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과 모양 변하지만 
무상한 깨달음은 불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벨루바 마을에서 발병(發病)하시다.

이틀 전부터 목이 칼칼했다. 결국 난 사시 예불을 하면서 잔기침을 시작했다. 다가올 병(病)을 미리 알려주듯…. 또한 병(病)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예언(豫言)일 것이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예언. 

암바팔리의 망고 동산에서 머무셨던 부처님 또한 벨루바 마을로 가실 때쯤 육신의 몸이 보내는 예언의 마지막 신호를 예감하셨다. 그 예언은 육신의 죽음이며 그 신호는 극심한 병(病)의 고통으로 다가왔다. 묻고 싶다. 온 생을 타오르는 욕망으로 얻었던 모든 것이 사라질 때, 따뜻한 봄날 산들산들 꽃잎처럼 사라질까? 어쩌면 병(病)이라는 것은 한평생 모은 욕망의 장작더미를 한순간에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병(病)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아주 아프게 아주 뜨겁게 소멸을 알려주는 예언자 같은 것은 아닐까?

하루의 삶뿐인 하루살이는 불꽃을 향해 뛰어들 수밖에 없다지만, 100년을 사는 인간은 어떻게 죽음을 향해 가야 할까? 묻고 싶다. 죽을 단 하루를 몰랐던 것처럼 불나방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향해 온 생(生)을 나아 갈 것인가? 100억 광년을 걸어온 별빛처럼 온 생을 빛날 것인가? 이처럼 세존께서는 성도(成道) 하신 그날부터 벨루바 마을에서 이미 죽음을 넘어 별빛처럼 걸음을 멈추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셨다. ‘내 가까이에서 시봉하는 이들에게는 여태껏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또 비구들에게는 한 번도 깨달음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열반에 들어 버린다는 것은 붓다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정진(精進)으로 이 병을 극복하고, 유수행을 확립하여 머물도록 하자’ 이렇게 부처님은 모든 제자를 베살리로 보내고 홀로 벨루바 마을에서 마지막 법문을 비구들에게 전하기 위해 유수행(留壽行: 수행을 통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행위)을 홀로 닦으셨다.

45년 전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 하셨다. 그리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생각하셨다.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는 유(有)에 집착하는 중생들에게 말이나 언어로 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범천(梵天)은 그것을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단 한 명의 중생을 위해서라도 유여열반(有餘涅槃)으로 이 세상에 남아주시길 진심으로 청했다. 부처님은 35세에 이미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낸 탐진치의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셨다. 그 순간 부처님은 생명으로 받은 육신에 대한 근본적인 집착마저 스스로 놓으시고 완전한 열반인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범천(梵天)의 권청(勸請)으로 육신에 대한 근본적인 집착이 만들어낸 병(病)과 늙음을 45년간 동반자처럼 벨루바 마을에까지 유여열반(有餘涅槃)으로서 함께 오신 것이다. 유여열반의 부처님께는 병(病)은 어떤 것이었을까? 모든 집착이 소멸한 마음에서 병(病)은 아침에는 사라지지만 밤이 되면 나타나는 별빛 같은 것인 줄 모른다. 

이미 소멸한 행성 하나가 한평생 쏟아낸 빛이 몇백 광년을 쉼 없이 걸어온 오늘 밤. 지혜의 눈(眼)으로 보자면 그 고통마저 없지만, 지혜가 사라진 밤하늘에선 마치 빛이 나는 것처럼 생겨나는 고통. 부처님의 유수행(留壽行)은 아침에 뜨는 지혜의 태양처럼 모든 것을 소멸시키리라. 생(生)과 사(死)마저도. 생(生) 속에 이미 죽음을 함께하신 45년간의 삶.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詩人)의 말처럼.

효산스님  부산 여래선원 주지
효산스님  부산 여래선원 주지

[불교신문 3814호/2024년4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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