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地含諸種
普雨悉皆萌
頓悟花情已
菩提果自成

“마음 땅이 모든 씨앗을 머금었으니
두루 비를 만나면 모두 싹을 틔운다네
문득 깨달아 꽃의 정마저 놓아야
진리의 열매 절로 익는다네”

중국 광동성 사오관시에 위치한 조계산 남화선사에 모셔진 6조 혜능스님의 등신불.
중국 광동성 사오관시에 위치한 조계산 남화선사에 모셔진 6조 혜능스님의 등신불.

 

새로운 전통의 탄생


중국 선불교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을 뽑으라면 5조 홍인(弘忍, 601~674)이 6조 혜능(慧能, 638~713)에게 법(法)을 전하는 순간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이는 선불교의 역사를 바꾼 일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홍인의 문하에는 신수(神秀, 606~706)라는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모두들 그가 스승의 법을 이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는 남쪽 변방에서 올라온 시골뜨기 청년에게 주연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단단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던 최고의 엘리트가 일자무식의 굴러온 돌에게 밀린 것이다. 과연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혜능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가게에다 땔감을 팔고 나오는데, 그 안에서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경 읽는 소리를 듣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금강경>의 이 구절에 마음이 꽂힌 청년은 그 의미를 깨치기 위해 홍인 선사를 찾아가게 된다. 멀리까지 왜 왔느냐는 질문에 제자는 ‘부처되기 위해서’라는 당돌한 대답을 한다. 홍인은 이놈이 진짜 물건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남쪽 오랑캐 놈이 어찌 감히 부처를 꿈꾸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때 제자가 스승에게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佛性)에 어찌 남과 북이 있겠습니까?”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스승의 입장에서 이런 펀치는 맞으면 맞을수록 기분이 좋은 법이다. 물건이 될 만한 재목이 찾아왔는데, 얼마나 기뻤겠는가. 하지만 스승은 속내를 숨긴 채 혜능을 방아 찧는 곳으로 보내고 만다. 자칫 박힌 돌들에게 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듯이 그 사람이 물건이면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홍인은 제자들에게 깨친 바가 있으면 글로 써서 제출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6조의 자리가 결정되는 매우 중요한 시험이다. 문제는 불교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되는 혜능이 응시했다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당연히 신수가 법을 이을 것이라 생각해서 아무도 답안을 제출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결국 신수와 혜능 두 사람만 시험을 치른 셈이 되었다.


스승은 신수에게 평범한 B+학점을 준다. A학점을 주기에는 핵심을 건드리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수는 마음을 밝은 거울(明鏡)에 비유하고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열심히 닦아야 한다는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런데 혜능은 이와 달리 마음의 거울에는 본래 먼지가 없다고 했다. 먼지가 있다고 가정하는 한 영원히 닦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거울에는 본래 먼지가 없다는, 즉 마음이 공(空)하다는 실상을 단박에(頓) 깨치는 일이었다. 견성(見性), 돈오(頓悟)를 중시하는 새로운 전통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마침내 스승은 혜능에게 A학점을 주고 자신의 법을 전수한다. 신수를 향한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혜능이 6조의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다. 당시 신수를 따르는 이들이 혜능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15년이라는 기나긴 은거의 시간을 보낸 다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선불교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드라마틱한 그의 삶은 <단경(壇經)>이라는 이름의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가 편찬한 덕이본에는 그의 마지막 유훈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오는데, 필자의 마음에 꽂힌 열반송을 소개한다.


“마음 땅이 모든 씨앗을 머금었으니, 두루 비를 만나면 모두 싹을 틔운다네. 문득 깨달아 꽃의 정마저 놓아야, 진리의 열매 절로 익는다네(心地含諸種 普雨悉皆萌 頓悟花情已 菩提果自成).”

 

꽃을 놓아야 열매를 맺는다


혜능의 열반게를 보면서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두보(杜甫, 712~770)의 시가 떠올랐다. 글자 그대로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라는 뜻이다. 첫 구절이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봄이 오면 내린다네(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로 시작한다.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이라는 영화 제목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봄비가 내려 여러 생명들이 싹을 틔우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촉촉이 비가 내리면 싹을 틔우고 점점 성장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다. 그렇다면 꽃이 피는 단계에서 멈추고 이를 즐겨야 할까? 혜능은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꽃에 대한 집착마저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물이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르는 이치와 같다 할 것이다.


그의 열반송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마음의 땅은 이미 불성(佛性)이라는 종자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성을 바라문교의 아트만처럼 영원불멸하는 실체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을 불자(佛子), 즉 붓다의 아들, 딸이라고 부른다. 자식이 아버지(佛)의 성품(性)을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DNA가 같으니까 말이다. 불성이란 바로 붓다의 DNA, 붓다의 자식으로서 타고난 성품을 의미한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를 모른 채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빠져 중생살이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바탕이 본래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먼지가 없다(空)는 것을 깨치는 일이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삼학(三學)이라고 해서 계율(戒)과 선정(定), 지혜(慧) 공부를 중시한다. 계학은 계율을 바르게 지켜 그릇된 행위를 다스리는 것이고 정학은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이며, 혜학은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공부다. 그런데 혜능은 삼학을 우리의 본래 마음인 자성(自性)으로 압축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즉 우리의 마음 땅에 본래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이고 산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이며,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라는 것이다. 이를 그릇됨과 산란함,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수상삼학(隨相三學)과 대비하여 자성삼학(自性三學)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자성이 본래 청정한 씨앗을 갖추고 있더라도 싹을 틔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발심(發心)을 하고 스승이라는 좋은 비, 좋은 인연을 만나야 싹이 돋아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문제는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꽃에 대한 집착마저 놓아야 비로소 진리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혜능이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도 바로 집착에 대한 경계였다.


오래 전 <단경>을 공부하면서 마음에 깊이 각인된 장면이 있다. 그가 홍인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고 15년 동안 은거하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어느 날 혜능이 법성사(法性寺)에 찾아갔는데, 당시 두 승려가 바람이 움직이는지, 아니면 깃발이 움직이는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이를 종식시키는 혜능의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도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왜 마음이 움직인다고 했을까 궁금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 승려의 마음은 온통 바람으로 가득해서 깃발을 담을 여지(餘地)가 없었고 다른 승려는 나부끼는 깃발에 집착해서 바람을 담을 마음의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움직인 것은 그들의 마음이었다. 그저 바람이 불고 깃발이 날린 것인데, 그들의 마음이 바람과 깃발 한쪽에 집착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볼 수 없었을 뿐이다. 만약 옆에서 누군가 쓰러졌더라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드라마에 정신이 팔려서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찌 보면 두 승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오늘의 우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만 옳다는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다른 이들의 생각을 담을 여유가 없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마음의 색안경을 벗는 일이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남과 북뿐만 아니라 동과 서, 보수와 진보도 없다는 것을 깨칠 수 있다. 혜능이 화정(花情), 즉 꽃에 대한 집착마저 놓아버려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살 수는 없어도 내 안의 화정을 직시하고 상대를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작은 공간 하나쯤 비워둬야 하지 않을까. 그 정도는 되어야 붓다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불교신문3661호/2021년4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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