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삶을 초월하고자 하는 종교다. 마음은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오욕(五慾)의 감정(感情)을 요구한다. 우리 불자는 희노애락과 오욕에 중독되는 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용맹정진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나’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모험심과 용기가 필요하다.


포교란 사회대중에 ‘마음 서비스’ 하는 일

下心하는 자세로 포교현장에서 활동해야


최평규 / 대한불교조계종포교사단 서울경기지역단

우리는 주변을 돌아보면 불교종단이나 사암(寺庵), 그리고 불교관련 단체의 책임지도자들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공약과 혁신을 주창하면서 새로운 색깔의 깃발을 높이 들고 새로운 비전(vision)을 제안하면서 혁신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다가 중도포기하는 안타까운 사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주된 이유는 불신주의, 냉소주의, 적당주의, 편의주의, 과거 회기주의, 요령주의, 권위주의 발상이 되살아나고, 이것들이 무사안일, 복지부동, 물귀신 작전, 무소신, 책임전가 등을 양산해 서서히 혁신의 분위기를 오염시키는 반혁신 현상들이 나타남으로서 혁신에 대한 내부의 열정이 식고 응집력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포교사들은 포교사단이 조계종의 역사성과 고유한 설립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기반으로 하여 포교활동을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또한 2008년 1월1일, 제5기 중앙포교사단의 출범을 계기로 아날로그(analog)식 포교방법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유비쿼터스(Ubiquitous) 시대에 걸맞은 포교활동을 실천하는 열린 포교사단이 되도록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조개는 살 속에 모래알이 박힌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오늘의 고통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희망적인 그 날을 위해 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되지 못한 우월감으로 시작한 사업이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자 이를 극복하는데만 십 수년을 소비했다. 그러나 내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자는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이제라도 해법을 찾았기에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대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삶이 훨씬 편해지고 일도 잘 풀리는 것 같다. 결국 넘어진 곳에서 한 걸음 더 나가니 그곳은 깨달음이 있는 성공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누구와도 겨루는 일 없이 자기를 끝까지 낮추는 하심하는 마음으로 사회생활에서나 포교현장에서 실천해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니 이제서야 마음이 편안하고 남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비결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태껏 습관이 되었던 ‘내가 잘났네’ 하는 마음은 결코 사회생활에서나 포교활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교사단 안팎으로 쓸데없는 오해와 적을 만들어내는 화근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2008(戊子)년도 서원(誓願)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격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없이 언제나 쉬고 싶을 때 잠시 쉬면서 근심과 걱정을 놓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쉼터>를 건립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 있다. 남을 이롭게 하면 자신이 이롭다는 의미다. 이는 포교사단이 포교사를 중심(中心)에 세우고, 사회대중을 중시(重視)해야 할 것이다. 결국 그것이 포교사가 사회대중에 대한 서비스의 근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불교신문 2396호/ 1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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