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결사 인도순례 39일차] ‘금강경’ 무대 사위성 입성 하루 전, 전법원력 다지다
누적 967km,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평온…회향 기쁨보다 아쉬움 더 짙어지다
3월19일 인도 순례 39일차 쉬라바스티 20km 지점의 한 대학에 숙영지를 마련했다. 원래 예정된 거리 보다 4km를 더 걸었다. 숙영지도 시골마을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람푸르시의 단과 대학으로 급하게 변경했다. 기원정사 터에서 봉행하는 정진회향을 제 시간에 진행하려는 배려다. 한국에서 스님 신도 등 많은 불자들이 찾는데 기다리게 할 수 없다며 순례단 측이 39일 차는 4km 더 걷기로 전날 결정했다. 39일차까지 순례단은 총거리 967km를 걸었다.
쉬라바스티로 향하는 길은 룸비니를 벗어나면서 지나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녁 예불 시간은 한국 인도 친선 친교의 시간이자, 인도 불교 신자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심어주는 법석(法席)이었다.
서드와푸르 숙영지는 5~6여채의 민가가 들어선 학교였다. 이 날 저녁 예불도 수백명의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힌디어로 예불 의미가 주민들에게 전달됐다. 치안을 책임진 경찰관, 공간을 빌려주고 쾌적하게 지낼 수 있도록 카페트를 깔고 차양막을 드리우며 쓰레기를 치우는 등 어려운 수고를 해준 마을 주민 대표, 미국의 보안관 같은 역할을 하는 듯한 치안판사 등 지역 책임자들에게는 회주스님이 직접 선물을 전달했다. 많은 주민들이 참석해 순례객 전원이 나서 주민들에게 선물을 전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주민과 어우러진 사진 촬영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됐다. 어색해하던 스님들도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먼저 손을 내민다.
도보 순례는 몸은 힘들게 마음은 단순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듯 하다. 순례객들은 모이면 먹고 배설하는 이야기로 즐거워 한다. 주는 대로 잘 먹는다. 마음이 단순해지자 사부대중 사이의 벽도 사라졌다. 스님과 재가자가 아니라 그냥 순례단 일원이다.
인도 주민과 벽도 모르게 무너졌다. 쉽게 껴안고 손잡는다. 그리고 툭하면 눈물 흘린다.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쉽게 눈물을 보인다. 나이 든 스님들일수록 더 그렇다. 순례는 이처럼 세상의 변화 이전에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래서일까? 회향일이 다가와 아쉽다는 순례객들이 꽤 있다.
“나는 전생에 인도에서 살았던 것 같다. 고향에 온 듯하다.”
“마음이 편해서 정말 좋다. 한국에 갈 생각하니 심란하다.”
“걸을 때 다리 아픈 것만 좀 덜 하면 더 있고 싶다.”
“이제 들판에서 볼 일 보는 것이 더 편한데, 벌써 끝나 아쉽다.”
반결제 때만 해도 언제 끝나나 기다리던 마음이 회향일이 다가오자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회향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순례단은 도보 순례 정진 공덕을 개인의 경험에 머물지 않고 대승적으로 회향해야한다. 그럴 때 도보순례의 진정한 회향이 완성된다.
부처님도 그러하셨다. 신생 교단 부처님의 승단을 두 손 벌려 환영하고 맞이해준 마가다국의 왕사성,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편안하게 여긴 도시였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시려 하자 아난다는 ‘수많은 제자와 단월(檀越)이 맞이하는 라즈기르나 바이샬리로 가서 열반하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난다 청대로 부처님께서 왕사성이나 사위성으로 가셨다면 이후 어떻게 되었을 까? 부처님의 열반은 그 들 나라 왕과 귀족만의 일로 끝나고 사리 역시 그들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 안이 아닌 이름 없는 숲 속에서 열반에 드셨기에 누구나 친견할 수 있었고, 사리도 많은 나라에서 분배해 인도 전역으로 불교가 퍼져나갈 수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은 그래서 불교 전법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했다.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머물고 가장 많은 안거를 난 곳은 두 나라가 아니라 코살라국 수도 오늘날 쉬라바스티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코살라국은 부처님의 나라 석가족을 복속한, 세속으로 보면 ‘원수의 나라’다. 코살라국왕 입장에서도 식민지의 왕자는 위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처럼 불교 교단의 적극적 후원자였다.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부처님 성도 후 얼마 뒤 파세나디 왕을 만났을 때 왕은 젊은이가 부처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가다국 빔비사라왕과 귀족들도 처음에 못 믿어했었다. 그러나 설법을 들은 뒤 귀화하여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를 건립해 평생 받들었다. 마가다국이 쉽게 불교 교단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당시 새로운 사상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철기시대로 접어들어 농업과 군사 정치면에서 혁명적 전환기였다. 북쪽에 위치해 일찍 철기문화를 받아들였던 코살라국은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석가족이나 부처님 외가인 콜리야족 같은 부족연합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는 강대국이었다. 코살라국은 부강했지만 문화 수준은 낮았다. 합리적 이성적 종교 사상 보다 무속의 영향이 강했다.
부처님은 세속의 세력관계는 강대국과 소국으로 나뉘지만 생명과 평화의 불법(佛法)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고자 애썼다. 신흥 강대국이지만 문화 사상 수준이 낮았던, 그래서 전법이 힘들었던 사위성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은 이유일 것이다. 부처님은 그러나 서두르지 않았다. 우선 석가족과 멀리 떨어져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개방된 마가다국에서 먼저 불교 교단을 형성하며 세력을 불렸다. 그리고 북으로 향할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사위성 사람인 수닷타가 부처님을 찾아와 사위성 방문을 청했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삼성이나 현대의 재벌에 해당하는 부호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라며 환대했다. 수닷타 장자는 죽림원에 연못을 조성한 칼란다카 장자의 친구였다. 왕사성에서 칼란다카로부터 부처님 이야기를 듣고 친견한 뒤 그는 사위성에 기원정사를 조성해 부처님을 모신다.
수닷타 장자는 도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왕래하기에도 편하며, 수행하기에 조용한 곳을 물색했다. 마침 쉬라바스티 서남쪽 1km 지점 교외에 적당한 곳을 찾았지만 파세나디 왕의 태자 제타의 소유인 제타바나 동산이었다. 그는 “동산을 팔지 않는다. 억만금을 가져다 이 동산에 깐다면 몰라도...”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수닷타 장자는 실제로 금을 깔기 시작하고 이를 보고 감동한 제타 태자가 금을 깔지 않은 나머지 땅을 기증한다. 그래서 절 이름이 기원정사(祇園精舍,Jetavanavihara), ‘기타 태자의 수림(樹林) 동산에 있는 정사’라는 뜻을 지니게 됐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성도 후 16년 경부터 말년 까지 25회 안거를 보냈다고도 하고, 어떤 기록은 성도 후 3년 째부터 19회의 안거를 기원정사와 이 인근에서 나셨다 할 정도로 부처님은 사위성 전법 교화에 매진하셨다. <금강경>을 비롯해 많은 대승경전이 기원정사를 무대로 전개되는 점을 보더라도 사위성에 쏟은 부처님의 관심을 보여준다.
부처님께서 사위성 전법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 지는 ‘천불화현 탑’에서도 드러난다. 신통을 부리지 못하게 하셨던 부처님도 미신에 빠진 사위성 사람들 교화를 위한 방편을 썼으니 바로 천불화현탑에 얽힌 이야기다. 불교를 믿지 못하자 부처님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망고씨를 심어 순식간에 거목으로 자라게 한 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하여, 그 망고 열매가 전부 부처님 모습으로 변했다. 천 분의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하여 천불화현이다. 부처님께서 열반 당시 머리를 북쪽으로 두신 것도 북쪽, 즉 코살라국의 전법을 위해서였다고 하니 코살라국에 쏟은 부처님의 전법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은 당신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불제자 단월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불교가 꼭 필요한 곳으로 가셨다.
상월결사 순례단이 편안함을 떨치고 고단한 전법의 길을 재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회주 자승스님을 비롯해서 많은 스님들이 평생 종단과 한국불교를 위해 매진하고 정진한 노스님들이다. 이제 사찰에 머물며 제자를 제접하고 단월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온한 노후를 보낼 수 있지만 고행을 자처했다. 순례단원들은 ‘한국불교 위기'를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떨쳐 일어나 실천한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곳이 아닌 꼭 필요했던 사위성 전법에 매진했던 부처님처럼 상월결사는 세상이 필요한 곳에 전법의 길을 떠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을 드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가지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서 차례로 밥을 빌었다. 그리고 본래 자리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금강경>의 무대,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향실(Gandhakuti), 아난존자가 물을 떠서 부처님께 드렸다는 우물터, 부처님의 열아홉 발자국 행선 터,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기 위해 심었다는 보리수 등 수많은 부처님 당시 유적이 있는 기원정사. 그 뿐인가. 사위성 안에는 외로운 사람을 돕는 선행을 해 급고독(給孤獨) 장자로 불리웠던 수닷타 장자의 탑터와 희대의 살인마였지만 부처님 법을 듣고 교화돼 아라한이 된 앙굴리말라 탑터가 있으니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 하나가 되듯 부처님 법 안에서는 모두 하나가 되는 불법의 위대함도 서려있다.
부처님의 강한 전법 의지가 서린 곳, 불법은 살인마도 교화하는, 생명을 살리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가장 바르고 빠른 길임을 보여주는 쉬라바스티. 상월결사 순례단이 이 곳에서 도보 정진을 회향하며 새로운 전법 원력을 다지는 남다른 뜻이 여기에 있다.
인도 도보 순례 회향일을 하루 앞둔 39일차, 순례단은 또 하나의 중요한 성지를 지나갔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와 제자들과 함께 자주 목욕했다는 아씨라바티(Aciravati)강, 오늘날 랩티(Rapti)강이다. "세존께서는 아난다를 데리고 아씨라바티강으로 가서 언덕 위에 옷을 벗고 곧 물에 들어가셨다. 목욕을 하신 뒤 도로 나와 몸을 닦고 옷을 입으셨다. 그 때 아난다는 세존 뒤에서 부채로 세존을 부쳐드렸다"<중아함경 '라마경'>
길, 강, 들판, 골목, 곡식, 사람...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 귀에 들리는 소리 어느 하나 부처님과 인연 안 닿는 것 없는 인도 땅이다. 제 발로 걷는 순례가 아니면 볼 수 없고 들을 기회 없고 느낄 수 없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공덕이다.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 주=박부영 선임기자 chisan@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