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옹주는 돈독한 불자였다. 이러한 부도가 있었기에 세조도 수종사를 찾아갔을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도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시주해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 유적 중에는 세조(世祖)의 흔적이 남은 곳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면 강원도의 월정사 및 상원사가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고, 파주 보광사가 있으며, 그리고 남양주 수종사와 양평 용문사도 빼놓을 수 없다. 좀 더 시각을 넓히면 초상화가 비전(秘傳)되었던 합천 해인사도 세조와 관련이 없을 리 없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는 세조의 이미지는 폭군으로만 알려져 있다.

 

조선 세조 뱃길로 환궁도중 발심해 사찰 복원

불심 돈독했던 대고모 정의옹주 부도도 존치

<사진설명> 세조가 복원해 이름 지었다고 전하는 수종사 전경.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성격파탄자 정도는 아닐지라도 조카를 죽이고 그를 반대하는 충신들을 처형하면서까지 왕위에 오르려했던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이미지가 그에게서 떠올려지는 첫인상이다. 하지만 이건 일반인의 감성적이고 서정적 접근이지 역사적 평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건국 초기라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개국공신에게 집중되었던 토지를 환수하는 토지법을 시행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의 출판사업 중에는 <법화경> <금강경> 등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함으로써 불교발전에 이바지한 업적도 특기할 만하다. 그를 탐욕의 화신이 아닌 한 개인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은 문학에서도 나타나, 월탄 박종화의 ‘운현궁의 봄’은 종묘사직을 생각하여 거사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세조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어 상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지 않았는가. 따라서 세조를 마냥 못된 인간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그는 호불(護佛)의 군주였다는 점에서, 비록 그러한 그의 불교 보호가 자신의 살생을 씻기 위함이었다는 오해가 크지만, 그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길이 마냥 무의미해 보이지는 않는다.

해서 이번 탐방은 세조의 자취가 남은 곳으로 정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가까운 경기도부터 가기로 정했는데, 따져보니 첫 목적지로는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가 알맞아 보인다.

경기도는 면적이 1만㎢가 넘어 전 국토의 10%나 될 정도로 넓고 크다. 빼어난 산수와 절경이 많아 예로부터 숱한 시인묵객과 여행자들이 이곳의 경치를 찬탄해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지금은 민통선(지금은 없어졌지만)과 휴전선이라는 민족의 족쇄가 걸쳐 있는 탓에 이 시대를 사는 나그네의 한 사람으로서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경기도의 이름난 명승고적 구석구석을 맘껏 다녀볼 수 없는 게 한일 따름이다.

그 많은 불교유적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 없어 대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전통사찰수를 찾아보니 모두 99개나 되어 174개인 경북 다음으로 많다.

<사진설명>세조 어진. 해인사에 보관된 세조의 초상화. 잔혹한 폭군이라는 그의 이미지 뒤에는 호불군주로서 불교를 보호하려 했던 행적도 남아 있다.

수종사(水鍾寺)는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雲吉山) 정상 바로 아래에 있다. 팔당대교 북단을 지나는 6번국도를 타고 양평으로 가서 양수대교를 건너면 남양주 영화종합촬영장이 나오는데, 그러면 곧바로 수종사로 향하는 고갯마루가 나온다. 그런데 이 고갯마루는 포장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꽤 가파른 편이다.

그래서 눈이 조금이라도 오는 날은 올라갈 수가 없다. 비가 내려도 미끄러우니 사륜구동형이 아니면 몰고 가지 않는 게 좋단다. 우리가 마침 찾아간 날이 그랬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은 양수대교를 건널 무렵 가늘게 빗줄기가 흩뿌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여기부터 가파를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차를 그냥 여기에 두고 걸어서 갈 것인가, 아니면 용감하게 몰고 갈 것인가. 우리가 몰고 온 차는 H사(社)의 소형차였다. 잘하면 올라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생각 끝에 우리는 차를 놔두고 걸어가기로 했다. 일부러 등산하러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사이를 뚫고 올라가기도 미안한 노릇이고, 무엇보다 이런 길은 직접 걸어 올라가 봐야 절에 가는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한 40분 가량 꽤 힘들게 올라왔지만, 경내에 자리한 누각 겸 찻집 삼정헌에 앉아 땀을 훔치며 주변 경치를 내려다보는 순간 우리의 피로는 단박에 없어졌다. 멀리 높고 낮은 산들이 늘어서 있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하는 곳이라 해서 ‘두물머리’로 불렸던 양수리의 정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 마냥 훌륭하기 그지없다. 조선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이 ‘우리나라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격찬한 바를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또 절 이름에 ‘물 수’자가 들어가서인지 물 좋기로도 유명해서 여기 물로 차를 달여 마시면 최고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시인묵객이 즐겨 찾아왔는데, 앞서 말한 서거정이나 정약용(丁若鏞)은 대표적인 수종사 예찬론자였다.

수종사는 세조와의 깊은 관련을 빼고선 말하기 어렵다. 절의 오랜 역사 중에서도 세조와 직접 연관되는 것으로 1459년(세조 5) 왕명에 의한 중창이 눈에 띤다. 종각 밑에는 세조가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만큼이나 굵은 나이테를 간직하고 있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서 수양대군으로 봉해졌던 그는 형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이듬해 10월 정변을 일으켜 단종은 유배 보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1456년 6월에는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한 여섯 명의 충신, 이른바 사육신들을 모두 사형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왕좌를 지키려 했다. 곧이어 유배 단종과 동생 금성대군도 죽임으로써 권좌를 공고히 한 뒤 1468년에 죽었다. 세조는 비록 꿈에 그리던 일국의 왕으로서의 생은 마쳤지만 그 역시 괴롭고 한 많은 인생이었을 게다. 그래서 수종사에는 그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려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 밤이 되어 양수리에서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옆에 있는 운길산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절터가 있고,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얘기를 들은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마침내 발심하여 절터에 절을 복원케 하고 이름을 수종사라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종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곳과 세조와의 인연을 압축해서 전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진설명>정의옹주는 돈독한 불자였다. 이러한 부도가 있었기에 세조도 수종사를 찾아갔을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도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시주해 세운 것이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앞장서서 불경을 간행할 정도로 호불(好佛)의 군주였지만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에는 그런 얘기가 잘 나오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숭유억불의 시대였으므로 세조와 불교와의 우호적 관계는 극도로 감춰졌을 것이다. 수종사에 전하는 이런 전설이나마 없었다면 세조와 불교와의 호인연은 그나마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오늘 구태여 세조의 행적을 찾아보려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앞에서 말한 은행나무 말고는 세조와 직접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고모가 되는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바로 수종사에 있다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인연이 이미 있었기에 세조도 이곳으로 직접 와보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팔각오층석탑과 나란히 있지만 본래는 경내에서 왼쪽으로 벗어나 있는 산비탈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부도로서 이만큼 아름답게 만든 것은 아주 드물다. 연꽃조각이 꽤 세련되었고, 모서리에는 개구리 또는 두꺼비처럼 생긴 게 배치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 부도는 옥개석에 새겨진 글을 통해 1439년(세종 21) 금성대군 등이 시주하여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조가 수종사를 중건하기 꼭 20년 전이다. 정의옹주는 평소 불교를 돈독히 믿었는데 다비 뒤에 사리가 나왔으므로 이렇게 사리탑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수종사 탐방을 마치고 나가는 길,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아래에 세워둔 차에 올라타니 갑자기 심한 허기가 몰려온다. 운전하느라 고생하는 친구도 위로할 겸 근처의 유명한 맛집을 찾아 나섰다. 오늘은 정말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배 든든히 채운 뒤 한잠 푹 자고 나면, 내일 용문사로 가는 길은 분명 가뿐해 질 것이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35호/ 6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