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무더위일까, 낮엔 폭염 속에 한 말쯤 되는 땀을 흘렸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답사라곤 해도, 한 여름에 다니는 게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사실 답사라는 건 광야에 나선 나그네의 발걸음과 다를 바 없다. 광야에선 비나 이슬이나 바람이나 심지어 햇빛조차 피할 순 없다. 누구든 이 광야에서 온전히 편하게 지낼 순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생은 광야와 무척 닮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고된 삶 속에서도 잠시 짬을 내 명산고찰을 찾아 심신을 쉴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호사인가.

 

목탑 형식을 한 유일한 팔상전 ‘주목’ 

신라-고려-조선시대 성보문화재 총 망라

                  

정이품송을 지나 매표소를 통과해 법주사로 올라간다. 절에 접어드는 한 5리 되는 숲길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어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예

전 사하촌(寺下村)이 있었던 길 양쪽에 죽 빡빡하게 늘어선 상가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그렇지, 법주사는 참 기다란 계곡 안에 자리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여기처럼 절 찾아가는 길에 산과 계곡의 운치를 잘 느낄 수 있는 곳도 흔치 않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관심 밖의 사람이더라도 절과 불교라는 것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옛사람도 그랬을 성 싶은 게, 예컨대 이런 한시가 있어서다.

<사진설명>사천왕문

 “깊고 높은 산 주위엔 푸른 연꽃 피었고/기다란 산골짜기에 고찰 하나 있네/문장대엔 천고의 세월 간직되었고/부처 없는 굴 그늘엔 일만 그루 소나무만 있구나/용이 들어앉은 탑 속엔 진골이 담겨 있어/노새 드러누운 바위 앞에서 성인의 흔적을 찾네/삼한을 영원토록 복되게 하겠노라 그 누가 말 했던가/산호전에 앉아계신 부처님의 모습이여(嵯峨四面碧芙蓉 長岬靈源第幾重 文藏臺封千古蘚 無陀窟蔭萬株松 龍歸塔裏留眞骨 臥巖前訪聖 永福三韓誰是主 珊瑚殿上紫金容)”

<사진설명> 팔상전은 한 전각이자 한편으론 유일한 목탑이기도 하다. 예전 지금의 대웅보전 자리에 있었던 용화전과 더불어 법주사의 미륵신앙과 석가신앙을 대표하는 전각이다

고려 후기의 문인 박효수(朴孝修, ?~1377)의 ‘법주사’라는 시다. 법주사를 노래한 한시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지만, 다른 어떤 시보다도 법주사에 대한 상징성이 특히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설악산 문장대의 웅장한 모습과 속리사가 자리한 깊숙한 계곡과의 대비로 시작하여, 지난번 법주사 창건담을 말할 때 소개한 흰 노새 이야기, 그리고 법주사의 이미지라고 할 미륵불까지 시 속에 고루 담겨 있다.

지난 회에 여러 차례 강조한 것처럼 이렇게 법주사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미륵도량임이 고려시대의 한시 속에서도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어쩐지, 이건 전문가적 관점이 아니라 순전히 순례자로서 받은 인상인데, 지금의 법주사는 미륵신앙이 그다지 강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국 미륵신앙의 뿌리라는 관사는 오히려 금산사나 동화사에 물려준 채 법주사는 한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법주사에 와서 이곳의 다양한 문화재들을 대충 흘려보고 돌아가서는 곤란하다. 여기처럼 다양하고 훌륭한 성보문화재가 늘어선 곳도 참 보기 드물어서다.

청동미륵대불과 더불어 법주사의 가장 커다란 상징인 팔상전, 조선시대 중기 사찰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웅보전.원통보전.능인전,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을 봉안한 전각 중 가장 크다는 천왕문, 고려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마애여래상과 희견보살상, 그리고 신라시대 석등의 백미인 쌍사자석등과 사천왕석등, 법주사의 규모가 한 눈에 보이는 거대한 석연지와 석조.쇠솥.당간지주, 고려시대 석탑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세존사리탑 등, 한 사찰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훌륭한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법주사는 지금까지 10여 번 왔는데, 전부터 가만히 살펴보니 너무 많아 그런지 오히려 문화재 하나하나 음미하지 못한 채 돌아서는 관람객이 많은 것 같다. 지금 못하다고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사찰 측에서 이들을 위해 좀 더 차분하고 내실 있는 관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더욱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중 몇 가지만큼은 이 자리를 빌려 거론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건 몰라도, 팔상전(捌相澱)을 빼놓는 사람은 없다. 팔상전은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한 전각인데, 그보다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탑이라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기록에는 창건 당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건물은 사명대사가 1626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 팔상전이 목탑이라는 것은 1968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해체 중수공사를 할 때 기단 아래 심초석 밑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된 것으로서도 잘 알 수 있다.

<사진설명> 추래암 마애여래의상. 고려시대의 마애상으로 책상다리처럼 앉은 모습이 독특하다. 고려불교 조각의 우아함과 화려함이 잘 나타나 있는 수작이다.

우리나라에 이처럼 조선시대 이전에 지어진 3층 이상의 다층으로 된 목조 사찰건축이 몇 있다. 예를 들면 금산사 미륵전을 비롯해서 아쉽게도 1984년에 불탄 화순 쌍봉사 대웅전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목탑형식을 한 것은 이 팔상전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보통이 아니다.

미륵불은 석가불의 부촉을 받아 석가불 입적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도솔천에서 이 사바세계로 내려온다고 한다. 그러니 미륵불은 석가불과 사실 연관이 깊다. 이를 건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용화전을 중심구역에 놓고, 그 앞에 석가불을 상징하는 팔상전을 배치한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현생과 내세를 한 공간에 펼쳐 보이기 위한 것이 바로 이 팔상전과 용화전이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찰의 건축 구조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바라보면 옛사람들의 지혜와 깊은 뜻이 느껴져 훨씬 의미도 있고 재미도 더해진다. 창건 당시의 법주사에는 대웅전이 없다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웠는데, 창건 때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서 이것으로써 금당을 삼았기 때문이다.

<사진> 책상다리한 추래암마애불은 미륵 ‘추정’

보통 사람들이 법주사 관람 뒤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 중 하나가 청동미륵대불이다. 누구는 오래되지도 않은 이 불상을 기억하는 부박함을 탓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륵대불이 생각나는 건 그 만큼 사람들 마음속에 미륵불이 크게 자리 잡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미륵불을 보고나서 세상을 가꿔 갈 미륵불의 위대한 원력에 희망을 느낀다고 말하는 건 유치하고 저급한 말장난이지만, 사찰을 찾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찰의 어떤 아이콘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었다는 건 성공 아니겠는가. 사실 25m 높이로 우뚝 선 이 미륵대불이 만들어진 건 불과 40여 년 밖에 되지 않지만 역사의 길고 짧음이 반드시 중요한 건 아니다. 이 짧은 역사 동안에도 미륵대불은 이미 절의 기본 정신을 간직한 상징으로 인식된다는 게 보다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특히 요즘처럼 미륵의 정신이 실종된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법주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좀 더 시선을 넓고 세밀하게 둘 필요가 있다. 경내 구석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고려 마애여래의상이 있어서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은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또한 미륵불로 추정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 연면히 이어져왔던 법주사의 미륵신앙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또 이 불상 왼쪽 아래에도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으니 이들을 놓쳐서는 아깝다.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창건주 의신이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한 것과 진표스님이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 한 소가 그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 마애여래의상을 조각수법이나 표현이 신라불상에 비해 많이 못하다는 평을 내놓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불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조각상만큼 법주사의 창건의지와 미륵불 내현에 대한 민중의 절절한 꿈을 민중의 입장에서 펼쳐 보인 작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미륵불이 중생을 찾아온다는 56억 7천만 년을 숫자 그대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때론 하루가 여삼추 같을 때가 있고, 10년이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 지나가는 일이 우리 인생에선 비일비재하니까. 천문학적인 숫자의 그 세월이 바로 내일, 한 달 후, 일 년 후에 내 눈앞에 펼쳐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벼운 흥분도 인다. 돌아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진 것 같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54호/ 8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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