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총림 쌍계사 방장 고산당(杲山堂) 혜원대종사(慧元大宗師)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음력 2월15일 열반절 화계동천에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육신을 벗었다.


3월23일 아침 쌍계총림 방장실에서 법랍 74년 세수 88세로 원적에 들기 전 고산대종사는 ‘봄이 오니 만상이 약동하고, 가을이 오니 거두어 다음을 기약하네. 내 평생 인사가 꿈만 같은데, 오늘 아침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가네’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떠날 날과 시간 까지 정확하게 알고 낙관(落款)까지 찍어서 제자에게 남긴 임종게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고, 길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자연에 순응하는 유유자적한 도인의 풍모와, 평생 불식촌음(不息村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하며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누리는 여유와 안식을 보여준다.


대종사는 선사며 강백이며 율사요 포교사였다.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영결사에서 고한대로 “선교율 삼장에 투철한 안목을 갖추고 종문의 의례종장이자 대가람을 창건하고 교화를 펼친” 출중한 수행자였다. 젊을 적부터 용맹정진 견성하여 오도송을 남겼으며 당대 최고의 강사 고봉스님의 강맥을 이어 팔만대장경의 넓고 깊은 바다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으며, 용성스님, 동산스님으로 이어지는 조계종 정통 계맥을 이은 율사였다. 스님의 수행이 얼마나 깊고 치열했으면 수도암 선방에서 부산 혜원정사 공양간을 비춰볼 정도로 천안통이 열린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스님은 하지만 마장(魔障)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더 몰아쳐 명안종사의 반열에 올라 그 덕화가 만방을 비췄다.


오랜 탁마와 정진으로 불법을 깨쳤으나 스님은 적요에 머물지 않고 바른 가르침으로 우매한 중생을 제도하는데 평생을 매진했다. 동래포교당에서, 한국불교 총본산 조계사에서 정법(正法)을 세웠으며 낡고 무너졌던 쌍계사를 일으키고 보리암을 전국 최고의 관음기도 도량으로 단장하였으며 부산 혜원정사, 경기도 부천 석왕사로 도심포교당의 전범(典範)을 만들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차(茶) 시배지, 해동 범패 원류 역사를 살려 차와 불교음악에도 큰 기여를 하였으니 스님의 행화가 끝이 없다. 당신 스스로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신도들에게는 한 없이 자비로웠으며 어느 절을 가든 전각 마다 참배하고 불전에 올리던 ‘꿈에서도 참 스님’이었다.


큰 산에 큰 나무가 자라고 맹수가 보금자리를 삼 듯 스님의 회상에는 기라성 같은 수행자들이 모였으니 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강백 율사 종사들이 대종사의 법을 이었다. 문중 산중 따져 구분하고 나누던 오늘날 종단 풍토에서 볼 수 없는 원융화합의 한마당이 대종사 그늘에서 펼쳐졌다.


경율론 삼장을 갖춘 위대한 삼장법사와 같은 시대를 살며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 더할 나위 없는 홍복을 누렸다. 이제 대종사가 부촉(咐囑)한 근면한 수행가풍, 지계청정한 생활, 정법 전수와 홍포를 받들어 넓고 깊은 은혜를 갚아야할 책무가 우리에게 남았다. 스님은 환지본처 했지만 법등(法燈)은 영원히 사바세계를 밝힐 것이다.

[불교신문3660호/2021년4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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