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알면 고통 없는 ‘本來成佛’입니다”

본래 부처인 내 자신을 알지 못해 ‘고통’
수행은 내 자신을 알기 위한 ‘능력 키움’

‘들어오면 비우고 떠난다’ 보시가 들어오면 곧바로 급한 용처를 찾아 남모르게 전한다. 스님은 “나에게 들어왔다고 해서 내 돈이 아니다. 내가 스님이기 때문에 신도들이 보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살 만한 토굴도 많다”며 항상 더 급한 곳을 찾아 전하고 말없이 떠난다. 

“제가 이렇게 토굴생활을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검소하게 지냄으로써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은 인연으로, 좀 더 나은 수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입니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이 정도 사는 것은 (제 생의 토굴로는) 최고급입니다. 얻어먹는 사람이 호화스럽게 지내는 것도 안 맞는 것입니다. 찾아오는 분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올해 일흔일곱의 동춘(東椿)스님은 <부처님이 들려주신 효이야기> <밤톨이와 얼짱이의 효도 뚝딱> <엄마 아빠 고마워요> 등 효(孝)사상이 듬뿍 담긴 서적 60만부를 전국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보시한 종단의 원로의원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언론에는 인터뷰 한 번 제대로 해 봤으면 하는 스님 중의 한 분이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거처가 알려지기 시작하면 스님은 또 다른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을 얘기하는 것은 그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몰 후면 촛불이 도심을 환희 밝히는 서울중심을 벗어나 스님을 만난 곳은 지난 3일 신라 고도(古都)의 함월산 자락. 녹음이 짙은 개울을 따라 오르다 연밭 너머에서 찾아낸 곳으로 한 점 꾸밈없는 농가와 다르지 않았다. 간단한 조리기구와 책 보따리를 쌓아둔 통로, 서너 평 남짓 방을 갖춘 황토벽 기와집이다. 외벽엔 농기구. 방안 내벽엔 화선지 반절을 또 반으로 나눠 붓으로 직접 써서 붙여놓은 ‘佛(불)’자와 ‘반야심경’, 그리고 혼자 누울 수 있는 보료와 붓, 화선지 몇 장이 전부다.

‘일체가 불법(佛法) 아닌 게 없다’고 하지만 스님은 뭣 때문에 이렇게 살까? 아무리 수행을 오래했더라도 혼자 있다 보면 게을러질 수도 있을 텐데….

“대중처소에서 공부하면 대중의 힘으로도 공부가 됩니다. 혼자하면 나태심이 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항시 발심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피곤하면 누울 수도 있고 눕다보면 잠이 들 수도 있습니다. 잠이 들지 않아도 잘못된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초학자는 대중들과 공부하는 게 좋습니다. 대중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에게라도 대중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권합니다.”

혼자 사는 이유를 묻는 줄 알면서도 스님은 이렇게 에둘러간다. 공부에는 왕도도 없고 정답도 없다는 전제도 항상 따라 붙는다. 스님이 “혼자 사는 것은 스스로 혼자 살기를 원해서 하는 것뿐이며, 공부에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한 가지 있다” ‘쓸 데 없는 얘기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동춘스님

“여럿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공부를 잘 할 수도 있지만 쉬는 시간에 쓸 데 없는 얘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공부라는 것은 항시 연결돼야하는데 쓸 데 없는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보면 공부에 진척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피하기 위해 저는 공부가 좀 덜 되더라도 혼자 사는 것입니다.”

“쓸 데 없는데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유지만 연륜만큼이나 토굴과 인연이 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 13살의 어린 나이에 귀국한 스님은 19살에 한국전쟁을 만났다. 군(軍)에서 5년여를 보낸 후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전에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은사 석암스님을 만난 후에도 수행처를 찾아 스스로 공부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후에 은사의 권유로 선암사 주지 두 차례, 문경 봉암사와 봉화 각화사 주지를 각각 한 차례 맡은 것 외에 40여년을 거의 선방과 토굴에서 보냈다. 비만 겨우 피할 수 있는 비닐 천막에서 살기도 하고 때로는 굼불 때며 끼니를 겨우 때울 수 있는 토굴에 살며 나태심이 생기면 금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잡아 다시 정진하고 적응이 될 만하면 집착을 버리기 위해 또 다른 수행처를 찾아 떠났다.

사제인 정련스님이 부산 내원정사 조실로 모시기도 했지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또 나섰다.

“사람은 본래 부처인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이 바로 부처인데 그것을 바로 알지 못해 중생으로 있는 것입니다. 나도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나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불교는 어떤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각(自覺)의 종교입니다. 내가 깨달음으로써 누구에게도 고통 받지 않고 헤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는 아닙니다.”

그러면 스님은 스님 자신을 아는가?

“나도 아직 나를 모르니까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불했다면 시중에 나와 중생과 고락을 함께 하며 중생교화를 해야지요. 저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수행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 있더라도 ‘마음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변은 해 줄 수 있지 않나? 스님은 스님의 역할이 왜 필요한지까지 나아갔다.

“참선하는 것도 되고, 부처님을 생각(염불)하는 것도 되고, 기도하는 것도 되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다만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먼저 공부한 사람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공부한 사람들도 공부가 잘 안되면 안 되니 더 열심히 하고, 잘되면 잘 되는 만큼 더 열심히 해서 목적을 달성(究竟)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 외에 아무 것도 더 없다. 매사 최선을 다해야 한다. 스님은 그런 면에서 “출가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낼 모래면 나이가 팔십인데 보통사람은 같으면 이렇게 밥 끓여먹고 사는 게 귀찮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는 귀찮다는 생각 한 번도 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내 스스로 해 먹고사니 음식이 짜다고 시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스님은 그래서 “후회도 없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멋진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참 과거의 인(因) 때문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늘 부처님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불교를 알게 되면 걸릴 게 없다. 불교를 올바로 알면 이래도 편하고 저래도 편하다. 아주 멋지게 생활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답변은 간단하다.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한다. 살다보면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보게 된다. 그러나 시비는 하지 말라. 욕심이 있으면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대가를 바라니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동춘스님

■ 동춘스님은…

효와 불교사상 담긴 불서 
새싹들에게 60만부 보시


스님은 부모에게 효도를 못했다고 한다. 출가 후에도 한국과 일본에 따로 살게 된 부모가 서로 자신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지만 고민 끝에 사형이 준 <부모은중경>을 보고 수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수행을 잘 해서 부모를 제도하는 것이 은혜를 올바로 갚는 것이다. 어머니를 생각해서 일본으로 가면 아버지가 서운할 것이고 아버지를 생각해 한국에 남으면 어머니가 서운할 것. 기왕에 출가한 몸 수행을 열심히 해서 부모은혜를 갚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닌가.”

어린이들을 위한 책보시도 그래서 시작됐다.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 있던 누님이 스님 몫으로 남긴 유산 1억2000만원으로 책 보시를 시작했다. 모자라는 것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한 종단 집행부 스님과 종무원들이 돕기도 했다. 그 때부터 스님은 돈이 생기는 대로 효(孝)와 불교 사상이 행간에 흐르는 책자 보급에 나섰다.

스님이 쓰는 돈은 1년에 100만원이 채 안 된다. 연간 연료비 50만원. 극히 드문 일이지만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KTX 타는 것 이외에는 거의 무궁화열차를 이용한다. 누군가에게 보시 받은 명주옷 한 벌은 옷걸이를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선암사에 있을 때 입던 법복을 아직까지 입는다. 30년이 넘었지만 손수 다듬어 입다보니 크게 헤진 곳도 없다는 이유다.

또 언제가 누가 불사에 보태라고 건넨 보시금 3억원도 한 푼도 안남기고 ‘급한 곳’에 다 전하고 말았다. 총본산성역화, 불교병원 건립, 해인사 선원 건립, <가산불교대사림> 불사. 그리고 각종 재해가 있는 곳이면 직접 달려가는 대신 총무원에 몰래 보시했다. 상(相)내지 않기 위해 사전 연락 없이 전하려 했지만 지난 6월초 미얀마돕기 성금을 전할 때는 총무원장 지관스님에게 ‘걸려’ 사진 찍히느라 곤욕을 치렀다.

자신을 비워 필요한 곳에 모든 것을 던지는 스님. 채문식 국회의장 시절 그가 내 걸었던 봉암사국립공원 지정 공약을 막아내는 데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이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그런지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경주=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444호/ 7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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