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비처럼 거칠던 할아버지 손가락 피부의 결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지. 싸리비 소리를 내는 파도소리를 듣노라면 싸리비 같았지만 따뜻했던 할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져 즐겁다.

박문후 소설가
박문후 소설가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느껴지는 봄 바다는 몇 달 전의 바다가 아니다. 아니 엊그제의 바다와도 다르다. 먼 바다를 다녀오는 바람을 폐 깊숙이 들이마신다. 바람 속에서 병아리 솜털 같은 보드라운 냄새가 맡아진다. 입술에 묻은 바람을 핥으면 짭짭하면서 달짝지근한 물미역 맛이 난다. 바람 속에 손을 내밀면 실크 스카프가 목에 감기는 듯한 흐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봄 바다의 빛깔이 감지되지 않는다. 바다 표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봄 햇살이 그려지지 않는다. 공기 입자가 만들어내는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는다. 마주 보는 거울에 아무 상도 잡히지 않는다. 희끄무레할 뿐이다. 눈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습성을 버리란다. 의사가 마음의 눈으로 보라며 웃더라.

아침마다 늙은 팽나무에 와서 재잘거리는 바다새 소리에 귀 기울인다.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 나름 알아내려고 고민한다. 울음소리라고 슬픔만 담긴 것은 아닐 터. 슬픔 중에서 나처럼 늙고 병들어서, 너무 지쳐서, 새끼와 헤어져서 등 다양한 의미가 섬세하게 담길 것이다. 길게 울 때와 짧게 울 때가 다를 것이고. 크게 울 때와 작게 울 때, 강하게 울 때와 약하게 울 때, 딱딱하게 울 때와 부드럽게 울 때가 다르리라. 기뻐 노래할 때도 마찬가지겠지. 소리의 고저장단 뿐만 아니라 강약에 따라 그날 그 시점의 정서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표현할 것이라 생각된다.

새만 아니라 모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앵하는 소리만 들어도 배가 고픈지, 그냥 앞에 있으니까 식사를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곧 등장할 모기를 두려워하며, 웃음.

평생을 함께한 나의 그림자는 내가 불편해하는 한숨 소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른다. 참을 때까지 참아볼 생각이다. 참는 것이 한계에 이르면 그때는 나도 모르겠다. 시각을 대신할 촉각과 청각을 예민하게 단련시키고 있다. 여러 감각 중에 가장 편한 것이 미각이다. 하지만 그건 음식 먹을 때뿐. 그래서 미각은 오히려 관심 밖이다. 나는 청각을 사랑하련다. 요즘은 청각을 통해 사물과 소통하려고 노력 중이지.

지금, 파도소리를 듣고 있다. 겨울 파도소리와 봄의 파도소리는 확연히 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쇳소리에 가깝던 파도소리가 요즘은 싸리비로 마당을 쓰는 듯한 소리를 낸다.(물론 눈으로 볼 수 있을 때는 들을 수 없었지) 싸리비를 아느냐고? 어릴 때 친가에 가면 할아버지가 싸리비로 마당 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 싸리비로 마당을 쓸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봄 바다에서 들을 수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싸리비를 엮어서 마당을 쓸던 할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할아버지는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손주가 제일 이쁘다, 했지. 할아버지의 얼굴을 잊어버렸어. 그러나 싸리비처럼 거칠던 할아버지 손가락 피부의 결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지. 싸리비 소리를 내는 파도소리를 듣노라면 싸리비 같았지만 따뜻했던 할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져 즐겁다.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법구경>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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