총화호국안보’라는 이름을 붙였다. 봉축법요식 연등행렬 등 각종 행사가 호국안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됐다.
 
6월23일 동국대 강당에서는 조계종은 물론 태고종 등 여타 종단과 각종 신행단체가 참여한 범불교 차원의 호국안보 대회가 열렸다. 2000여명의 불자가 참석한 가운데서 열린 이 대회는 이전 스님들 중심의 법회보다 훨씬 강경하고 정치적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드리는 메시지에서 이들은 “우리는 불교도들을 승군의 정신으로 재무장시키고 비상조치 결단에 부응, 전국민의 총화의지를 한데로 귀일시켜 여하한 북괴의 도발에도 이를 능히 격퇴시키고 분쇄할 각오로 임하겠다”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사찰에 예비군 편성, 해인사 총 들고 대장경 수호 훈련
 
종단 내부 비판 무마 위해 총화단결 강조, 정치적 목적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는 이 해 7월 종단차원의 호국승군단 창립을 결의하고 스님들이 병영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최고조에 달한다. 본사주지회의는 ‘호국승군단’ 창립을 논의, 헌장을 만들고 스님들은 본사별로 1일 병영 입대 체험을 갖기로 했다.
 
또 전국을 순회하며 반공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전 7장 제23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헌장은 조계종 비구 비구니 중 17세부터 60세까지를 대상으로 평시에도 군대 조직처럼 운영토록 했다. 헌장은 총재에 종정, 호국단장에 총무원장을 맡기는 등 총무원 체제를 전시와 같은 호국단 체제로 전환토록 했다.
 
총무원과 32본산 체제는 군대 조직처럼 바꾸며 본사지단 단위로 연 2회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정신강화를 위해 호국법문을 받고 교관을 초빙해 제식훈련, 전술 등을 익히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를 위해 각 본사별로 인근 부대에 입소해 1일 훈련을 받도록 했다. 전국 사암은 호국 기도법회를 열고 주요 간부스님들로 강사진을 구성해 호국사상 강연을 갖도록 했다. 헌장은 이 해 8월1일 제정 공포됐다.
 
1일 병영체험은 동화사가 가장 먼저 실천했다. 당시 주지 의현스님을 비롯한 100여명의 동화사 소속 스님들은 인근 부대에 입소해 각종 훈련을 받았다. 사격에서 좋은 점수를 낸 스님에게는 특등사수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불교신문은 ‘특등사수’를 인터뷰했다. 이어 법주사 스님들 80여명이 입소해 같은 훈련을 받았다. 법주사는 위문품을 전달하고 관내 기관장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스님들은 대한민국 스님으로서 유사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승공통일에 앞장서겠다는 선서를 했다.
 
호국승군단 간부, 즉 총무원 간부 스님들 40여명은 1975년 11월25, 26일 양일간 전방의 한 부대를 찾아 1박2일간 군사훈련을 이수했다. 당시 총무부장 고산스님, 교무부장 철인스님, 재무부장 월서스님, 종회 사무국장 암도스님, 사회부장 혜성스님 등 호국단 간부들과 지단장을 맡은 본사 주지 등 종단 간부 스님들은 양 일간 부대에서 제식훈련, 화생방, 총검술, 사격 등을 훈련했다. 스님들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내무반에서 장병들과 함께 생활하며 불침번을 서는 등 장병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이어 12월21일 조계사에서 스님 5000여명과 신도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호국 승군단이 발족했다.
 
지금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지만 당시 북의 침공이 우려되는 안보상황에서는 호국에 출재가를 구분짓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각 사찰에서도 자체 예비군이 조직돼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종단 지도부의 방침은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에 비춰보아도 과한 측면이 있다. 특히 불살생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삼는 불교의 수행자가 사격술을 받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세웠던 호국 안보 종책은 혼란스러운 종단 사정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다.
 
종단의 비판 발언을 총화단결을 해치는 분열 행위로 낙인 찍거나 종단집행부가 입영 훈련을 다녀온 얼마 뒤 종정중심제로 종헌을 전격 개정하는 결정을 내린 것 등이 그 예다. 호국승군단이 승려들의 이동상황을 관리한다는 명분아래 카드제를 도입한 것도 호국 안보가 종단 운영의 한 방안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요란하던 호국 안보 열풍은 1년도 가지 않아 곧 시들해진다. 그리고 호국승군령은 지금 종단 종헌종법사에서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70년대의 과도했던 호국불교를 반성해 그와 대립되는 민중불교 이념이 한동안 풍미하기도 했다. 좌우를 넘나들며 정부와 사회 분위기에 편승했던 불교는 이제는 불교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사회를 보아야 한다는 경험을 배웠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708호/ 4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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