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치면 파도 일고 고요하면 본래 그대로 물이니...”

종정예하 도영대종사 조문, 장의위원회 임종게 공개

2025-11-21     박부영기자

 

종정예하가 도영대종사를 추모하는 게송을 만장에 새겼다. 

21일 조문 첫날 각계 조문 잇달아

 

성파 종정예하가 도영대종사 입적을 애도했다. 종정예하는 조문 첫날인 21일 오전 11시 경 도영스님 법구가 안치돼 있는 금산사 만월당과 처영기념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종정예하는 풍타기랑(風打起浪) 풍정시수(風靜是水) ‘바람이 치면 파도가 일고, 바람이 고요하면 곧(본래 그대로) 물이다라는 방명록을 남기며 도영대종사를 추모했다.

종정예하 방명록

 

종정예하는 조문 후 게송으로 다시 대종사를 추모했다. 종정예하는 진성불반연(眞性不攀緣) 진성불유경(眞見不由境)’, ’진성은 연()을 붙잡지 아니하고, 진견은 경계에 말미암치 않는다는 게송으로 대종사를 기렸다.

종정예하는 도영대종사와의 생전 인연이 지중했다고 밝혔다. 예하는 본사주지, 종회의원, 총무원 부장도 같이하는 등 인연이 많았다회의 끝나고 차도 마시고 오가며 마주치고 했는데 이렇게 홀연히 떠나니 허전함이 크다며 애도했다.

종정예하는 조문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머물며 법진스님 도법스님 등 문도들과 지명스님, 혜광스님, 도공스님, 운달스님 등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종사와의 인연을 회고했다. 종정예하 조문에는 영축총림 수좌 명신스님, 주지 현덕스님 등 통도사스님 10여명이 동행했다.

지명스님, 운달스님과 대화하는 종정예하.

 

이에앞서 선운사 주지 경우스님 등 대중스님 20여명과 법주사 조실 지명스님, 전 주지 도공스님, 비구니 원로 운달스님(동학사) 등이 조문하고 도영대종사와의 인연을 회고했다. 지명스님은 스님께서는 참 속가 어머니 이상으로 잘 대해주고 항상 보살펴주셨으며, 제가 미국 갈 때 공항 까지 배웅나오셨는데 저 뿐만 아니라 누구한테나 성실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말했다. 운달스님은 입적하시기 전날에도 전화하셔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황망하기 짝이 없다지금 생각하니 미리 아시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작별 전화를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법주사 조실 지명스님이 헌화하고 있다

 

운달스님 조문모습
선운사대중스님들 조문모습

오후에도 각계 조문행렬이 줄을 이었다. 원타스님 등 선원수좌회 스님들이 단체로 조문했으며, 기백산 청량사 도흥스님, 안심사 주지 일연스님 등 대중들과 박승준김제경찰서장, 금산중고등학교 교직원 등 재가자들도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선원수좌회스님들 조문모습
김제서장 분향모습
타종단스님들도 조문했다.

도영대종사는 194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1년 금산사에서 월주스님을 은사로 금오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0년 법주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80, 8494년 세 차례 금산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2001년부터 2006년 까지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을 역임했다. 월주스님 입적 후 2023년부터 금산사 조실로 후학들을 제접하며 포교에 매진하다 20251120일(음력 10월1일) 새벽 520분 완주 송광사에서, "나고 죽음은 애초에 없더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한편, 21일 오후 장의위원회는 도영대종사 임종게와 행장을 공식 발표했다.

임종게

金山道永 本無生死

금산도영, 나고 죽음은 애초에 없더라.

我坐於此 我坐於此

나 여기 앉았거늘, 나 여기 앉아 있거늘 

億萬劫算不盡 未來際任其流 吾猶端坐於此

헤아릴 수 없는 억만 겁 세월과 아득한 미래는 흘러가는 대로 둔다 해도, 나는 여전히 여기 그대로 앉아 있네.

生死往返無量 夢中曾見如幻

나고 죽는 무수한 길을 꿈결처럼 오갔고, 꿈속에서도 환인 줄을 일찍이 알았도다.

風雲造化屢遷 其變幾度經乎

바람과 구름의 조화는 몇 번이었고, 바뀐 것은 또 몇 번을 지냈던가

이재명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분향소에 도착했다.

 

금산도영 대종사 행장

한 생을 다해 포교의 현장을 지키신 금산당 도영대종사님은 1941(신사년) 71()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주산면 백석리 643번지에서 아버지 김헌철과 어머니 이묘법행 사이의 5남 중 막내로 출생하였습니다. 대종사님의 고향 마을은 6촌 이내의 친척들이 모여사는 부안김씨 집성촌으로 6촌 이내의 친척들이 많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부친은 인자하고 조용하신 분으로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셨고, 어머니는 일생 동안 시장에 한 번 나가지 않고 지낼 정도로 성정이 순백이신 분이었습니다

1948(8) 스님은 부안군 주산초등학교에 진학하여 초등교육을 받았고, 1954(14)에 부안중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하였습니다. 1957(17)에 부안농고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사촌형제들이 출가해 있던 백양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대종사님은 서옹스님, 수산스님 등을 친견하게 되어 수행자의 삶에 대한 매력과 해탈으로 나아가는 큰 포부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1959(19) 추석을 지낸 가을, 대종사님은 대해탈인에 대한 포부를 갖고 금산사에 출가하였고, 이듬해(1960) 10월 보름 동안거 결제일을 맞아 월주스님을 은사로, 금오스님을 계사로 하여 금산사 방등계단에서 사미계를 수지하였습니다. 당시는 비구대처 정화불사의 후유증으로 전국의 사찰이 몸살을 앓고 있던 때여서 스님들은 탐구와 정진에 매진할 수 없었습니다. 대종사님은 1962(22)4월 보름부터 금산사 원주 소임을 맡아 금산사 살림을 시작하였는데, 살림 솜씨가 좋아 금산사가 보릿고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963(23) 815일에는 금산사에서 금오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하였습니다. 이후 금산사 나한전과 산신각이 있는 탑전 부전소임을 보면서 동시에 서전에 계시던 금오스님께 정성을 다해 중탕밥을 지어드리는 등 정성을 다해 시봉하였습니다

스님은 금산사에서 지내는 동안 전경운 스님, 용봉스님 등으로부터 경학을 틈틈이 강학하여 19693월 금산사불교전문강원을 졸업하였습니다. 게다가, 1963년 하안거를 덕유산 백련사 토굴에서, 1965년 금산사 서래선원 등에서 금오스님을 시봉하면서 지내는 동안 선수행과 반야행자의 꿈과 매력에 푹 빠져들어 이래로 위하수와 탈장이 생긴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하였습니다. 이후 경봉스님 문하의 통도사 극락선원, 성철스님 문하의 해인사 선열당 선원, 청암사 수도암, 설악산 백담사 무긍선원 등 선원에서 정진하였습니다. 1970(30) 915일에는 속리산 법주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습니다

사찰의 주요 소임으로 1969년에는 김제 흥복사 주지에 임명되었고, 1980년부터는 세 번에 걸쳐 금산사 주지에 임명되었으며, 1986년 금산사 대적광전 화재로 인하여 금산사를 떠나 대전으로 이거하여서는 대전 계족산 아래에 죽림정사를 창건하였고, 20016월에는 완주송광사 주지에 임명되었습니다. 대종사님이 머물고 간 모든 가람은 일신되었고, 오가는 내방객들은 활기가 넘쳤습니다

대종사님이 역임한 중앙종무기구의 주요 소임으로는 중앙종회위원 3(8-10), 호계원의 초심호계위원(1994)과 재심호계위원(1998), 20019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이 임명되어 종단의 중흥을 위해 매진하였습니다. 특히 포교원장에 재직하던 중에는 신도교육의 제도화, 불교문화 대중화, 포교 프로그램 개발, 군불교 활성화, 직장 단위에 불자회 조직, 템플스테이 사업 확정을 위해 불철주야 매진하였습니다. 201911월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법계위원으로 위촉되었습니다. 2022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되었고, 이듬해인 2023년에는 금산사 조실로 추대되었습니다.

대종사님은 199912월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불교의 대 사회적 활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던 스님은 2000년에 대한불교조계종 금산사복지원을 설립하여 서원노인복지관 대표이사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는 사회복지법인 송광을 설립하여 대표이사에 취임하였습니다. 201011월에는 장학재단 백산을 설립하여 대표이사에 취임하였습니다.

20203월부터, 목 등 호흡순환기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자주 오가면서 치료를 받아오던 중, 다음을 임종게로 남기시고 20251120일 오전 520분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 약사전에서 원적에 드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