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사 다하고 보리과 성취해 요익중생하라”

[특별인터뷰] 전 조계종 포교원장 도영스님 “자신감 갖고 인생을 살아야” 50년 가까이 군포교 실천 “물질·이익 치중…코로나 발생 청정심 유지 생활자세 필요”

2020-08-19     이성수 기자

한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찾아온 7월 말 완주 종남산(終南山) 송광사는 피어나기 시작한 연꽃으로 연화장(蓮華藏) 세계로 변했다. 조계종 포교원장과 제17교구본사 금산사 주지를 지내며 ‘전법의 꽃’을 피운 도영스님을 약사전에서 만났다. “궂은 날씨에 멀리서 왔다”면서 차를 건네는 스님의 얼굴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소가 피었다. 
 

7월말 완주 송광사 약사전에서 만난 전 포교원장 도영스님은 “주인의식을 갖고 보살의 삶을 살아야 한다”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도영스님은 일성으로 불자라면 보살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즐겨 외는 게송은 ‘작야몽중두두불(昨夜夢中頭頭佛) 금조개안물물살(今朝開眼物物薩)’이다. “어젯밤 꿈에서는 머리 머리마다 부처이더니, 이른 아침에 눈 뜨고 보니 물건 물건마다 보살이다”라는 의미이다. “부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곧 부처님이고 보살이며, 나아가 나와 인연이 없는 모든 존재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 스님은 ‘원간창외처처주(遠看窓外處處主)’, 즉 ‘창밖을 보면 처처가 주인’이란 뜻의 가르침을 일러주었다. ‘처처불상(處處佛像)이요, 사사불공(事事佛供)’과 맥을 같이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스님의 가르침이 마음 깊이 다가온다. 스님이 주석하는 약사전 밖에는 비가 그치고 더위를 식히는 바람이 마당을 가로 질렀다. 

당나라 선승(禪僧) 임제의현(臨濟義玄)스님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도 같은 의미라고 덧붙였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청소년법회나 군법당에서 법문 할 때 이러한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100세 시대가 될 텐데, 10대~20대 젊은이들은 80년 이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이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려면 ‘내가 우주의 주인’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960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금산사로 출가한 도영스님은 당대의 선지식 금오(金烏)스님을 시봉하며 정진했다. 백양사로 출가한 인연이 있는 사촌형의 영향으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친인척 가운데 출가한 스님이 4명이나 되니 불연(佛緣)이 깊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뀐 60년이란 세월이 찰라(刹那)처럼 흘러갔지만 출가 초기의 원력은 지금도 선명하다.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거짓되지 않고 진실하게 보살로 살아야겠다는 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금생에는 보살로 살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상좌들의 법명에 ‘참 진(眞)’자를 넣은 것도 이러한 원력 때문이다. 

평생 전법(傳法)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도영스님은 특히 군포교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다. 1970년대 중반 금산사 총무 소임을 볼 당시 전주에 있는 35사단 군법당과 인연이 되면서 비롯된 스님의 군포교는 어느새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 후 부사관학교, 논산훈련소 군법당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군법당에서 군인들을 만났다. 1994년 종단개혁 직후 논산훈련소 군법당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은 것도 군포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9월부터 2006년 9월까지 제4대 조계종 포교원장으로 재임하면서 각별하게 신경 쓴 불사가 군포교이다. 2005년 9월 군종특별교구가 출범하도록 총무원과 중앙종회 스님들을 만나 설득한 것도 그 때 포교원장으로 있던 도영스님이다. 

포교원장 당시 전방에 있는 연대급 법당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법문을 하고 장병들을 격려했다. 스님의 설법은 한 줄기 감로수였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데, 어떤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흘러갑니다. 장병들 각자의 삶에도 고비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이겨내고 극복하기 위해 밀고 나가야 합니다. 힘들다고 ‘나는 못하겠어’라고 멈추면 안 됩니다.” 

출가 직후 시봉한 금오스님의 영향을 받아 선원에서 방부를 들이고 참선 수행의 원력을 세웠다. 하지만 종단과 교구본사의 소임을 보아야 하는 ‘운명’ 때문에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1976년 해인사 선원에서 혜암스님 지도를 받고, 이듬해에는 통도사 극락암 선원 경봉스님 회상에서 정진한 시절을 회고했다. “해인사 퇴설당에서 정진할 때 유나인 혜암스님의 소참법문은 수좌(首座)의 길이 얼마나 환희심 나는 것인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1977년 극락암 선원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화두를 들었던 시절도 잊을 수 없다. “그때 정말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경봉스님께서 ‘사바세계를 무대로 주연으로 멋지게 쇼를 하는 거야’라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부족한 것을 알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인 1987년 여름 김천 수도암 선원에서 정진하고, 포교원장 임기를 마친 2006년 겨울 인제 백담사 무문관에서 화두를 참구하며 간화선의 진수를 맛 보았다. “수도암에서 새벽에 눈을 감고 있어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먼동이 트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포행 길에 만나는 야생화와 잡초들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금오스님과 경봉스님의 영향을 받은 도영스님은 “비록 나의 삶이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자신감과 주인의식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갖게 했다”고 참선수행의 수승함을 강조했다. 

출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전북불교회관 설립을 꼽았다. 대학생 불자들의 공간을 마련해주었는데, 전세이다 보니 13번이나 이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전주 시내에 불교회관을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스님은 “불사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대금을 제때 지불 못해 수모도 겪었다”면서 “한 해 공사를 쉬고 1987년 5년 만에 준공식을 할 때 어려운 일들이 떠올라 목이 메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전북불교회관은 총무원을 제외하고 사실상 첫 번째 불교회관으로 전북불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도영스님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사태와 관련 “그동안 너무 물질적인 것에 치중하면서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간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다보니 발생한 문제”라며 “인류가 청정심(淸淨心)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경책했다.

불교신문 독자와 불자들에게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여 그 결과를 이웃을 위해 회향할 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열심히 정진하고 본분사(本分事)를 실천해야 한다”면서 “부처님 계행을 지켜 청정하게 수행하고 보리과(菩提果)를 성취하여 전법도생(傳法度生)하고 요익중생(饒益衆生)하라”고 가르침을 전했다. 

언제 두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스님과의 인터뷰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비는 모두 그치고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도영스님이 주석하는 송광사의 연못에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 향기를 전하고 있었다. 약사전 마당까지 나온 도영스님이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뜻을 전했다.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가 담겼다. “출가 수행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스님의 삶이어야 합니다.”
 

◼ 상좌들에게 전하는 게송

스승의 날인 지난 5월 15일 완주 송광사(주지 법진스님)에서는 ‘사법호유게(賜法號遺偈) 법회’가 봉행됐다. 세수 80세를 맞이한 도영스님이 상좌들에게 법호(法號)와 발우를 전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날 제자들에게 전한 게송은 출가수행자 도영스님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문과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守護慈忍(수호자인) 以爲精進行本門(이위정진행본문)
堅持佛戒(견지불계) 心得淸淨菩提果(심득청정보리과)
和合僧衆(화합승중) 自他爲宗門活計(자타위종문활계)
隨機演暢(수기연창) 傳法度生廣度衆(전법도생광도중) 

“너그럽게 참는 마음으로 정진의 근본을 삼을 것이며,
계행을 굳게 가져 청정한 보리과를 이루도록 하라. 
승가 대중들은 화합하여 종문이 융성할 방책으로 삼고,
근기에 따라 연설하여 불법을 전하고 중생을 널리 제도할 일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상좌인 완주 송광사 주지 법진스님(왼쪽)과 포행을 하는 도영스님의 발걸음이 가볍다.

◼ 도영스님이 걸어온 길

1941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김헌철(金憲喆) 선생, 모친 법명은 묘법행(妙法行). 유학자인 선친이 개설한 서당에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주산초등학교, 부안중학교, 금산상고를 졸업했다. 1961년 금산사로 출가해 금오스님을 시봉하며 정진하고, 금산사 강원에서 용봉스님에게 교학을 익혔다. 은사는 월주스님이다.

금산사 총무를 거쳐 주지 소임을 보면서 도량을 정비하여 사격(寺格)을 일신했다. 김제 흥복사와 완주 송광사 주지를 비롯해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교무부장, 조계종 포교원장을 역임하며 불교 발전과 전법에 기여했다. 해인사, 수도암, 극락암, 백담사 선원에서 화두를 참구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군포교에 적극 나서고, 2010년에는 인재불사를 위해 백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고향의 어르신들을 위해 수년째 경로잔치를 열었다. 저서로 <보름날 전 일은 묻지 않겠다>가 있다. 법호는 금산(金山). 현재는 완주 송광사 회주로 주석하며 수행하고 있다.

완주=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사진=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신문3606호/2020년8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